양지아문

 

제목 : 기리고차가 만주 벌판도 누볐을까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0-04-17 조회수 : 879


 이야기 과학 실록 (75) 2010년 01월 21일(목)










이야기과학실록 기리고차는 서기 300년경 중국 진(晉)나라의 최표가 저술한 ‘고금주(古今註)’에 등장한다. 이 기리고차는 1리 갈 때마다 아래에 있는 나무인형이 북을 치고, 10리를 가면 위의 나무인형이 북을 쳤다고 한다.



또 조선 후기의 실학자 홍대용이 지은 ‘담헌서’에는 중국 후송 때인 1037년에 내시 노도융이 처음 기리고차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정황으로 볼 때 세종 때 제작된 기리고차는 앞서 발명된 중국의 것을 개량해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영국의 측량사 헨리 바이톤이 수레를 이용해 거리 측정에 성공한 것이 1728년이었으니 조선의 기리고차는 이보다 287년이나 앞섰다. 또한 일본에서도 18세기 후반에 이노우 다다타카란 이가 거리를 재는 ‘양정차’를 국토 측량에 이용했다. 이 양정차의 경우 톱니바퀴를 이용한 원리는 기리고차와 같았다. 그러나 말 대신 사람이 끌어야 했으며, 종과 북 소리가 나지 않아 매우 불편했다고 한다.



기리고차는 농경사회인 조선에서 토지를 정확하게 측량해 그에 따른 합리적인 세금을 거둬들이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기리고차는 토목공사 등의 분야에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1450년 10월 23일자의 ‘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경기 관찰사가 아뢰기를 ‘연파곤(현 서울시 송파동)은 수세가 느리게 흐르고 또 광활하지도 않으니 삼전도(현 서울시 삼전동)의 빠르고 급하여 건너가기 어려운 것과 같지 않습니다. 청컨대 연파곤을 나루로 삼으소서’ 하니 명하여 기리고차로써 삼전도와 연파곤의 도로의 멀고 가까움을 재게 하였다.”



한편 세종 때에는 기리고차를 이용해 위도 1도의 거리를 측정하기도 했다. 위도란 지도상에서 가로선에 해당하는 것으로, 북반구와 남반구를 각각 90도로 나누어서 북위 0~90도, 남위 0~90도로 표시된다.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기술발전사’에 의하면 천문관측 기기인 간의를 이용해 지표상에서 위도 1도만큼 벌어진 두 지점을 찾아낸 다음, 기리고차로써 그 거리를 측정해 위도 1도의 길이를 알아냈다고 한다.















▲ 국립과천과학관에 복원 전시되어 있는 기리고차 



수학을 공부한 유일한 임금



이처럼 정교한 측정을 위해서는 기리고차의 기본 측정도구인 수레바퀴 둘레가 매우 정확해야 한다. 즉, 땅에 직접 닿아 거리를 재는 수레바퀴의 둘레 길이가 측정의 기준 단위가 되는 길이만큼 정확히 만들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를 위해서는 원 둘레 길이와 그 지름의 비를 나타내는 원주율 π의 값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했다. 그럼 그 당시 조선에서도 π의 값을 알고 있었을까?



원주율을 흔히 ‘아르키메데스의 수’라고도 하는데,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는 기원전 3세기에 정96각형을 이용해 3.14라는 소수 2자리까지의 π 값을 구했다. 그 후 5세기경 중국의 조충지는 3.141592라는 소수 6자리까지의 매우 정확한 π 값을 구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유럽보다 무려 1천년 이상 앞선 업적이었다.



이처럼 옛날 동양은 정확한 토지 측량 및 토목공사, 관개수로 사업 등에 필요한 방정식이나 원주율 계산에서 상당히 앞서 있었다. 특히 세종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유일하게 수학을 공부한 임금으로 꼽힌다.



“임금이 계몽산을 배우는데, 부제학 정인지가 들어와서 모시고 질문을 기다리고 있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산수(算數)를 배우는 것이 임금에게는 필요가 없을 듯하나, 이것도 성인이 제정한 것이므로 나는 이것을 알고자 한다’고 하였다.” (세종실록 1430년 10월 23일자)



여기서 세종이 배운 계몽산은 원나라의 주세걸이 지은 ‘산학계몽’이란 수학책으로서 곱셈, 나눗셈, 원주율, 제곱근 구하기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산학계몽은 조선시대 때 가장 널리 통용된 수학교과서 중 하나이며, 잡과 시험의 교재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세종 때 제작된 기리고차에는 꽤 정확한 π 값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럼 세종이 온양 온천 행차 때 첫 시험차 끌고 간 기리고차는 과연 도착할 때까지 몇 번의 북소리를 냈을까. 현재 서울 경복궁에서 아산시 온양동까지의 거리는 약 103㎞이다. 10리가 4㎞인 점을 감안하면 그때 기리고차는 10리를 알리는 두 번의 북소리 신호를 약 25번 정도 울렸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1리 개념은 지금과 매우 달랐다. 세종은 1430년 표준척을 제정하여 전국적으로 시행했는데, 이때 확정된 1주척은 20.81㎝라고 한다. 6주척을 1보라 했고, 다시 300보가 되면 1리라고 했으니, 1리를 계산해보면 20.81㎝×6×300 = 374.58m였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당시의 10리는 약 3.74㎞였다. 따라서 당시 세종의 온양 행차에 시험가동된 기리고차는 10리를 알리는 두 번의 북소리 신호를 27번 이상 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실측 전국지도















▲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된 조선방역지도는 동국지도의 모사본으로 추정된다 

원래 척의 한자인 尺은 손을 펼쳐서 물건을 재는 형상에서 비롯된 상형문자이다. 따라서 1척이란 손을 폈을 때 엄지손가락 끝에서 가운뎃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다. 그런데 1척의 길이는 국가와 시대에 따라 그때그때마다 다르게 적용되었다.



조선의 경우만 해도 세종 때는 20.81㎝였지만 세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대에 개정 또는 복구되면서 그 길이가 조금씩 변했다.



또한 1리의 개념도 300보를 기준으로 하다가 360보로 바뀌는 등 변화가 있었다. 더구나 경국대전에서 정한 조선시대의 도로 폭만 해도 도성 내에서는 영조척을 기준으로 삼고, 도성 외의 일반도로는 주척을 사용한다고 되어 있다.



영조척이란 조선시대에 사용되던 고유의 자로서 목공척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영조척 역시 시대에 따라 그 길이가 조금씩 달라 어느 것을 정확한 표준으로 삼아야 할지 아리송하다. 이런 정황을 종합해볼 때 조선시대의 10리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4㎞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기리고차의 도입 이후 거리 측정의 정확도가 높아져 정밀한 지도 제작이 활성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실측 전국지도로 알려진 동국지도이다.



1463년(세조 9년)에 완성된 동국지도는 정척과 양성지가 화공을 데리고 직접 전국의 산천 형세를 조사하며 제작한 실측 지도이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전국지도를 대표하는 동국지도는 아쉽게도 현재 전해지지 않는데, 다만 그 모사본으로 여겨지는 지도가 몇 개 남아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방역지도와 조선팔도지도, 일본 내각문고에 보관되어 있는 조선국회도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현대 지도의 해안선과 거의 일치할 정도로 정확한 이 지도들은 만주와 대마도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그 당시 지식인들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대마도의 경우 공도정책으로 일시 비워둔 사이 왜구들이 들어와 강점한 섬으로 여겼다. 또 만주는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조선인들이 많이 진출해 있었기에 조선의 영토라는 인식이 있었다.



정척과 양성지가 동국지도를 제작할 때 혹시 만주와 대마도까지도 기리고차를 타고 누볐을까 하는 생각을 한번 해본다.









이성규 기자 | 2noel@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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