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 녹둔도 영유권

 

제목 : 연해주의 고려인들 이야기 1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5-03-19 조회수 : 406

 


박재완의 기찬여행
입력시간 : 2014. 12.05. 00:00



벼슬아치 등 수탈 못 이긴 슬픈 이주 역사

양반들 노비·소작농으로 전전해

안주 위해 어쩔 수 없이 국경 넘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기도

스탈린 사망·소련 해체로 고국 찾아

디아스포라(Diaspora)는 이산(離散)이라는 의미로 그리스어다.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킨다.

지난 1948년 이스라엘 공화국 건국 이후, 이스라엘 밖에 사는 유대인을 ‘디아스포라’라고 한다.

우리에게 디아스포라는 누구일까? 조선족, 고려인,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던 제 1세대 미주·남미지역 교민들이지 않을까 싶다.

광주에서 활동하는 여행작가, 사진기자, 화가, 국악인 등 9명의 문화예술인들은 '고려인 문화예술인들과 교류협력을 통한 고려인 동포의 발자취와 항일역사 기록담기'사업을 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광주시, 광주문화재단의 후원, 국제교류기금의 지원으로 지난 10월 15일부터 26일까지 두만강 녹둔도부터 블라디보스토크, 파르티잔스크, 우스리스크, 달레테첸스크, 하바롭스크 아무르 강까지 옛 고려인들의 정취를 취재했다.



지난 1860년, 나라만 믿고 있던 선량한 민초들은 함경도지방의 극심한 가뭄과 관아의 폭정에 못 이겨 북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한인 13가구가 녹둔도만 넘으면 연해주인 곳으로 밥 봇짐을 싸 이주하면서 피 같은 이들의 역사는 시작됐다.

초창기 유민들 대부분은 함경도의 농민과 어민들이었다. 함경도는 조선정부의 차별 정책으로 인해 항상 푸대접을 받아온 지역으로, 이곳 농어민들의 피해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그곳에도 어김없이 타락한 벼슬아치와 양반들의 수탈이 횡행했기 때문.

토지의 대부분은 양반들이 장악했기 때문에 일반 농민들은 거의 노비 상태인 소작농에만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농민들은 제도적으로 아무 권리도 없었고 지배 계급을 위한 하나의 유용한 도구에 불과했다. 인격도 인정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는 오직 의무와 복종만 있었을 뿐이다.

소작인들에 대한 지배계층의 착취는 다른 지방보다 훨씬 심했다. 지배계층들은 그들의 정치적 불우함을 농민들에게 분풀이하듯 했다.

함경도는 산악지대로 경지면적 자체가 협소한 곳이다. 거듭되는 수탈과 영농의 기술부족으로 늘 궁핍을 면치 못했다.

또 가뭄과 폭풍우 등 자연 재해에 대한 아무런 방비책도, 피해 복구책도 없었다고 한다. 지배계층에 대한 상대적 빈곤감이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는 환경의 연속이었다. 특히 변경지대 농민들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없어 더욱 극심한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다.

정치는 불안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붕당과 척족들의 세도정치와 부패, 계속되는 민란과 병란으로 변경지대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그래서 농어민들은 버림받았다고 생각해 자구책을 찾지 않으면 안 돼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황폐해진 산천을 떠나 안주할 수 있다고 여긴 타국을 동경해 결국 국경을 넘고자 했다.

사실 오래 전, 북만주, 연해주 바닷가 쪽으로 농사를 짓거나 사냥을 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국경을 넘어 관군에 발각되면 참수로 다스리는 극형에 처해졌어도 주민들은 끊임없이 연해주 땅으로 이동했다.

이 땅은 우리의 고토(古土)다. 부여, 북옥저 족이 거주한 지역이며, 고구려와 발해가 실제로 지배한 땅이다.

하지만 백두산 화산폭발로 인해 지난 926년 발해 멸망을 끝으로 차차 우리 민족의 손을 벗어나 잊혀진 땅이 돼 버렸다.

발해 이후 여진족의 금, 몽골제국, 청 그리고 1860년 베이징조약으로 이곳은 러시아 땅으로 귀속됐다.

고려인들의 이주사를 살펴보면, 고려인들은 1860년 두만강을 건너 신천지를 개척하고, 1863년 지신허를 시발로 시지미, 안치혜, 수이픈 구역에도 정착했다.

1867년 185가구 999명이 모여 살게 됐고 1869년 한반도 북녘의 대기근으로 1만명의 이주가 이뤄지기도 했다.

1871년부터는 러시아의 한인들을 북쪽으로 분산이주시킴에 따라 하바롭스크 쪽으로 한인들이 이동했다. 그 결과, 아무르의 첫 한인 정착촌 블라고슬로벤고예(사만리)가 탄생됐다.

1874년 블라디보스토크, 나선동, 녹둔, 도비허의 이주가 이뤄졌고 1884년 경흥개시조약으로 금강이 해제돼 1889년 수찬지역으로 이주인구가 높아져 갔다. 1902년 한인 이민자 수는 3만2천380명에 달한다는 기록도 있다.

1904년 연해주에 32개의 고려인촌이 형성됐으며, 이중 포시에트 지구 22개 마을에 3만여명이 거주하기도 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의병 기지화가 신설되면서 1908년 의병들의 수는 6만9천8백여명에 달한다고 알려졌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연해주로 한인들의 이민이 급증했고 이곳은 항일독립운동의 성지로 만주의 용정과 함께 발돋움했다.

1910년 한인 수는 약 10만명에 달한다. 앞서 1904~5년 러일전쟁 때는 이범윤의 충의대 고려인부대가 러시아군을 도와 적극 전투에 참가했으며,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 후 안중근 이상설 유인석 등이 블라디보스토크에 결집했다.

1907~1908년 사이에 최재형 이범윤의 동의회, 김중화 의병 등은 이곳에서 1천700회나 전투에 나서기도 했다.

1914년 교민 수가 6만3천명에 달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신한촌이 건설됐다.

이러한 가운데 1914~18년까지 러시아 차르정부 1차 세계대전에 고려인출신사병과 장교들이 러시아군으로 징집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러시아가 참전한 이들에게 시민권을 주고 러시아 국민으로 대우해 주는 통에 많은 한인들이 참전을 했다고 한다.

1918년 4월 일본군은 ‘국제 간섭군’이라는 미명으로 연해주를 점령했다. 일본군과 러시아군 간의 우수리스크 지역의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킨 보복으로 1920년 4월 4일 야간을 틈타 일본군들은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등지에서 극동공화국 부대를 공격해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4월 5~6일에는 신한촌을 급습, 방화와 학살의 만행을 자행했다.

1923년 당시 거주한인들이 10만여 명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 25만명 이상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32년 연해주에는 한인 학교가 380개나 됐다. 잡지 등 6종, 신문 7종, 연해주 시대는 최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1937년 여름부터 2천500여명의 지식인과 한인지도자들이 영문도 모른 채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거나, 처형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9월 21일 ~11월 15일까지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한인들 전원은 중앙아시아(6천㎞)로 강제이주를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럼에도 스탈린 사망과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그들은 꿈에도 그리던 연해주로 다시 돌아오게 됐다.

그들은 중앙아시아 사막에 있으면서도 고국을 그리워하고 동쪽 연해주를 향해 묘지를 쓰던 한인들. 그들이 바로 우리의 이산가족 디아스포라다.


무등일보 zmd@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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