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 녹둔도 영유권

 

제목 : 건국 녹둔도의 역사적 배경과 반환받아야할 이유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07-04-07 조회수 : 1522


2007/02/19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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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녹둔도의 역사ㆍ지리적 개황




1) 녹둔도의 역사적 상황




녹둔도가 위치하고 있는 두만강유역은 고래로 숙신, 읍루, 옥저ㆍ말갈ㆍ여진족 등의 흥망지이었다.

이러한 녹둔도가 문헌상으로 나타나기는 세조가 함길도 도절제사인 양정도에게 『造山口子 鹿屯島民布野時 骨等乘船潛入 搶掠可慮 密諭鎭將及萬戶 嚴加備御』라는 내용에서이다.



이같이 밀유(密諭)가 있기까지는 세종의 육진 개척 이후, 잦은 오랑캐들의 침범이 있어 변방에 이주한 주민들의 보호를 위해서인데 세조실록지리지 함길도조에 보면 『曆孔洲 同流二十三至 沙次乃島分流五里許入海』라고 하였는데 공주라 함은 조선조 이전의 지명으로 이태조 때에는 공성(孔城)ㆍ광성(匡城)의 이명으로 오늘날의 경흥지역을 일컬었다.



이 지역이 한때 여진족이 웅거하던 곳이라 여진족어식의 지명이 상당수 있어 사차료도(沙次了島)라는 여진어형의 이름이 생기지 않았나 추측된다.



경흥읍지에도 『鹿屯嶋 一名 沙次麻 在府東七十里 豆滿江入海處』운운이라고 한 것을 보아, 두만강 입해처에 타도를 찾을 수 없음은 물론 섬에서 경작까지 할 만한 정도의 큰 섬이 없는 것을 보아 필시 녹둔도의 구명(舊名)이 사차료도(沙次了島) 또는 사차마(沙次麻)로 여겨지는 것이다.



세조 원년 이후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녹둔도 관계기사는 성종 17년 2월 무술조, 중종 5년 3월 경신조, 중종 37년 5월 신축조, 선조 16년 12월, 동왕 21년 정월ㆍ6월ㆍ7월과 철종 고종년간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무수히 산견할 수 있다.



세종의 육진 개척 이래 녹둔도가 변방의 방비를 위한 전초기지로서 주로 경략되어 왔음은 세종실록지리지 경흥조에 잘 나타나 있다.

즉 『關防二撫夷 萬戶領軍六十五部防禦造山浦』 『兵船泊立 萬戶領船軍 九十防守』라 기록하고 있어 경흥관내에 2개 처의 관방소가 있는바, 이중 조산보는 녹둔도와 십리지척간에 있어 조산보관할구역에 속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행정관할구역상 함경북도 경흥군 노서면 조산동이 있어 이 동리 한가운데에 나지막 구릉을 등지고 조그마한 성이 있었는데, 이성이 바로 조산보의 성으로 이 성문에서 불과 십리 거리에 마주 대하고 있는 삼각주의 섬이 녹둔도인 것이다.



육진 개척이래 세종년간에도 녹둔도에 경작할 즈음에는 오랑캐들의 불시침입을 우려하여 진장과 만호에게 세조가 밀유를 할 정도로 왕의 관심을 끌었던 곳이다.



그 후로도 세종 때에 영안도(永安島) 경차관(敬差官)으로 다녀온 홍문관 전한(典翰)인 정성근의 진언 속에 조산보의 군민들이 녹둔도의 드나듦을 꺼려하고 있고, 한편 섬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만 무시로 출몰하는 야인들의 침입과 불규칙한 江上의 범람으로 상주하기에는 불가하다고 하였다. 특히 녹둔도는 흙이 찰지지 못해서 상설 방비를 위한 토성 등을 쌓을 수 없을 뿐더러 주거할 집을 짓고자 하여도 바람벽을 쌓을 수 없을 정도이므로 조산보 소속의 군인들로 하여금 경작시기에 내왕하는 농민들을 보호하고 야인의 북변 침입을 직접적으로 방어하는 기지로 활용되어 왔다.



이 밖에도 중종 5년 3월, 동왕 9년 10월, 동왕 37년 5월조에 녹둔도에 관한 방비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데, 즉 봄철에 봄갈이가 시작되면 조산보의 만호는 군민을 이끌고 녹둔도에 들어감으로써 본보가 빌 정도로조산보의 국경방술은 녹둔도로 진척하였다.



당시의 좌의정 유순정이 한때 녹둔도에 보를 구축할 것을 상주(上奏)한 바있는가 하면, 지중추부사 안윤덕의 비변대책에 들어와서는 녹둔도 방술에 관한 기록을 남길 정도이었다.



선조조에 들어와서는 녹둔도의 둔전 설치 문제가 보다 본격적으로 제기되어 일시 둔전이 실시되다가, 급기야 시전부호(時箋部胡)의 대거 침입으로 일대 참사를 당한 바 있어 이일장군의 반격으로 야인을 토벌하는 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임진왜란의 명장인 이순신 장군이 일시 조산보의 만호로 부임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호적의 침공을 막고, 이를 추격하여 격멸시키는 전과도 올렸다.



조산보 성터 동문 밖에 있는 승전봉은 후세에 그 당시의 고전적(古戰蹟)을 기리는 명칭으로 명명되었으며, 광복 당시까지만 하여도 이 곳에는 조촐한 비각 한 채가 풀밭 속에 남아 있어 전승의 자취를 전하였다고 한다.



선조조에 시행되었다가 철폐된 둔전(屯田)은 임진란 이후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역대 조정에서 그처럼 자주 거론되던 녹둔도 문제가 장기간 제기되지 않고 있다가 철종 12년(1861) 7월 무이보 관할하의 망덕산 봉수대에서 강 건너 입계비 설립 장면이 조정에 보고되면서 또다시 녹둔도는 조정의 관심을 끌게 되었으며, 한편 국제간에도 녹둔도는 한ㆍ러 국경선상의 주요 관심을 자아내는 지역이 되었다.



그 후 고종 20년(1882년) 1월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 변계 영역의 주민실태와 영토문제에 관해 관심을 돌리게 되었는데, 그 실례로 어윤중을 서북경락사로 임명하여 북방변계를 조사하여 보고토록 명하였다.



이때 어윤중이 북방으로 떠나기 앞서 고종은 『녹둔도가 본시 우리나라 땅이었는데 이번에 그곳에 가서 그 지역을 살펴보고 되찾을 수는 없겠는가』하고 하문을 하자 어윤중은 『이 섬은 오늘날 중국의 혼춘(琿春)계에 상접해 있는 데다, 두만강 사이에 놓여 있어 쉽게 귀정할 수 없는가 합니다.』하고 답한 바 있다.



이즈음에 러시아는 두만강변을 래왕하며 우리나라 함경도 경흥지역에 나타나 부단한 교역통상을 요구하여 오고 있었다.



이해 10월에 어윤중이 북방변계를 살펴보고 돌아오자 왕은 「녹둔도의 정형이 어떠하던가?」라고 묻자 『녹둔도는 본시 우리나라 땅인데 신이 조산에 가서 그 지형을 살펴보니 섬 동쪽으로 모래가 쌓여 강 건너편으로 연계되어 있고 이 섬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가 아국인으로 타국인은 없었다.』고 보고하였다.



녹둔도에 관한 국왕의 관심이 이처럼 지대함에 우리나라 조정에서는 고종 26년(1889) 청의 무성의한 국경획정으로 러시아령으로 귀속되어 버린 녹둔도에 대하여 청측의 감계위원이던 오대징 등에게 러시아와의 국경재감시에 지계를 감정하여 녹둔도를 되돌려 주도록 의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청측은 우리나라의 요청을 도외시한 채, 녹둔도는 로경(露境)에 드는 것으로 간주해 버리고 전혀 회감시에 언급조차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우리나라 조정에서는 계속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녹둔도의 귀속문제를 거론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1890년 6월 20일 당시 경흥부 감리로 있던 김우현과 녹둔도관계를 탐사하기 위해 경흥지역을 순회한 바 있는 입전혁(立田革)이라는 재 부산 영사가 김우현의 말을 인용하여 일본 외무성에 보고한 기밀 제15호의 문서 속에 『러령에 속해 있는 녹둔도는 한국령으로서 한국 정부가 러시아공사 에게 이 섬의 반환을 요구한 바 있는데,



러시아 공사도 이 문제를 본국정부에 보고하여 알려주겠다고 한 바 있으나, 아직까지 통보가 없는 것 같다』고 한 기록으로 보아도 녹둔도에 관한 우리 정부의 태도 표명은 분명하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이 녹둔도는 조선 개국 504년 조산보의 폐지와 함께 녹둔도보 역시 폐지되었다.




2) 녹둔도의 지리적 상황




녹둔도의 지리를 살펴 볼 때 그 위치나 면적, 타 지역과의 거리등은 실로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어려울 정도로 구구각색이다.



먼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녹둔도의 위치를 살펴보면 『歷孔洲 同流 二十三至沙次乃島 五里許入海』라 기록하였고 동국여지승람에는 다소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鹿屯島農堡 島一名 沙次磨島 在府南 五十六里土築 周一千二白四十七尺 高六尺 豆滿江入海處 距造山二十里 有兵船 造山萬戶所管 夏側本浦水軍 分戌干比』1라 하였고 경흥도호부읍지(慶興都護府邑誌)의 녹둔도보조에 『島一名沙沆麻 在府南西十里 豆滿江入海處 距造山堡三十里』라 하였다.



아국여지도에는 녹둔도도에서 그 위치를 설명하기를 『距西水羅三十里 西序造山堡十五里 北距慶興付一百里 端仙澤七十里 西挾逗滿江東接大瀣踞住』라 하였다.

그 후에 나온 대동지지나 대동지명사전ㆍ경흥부읍지 등도 여지승람의 기록을 능가하지 못하고 있다.

이 밖에 일본인이 쓴 조선개화사에도 녹둔도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는데

『두만강구의 삼각주인 녹도 또는 녹둔도라 칭하는 섬이 있어 경흥부에서 동남으로 70리, 조산보에서 10리여, 露領 波西圖(Posiet)에서 90리, 연추(烟秋)까지는 100리, 러ㆍ청국경선으로부터 12, 3정』이라 하였다.



일본외교문서의 녹둔도관계 잡건의 기록 중 녹둔도와의 거리를 나타낸 것을 보면 경흥부에서 100리, 露領 Posiet에서 90리, 연추(烟秋)에서 140리, 경흥에서 동남으로 70리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기실 거리 측정은 관계문헌마다 얼마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면적 또한 위치와 거리만큼이나 부정확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아국여지도를 보면, 녹둔도는 남북 70리 동서 30리 평원광야 농사 비옥이라 하였으며, 1890년 일본의 주한 원산대리영사로 있던 久水三郞이 일본국외무성에 보고한 문서 중 녹둔도의 면적은 남북이 최장 25리, 동서 최광 20리라 하였으며, 일본인 川上立一郞이 1890년 8월 한국의 경흥감리 김우현의 증언을 토대로 녹둔도는 주위 8정허라 하였다.

그리고 역시 일본인인 恒屋盛服은 그의 조선개화사라는 저서 속에 『島ノ幅員八 東西最廣七町許, 南北最長九町許……』라고 아무런 주도 없이 녹둔도의 면적을 단정하였다.



이렇듯 다양한 녹둔도의 면적에 대해 필자의 견해로는 대략 주위가 20리 정도가 아닌가 여겨진다.



도민의 주거상황도 어윤중이 조산보를 다녀온 뒤 고종 임금께 복명한 내용 중 주민 전부가 아국민이고 다른 나라 사람은 전혀 없다고 하였는데 그 후 일본이 러시아의 녹둔도 점령 사실을 확인키 위한 수년간의 첩보활동을 통해 나타난 이곳 인구수 등도 많은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즉 1890년 6월 2일자로 보고한 기밀 제46호의 우라디보스독 무역사무관이 도민수를 7,80명으로 보고하는가 하면, 같은 문건의 기밀 제14호에는 인가 30호에 9명의 관리가 있다고 하였으며, 동일한 문건의 7월 15일 자 보고서에는 인가 140호에 7,80명의 도민과 퇴역한 러병 7명이 순회방술(巡廻防戌)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8월 15일자의 기록의 제15호에서는 50호의 인가와 9명의 순찰관리가 있다고 하였다. 조선개화사에도 3개의 촌락과 130여 호의 호수가 있다고 하였으며, 아국여지도에는 아민 113호, 인구 822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가구수가 동일한 조사 자료는 하나도 없다.



이 섬을 중심으로 한 산물은 농작물로는 벼ㆍ조ㆍ옥수수ㆍ피ㆍ밀 등이 산출되며 강변에서는 연어ㆍ붕어ㆍ황어ㆍ송어 등이 주로 잡힌다고 하였다.



섬의 지형은 평지로 섬 가운데는 산은 없고 조산보 강안에서 바라보면 수면상에서 10척 정도의 높이로 수목은 별로 없고 가옥은 한식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두만강하류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섬은 강 상류에서 중류까지 급류로 흐르고 상류의 강폭은 가장 넓은 곳이 3정 정도이고 좁은 곳은 1정 정도이다.



강의 중류는 2,3개 처의 지류로 갈라져 흐르는데, 중류의 강폭은 넓은 곳이 1정, 좁은 곳은 4,5간이 된다. 가뭄에는 얕은 곳에는 발목 정도만 적시면 경흥 쪽으로 건널 수 있을 정도이다.

선박의 항행은 평시에는 어렵고, 여름에는 상류에서 겨울 동안 얼어붙은 얼음이 녹아 내리거나, 장마철에 홍수가 범람하게 되면 대형 선박의 운행이 가능하다.



한 여름철, 상류에서 급류로 밀려 내려오는 사토와 자갈은 하류로 밀려와 섬 주위에 퇴적하게 되는데, 이러한 집적물이 오랜 세월 속에 자연히 한쪽 수로를 막아 섬 동쪽편이 러령과 연접됨으로써 삼각주가 되고 말았다.



이 섬이 언제부터 육속되었는가는 정확한 연대를 추정키는 어려우나, 1890년 8월 15일자로 立田革이 녹둔도 관계를 탐사키 위해 조선연해를 경유, 포조사덕항을 순회중 경흥부를 방문, 경흥감리 김우현과 문답하는 가운데 녹둔도의 육속에 관한 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즉 『수십년전 年月不詳 강류가 변하여 해도(該島)의 서방으로 흘러 동방은 거의 수류가 없을 정도로 됨에 따라 언제부터인가 저절로 러령으로 속하였다』라고 함으로서 대체로 1800년대 순조에서 헌종년간을 넘지 않으리라 추정된다.






3. 녹둔도의 러시아 귀속배경




쇄국의 문을 견지할 때까지의 한국의 대외관계는 사대교린의 외교정책으로 일관되어 왔다. 특히 북방관계는 역사적인 면에서나 지정학적 여건으로 오로지 청에 의한 대북정책을 펴 왔다.



서기 1500년 이래 러시아는 400여 년 동안에, 시베리아지역을 병합함으로써 약 9배에 달하는 영토를 넓혔다. 세계 총면적의 1/7을 차지한 러시아는 오늘날 중국이나 미국의 영토에 비해 2배 이상의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불모의 땅으로 알려진 시베리아를 러시아가 차지함으로써 지상 최대의 영토를 장악하게 되었다.

시베리아란, 그 옛날 몽고인의 흠찰한국(欽察汗國)이 분열된 뒤에 오늘날의 토블스크 부근 일대에 실필아한국(失必兒汗國)이 건국되었는데 Sibir은 곧 Irtysh하를 향하여 이심ㆍ토볼 兩河가 합류하는 지방을 부르던 옛 지명이었다고 한다.즉 서비리아는 실필아에서 생긴 것이라 한다.



1587년에 러시아가 실필아한국(失必兒汗國)을 정복하면서 청ㆍ러의 교접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양 세력권의 접촉은 굽힐 줄 모르는 러시아의 동진정책과 이에 대결하고자 나선 청과의 무력충돌로 번졌고, 따라서 네르친스크(尼布楚)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러시아의 동방진출에 제동을 가하게 되었다.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의 흑룡강 방면으로의 진출이 저지되면서 방향을 돌려, 동부 시베리아 진출을 기도하였다.



1723년경 청이 외몽고 준갈이부(準喝爾部)에 대한 정책상 러국과의 협정을 맺을 의사를 보이자 액이고납하(額爾古納河)의 지류인 포랍하반(布拉河畔)에 모여서 몽고ㆍ서비이간(西比利間)의 청ㆍ러경계를 심정하고 국경상의 흡극도(恰克圖)를 호시지(互市地)로 정하고 러시아 대상의 북경무역을 회복하기로 하니, 이것이 이른바 캬흐타(恰克圖)조약으로서 몽고에 관해 청ㆍ러간에 체결한 최초의 조약인 셈이다.



1858년 니콜라스1세는 무라삐요프라는 38세의 재기에 넘친 젊은이로 하여금 이제까지 청에 의해 저지당했던 흑룡강 진출을 명하였다.

무라삐요프는 청이 장발적(長髮賊)의 난과 영ㆍ불연합군의 침구(侵寇)가 있어 변경을 돌아볼 여력이 없는 틈을 타서 흑룡강 요지의 강변을 차지하였다.



이 흑룡강 연안을 점령함으로써 시베리아 연해주 개발에 한층 활기를 불어넣게 되었는데, 이제까지의 캄챠카함대를 서비리아(西比利亞)함대라고 개편하고 이 지역에서의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였다.

지난날 네르친스크조약의 체결시와는 상반된 입장에서 무라삐요프는 청국정부에 대하여 흑룡강 유역에 따른 국경획정에 관한 회담의사가 있으면 순항시 회감(會勘)할 용의가 있다는 고압적인 자세로 통고하였다.



국내외적으로 수세에 몰려 있던 청국은 그 해 5월 제야강구에서 청측대표 奕山과 애혼(愛琿)에서 회동하고 담판한 후 양국의 경계는 흑룡강의 좌안을 려령으로, 그 우안의 오소리(烏蘇里)강구까지를 청령으로 정하고, 다시 오소리강(烏蘇里江)을 소상(溯上)하여 우수리강 수원에서 남방의 한반도에 이르는 일직선의 땅은 양국의 공동관리구역으로 할 것을 약정하였다.



이때부터 북구의 사나운 곰의 발톱이 우리나라 변경을 할퀴기 시작하였으며 청은 흑룡강 이북을 러시아에 양여함으로써 북방으로부터 러시아의 압박을 받을 화근을 낳게 하였다.



애혼(愛琿)조약 체결 후 러시아는 니그나티프를 주청 북경 공사로 임명하고 대청관계를 조정하고 있던중, 영ㆍ불 연합군의 북경공략이 있자 청정(淸廷)의 수뇌부가 피난을 함으로써 영ㆍ불측은 교섭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이그나티프는 양측의 조정을 자청하고 나서 도피중이던 공친왕(恭親王)을 귀궁케 하여 화의토록 하였다.



이를 기화로 이그나티프는 화의알선대가로 숙원이던 오소리강동(烏蘇里江東)의 영지를 할양받고자 온갖 계략을 다 짜냈다.



캬흐타조약에서 문제시된 서북국경지역과 애혼(愛琿)조약에서의 공동관할지역 경계는 러시아측으로서 당면한 현안 문제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급선무로 해결 지어야 할 것이 동부국경문제이었다.



러시아로서는 애혼(愛琿)조약 이후 시베리아 개척에 따른 전진기지로서 우라디보스독에 군사기지를 마련하고 태평양에 접할 수 있는 군항확보를 위해 시베리아함대까지 편성하고 나선 터이라, 시베리아 경영에 장애가 되고 있는 동부국경문제를 자기들 뜻대로 해결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청측은 애혼(愛琿)조약에서 흑룡강 좌안지대를 러시아에 할양했다고 생각지 않고 다만 임차거주를 허락한 것으로 여겼고, 청ㆍ러 공동관할구역도 혁산(奕山)이 북경 정부에 정확히 보고를 하지 않고 정한 일이라 하여 중앙정부의 공식인준을 받은 바 없으며, 따라서 혁산(奕山)의 조인행위는 월권으로 여겨 약정사항을 유보하고 러시아의 주장을 거부하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제해결의 주요임무를 띠고 있던 이그나티프는 북경조약을 1860년 11월 14일에 체결함으로써 청ㆍ러간의 공동관할지역으로 논란되던 영역이 러령으로 편입되고 청ㆍ러간의 경계가 우수리강과 쑹가리강을 거쳐 흥개호(興凱湖)를 지나 백능천하구(白稜川河口)에서 남동으로 향하는 뽀구라니차나야, 혼춘천(琿春川) 하원산령( 河源山領)을 넘어 두만강하구에 달하는 경계선을 설정하였다.



북경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던 청제는 교섭위원으로 상서(尙書)인 서상(瑞常)과 시랑(侍郞)인 성기(成琦)를 임명하여 이그나티프에 보냈다. 노서아측은 청의 약점을 십분 이용하여 미리 조약체결을 위한 15개 조항을 제시하고 협상 아닌 일방적 통보로 임하고 조약문에 대한 단 한 자의 수정도 가하지 못하게 하였다.



청은 마지못해 동조약 제1조 말미에 겨우 애혼(愛琿)조약에서 합의되었던 흑룡강 좌안의 청측 특수지역내에 청인들의 자유로운 거주를 인定하는 문구를 첨가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은 국경교섭을 위한 회담이라기보다는 러사아측의 일방적인 국경선 제시에 동의를 강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측이 제시한 청ㆍ러간의 동부국경설정에 불합리하고 미진한 곳이 상당수 있었다.



즉 흑룡강에서 두만강 상류 20리 지점으로부터 강구에 달하는 흥개호(興凱湖) 이북은 비교적 명확하나 그 이남지역은 조약상으로나 지리적 상황으로도 불명료하여 양자간의 완전합의를 보지 못하고 미정으로 남겨 동조약 제3조에 흥개호(興凱湖) 동방(東方)에서 두만강변에 이르기까지는 계표를 세워 경계를 획정하도록 양국정부가 각기 위원을 임명하여 그 임무를 수행토록 하였다.



이 약정에 따라 이듬해(1861년, 함풍(咸豊) 11년) 4월에 우수리강구에서 회동하여 현지조사를 통하여 타결하도록 하였다.



약정에 의한 경계획정을 위한 회의준비를 이듬해 예정지인 우수리강구에서 열고자 했으나 청측 위원들이 그곳에 다다르기가 매우 어려워, 흥개호(興凱湖) 서안에서 회합할 것을 러시아 측에 제안하였다.



러시아측도 별다른 이의 없이 동의함으로써, 청은 북경조약의 교섭위원이었던 성기(成琦)를 전권위원으로 임명, 청 함풍(咸豊) 11년 2월 북경을 출발, 중도에 길림에서 경륜(景綸)과 동행, 영고탑(寗古搭)을 경유하여 그 해 4월 29일 흥개호안에 도착하였다.



러시아측은 연해주총독 가사게뷔이치를 전권위원으로 하여 하바톱스크에서 수로로 흥개호안에 도착 2주간 가량 교섭에 임해 동년 5월21일 일명 흥개호조약으로 알려진 북경조약 추가조관 및 정계도, 국경설명서에 조인을 하기는 하였으나, 청측은 북경조약에 관해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측이 고압적인 태도로 나와, 동부국경의 북단에서 목능하국경(穆稜河國境), 남단에서의 혼춘하국경(琿春河國境) 등 국경분쟁의 불씨를 안은 채 일단 경계획정을 하고 말았다. 이로써 러시아는 동해의 양 항과 흑룡강 방면에서의 연결선을 확보하게 되었고 수분하(綏芬河) 유역의 평원을 지배권에 넣게 되었다.



반면 청국측은 영고탑에서 가장 가까운 수분하유역(綏芬河流域)을 상실하고 혼춘(琿春)가까이 국경이 설정됨으로써 동해안의 포셋트만을 상실케 되고, 길림성은 내륙의 성이 됨으로써 이 지역교통에 일대변혁을 초래하였다.



흥개호계약에서 약정된 국경은 기실 하천국경에서와 같이 명확한 자연물을 활용치 못하고 한계 불분명한 산령으로 국경을 정함으로써 좀더 구체적인 경계를 획정함에는 부득이 인위적인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수분하류역(綏芬河流域)이나 혼춘(琿春)방면의 교통로를 제외하고는 양 지배권의 접촉이 극히 제한되어 대부분의 산악지는 미개척지로서 양측의 중간지대로 남게 되어 관념상의 국경으로 이의가 없는 상황이었다.



예컨데 지도 선상에 적선으로 명시는 하였으나 당해 지역에 시설물은 필요치 않았다. 흥개호조약 체결 당사자인 양측 위원들도 될 수 있는 한 국경선의 요지와 양국민의 접촉지점에 한해 계표를 세워 부근의 양국 군관민들로 하여금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그치려 하였다.



그리하여 흥개호회의에서 합의한 우수리강 합류점에서 두만강구에 이르는 교계도에는 경계선을 명시하고 향방을 정해 지명 대신에 러시아자 자모인 E~Y의 16자를 기입하기로 하여, 흑룡강과 우수리강의 합류점에는 E(耶), 쑹가챠 하류출구는 1(亦), 백릉하구(白稜河口)는 K(喀), 백능하원(白稜河源)은 Л(拉), 횡산회처(橫山會處)는 H(那), 수분하호(綏芬河瑚)와 포도하(布圖河) 합류점은 O(倭), 호포도하원(瑚怖圖河源)은 П(帕), 두만강상류 20리 지점에는 T(土)字의 계표를 세우기로 하였다.



계표는 목패로 청측 면에는 상단에 O자패를 쓰고, 하단에 계표의 의의, 주거교통의 자유를 보증하는 28자의 한자로 된 내객문을 지편에 옮겨 유액을 발라 부패함을 방지하도록 하였다. 러시아측 면에는 상부에 쌍두의 취(鷲) 소인(燒印)을 찍은 다음, 청측의 패문과 같은 내용의 지편을 첩부하였다



이 같은 계표는 양국위원의 입회 아래 현지에 세워지게 되었는데, 계표 작업에서도 러시아측이 주도권을 잡고 입비하여 회의지에서 제일 가까운 곳을 K(喀), 그 다음 지역에 Л(拉)자패를 세웠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E(耶), Ӏ(亦)는 위임을 받은 지방관들이 세웠고 남쪽으로는 H(那), O(倭), П(帕), T(土)패는 청국측의 효기교(驍騎校) 영안(永安)이, 러시아 측은 돌핀이 주도하여 순차로 세워 나갔다.



이러한 계비작업은 약 3개월에 걸쳐 끝났는데 끝자리의 T(土)자비가 두만강 대안 혼춘(琿春)지역에 세워짐으로써 우리나라의 녹둔도는 전술한 바와 같이 어이없게도 러령으로 귀속되고 말았다.



계표설립에 따른 현장은 예외 없이 청국 영내에 세워졌으며, 또한 하천국경상의 계표는 엄밀한 의미에서 국경선을 문자 그대로 긋는 것이 아니라 하천의 부근이 국경계라는 설명에 지나지 않음에도 러시아 측의 지나친 경계선의 강조가 노정되었으며, 나(那)ㆍ토(土)의 계표위치만 하더라도 조문상에서와 현지에서의 위치가 다르다는 이견을 제시하였음에도 그대로 계표를 세워, 국경획정에 따른 분쟁의 여지를 남기고 말았다.



더욱이 목비의 계표가 풍우로 부후(腐朽)하여 표지가 불명해짐에 광서(光緖) 2년(1876) 9월 청ㆍ러 양국간에 공동조사가 이루어졌고, 조사결과 온전한 것은 하나도 없어 이듬해인 광서 3년 6월에서 8월말 사이에 목비 8개를 다시 세우기로 하였다.



이 8개의 목비가 세워진 곳은 오소리강안(烏蘇里江岸), 동부육지국경인 북단의 백능하부근(白稜河附近) 그리고 러ㆍ청교통의 요충지인 수분하유역(綏芬河流域)에 각 2개의 계표를 세웠고, 동부국경의 끝머리인 우리나라 두만강연안에는 단 한 개의 목비를 세웠다.

계표의 수가 2개 처인 지역은 양국간에 이해관계가 그만큼 깊은 곳이라 여겨진다.



계표로 국경을 명시하였다고는 하나 아직도 불명확한 국경지역은 비일비재하였으며, 특히 동부국경지대는 불법월경이 다반사였다.



이즈음에 두만강을 건너오는 러시아인이 우리나라 국경지역에 빈번하게 나타났다. 국경지역의 불법월경이 빈번하게 되자 피해를 입게 된 청측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오대징(吳大徵)을 길림변무독변(吉林邊務督辯)으로 임명하고 동부국경지역에 따른 문제를 처리케 하였다.



이에 오대징은 광서 12년 4월 22일 러시아 측 대표 파라노흐와 러령의 노우기에흐스크(岩杵河)에서 동부국경을 재감키 위한 회합을 개최키로 하였다.



이때에 우리나라 고종 임금은 녹둔도가 우리나라 영토이었는데 잘못 노령으로 속하게 되었으니, 차제에 환원하여 주도록 오대징에게 요청하였다.



이 재감회의(再勘會議)에서 청 함풍(咸豊) 11년(1861)에 설립된 조자비와 토자비의 위치를 논의하였음을 상기할 때, 좀더 우리나라에서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대처하였더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청의 오대징은 우리나라의 요청은 무시하고 회감에 임함으로써 녹둔도의 반환요청은 묵살되고 말았다.

만일 이 당시 우리나라가 청ㆍ러 양측에 좀더 적극적이고 다각적인 교섭을 벌였더라면, 절호의 국경재감회합에서 녹둔도의 환속이 이루어졌을지도 몰랐다는 아쉬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4. 녹둔도 상실 후의 한.러 관계




1860년대는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동양국제사회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기이었다.



서구의 초강대국이었던 영ㆍ불 양대국이 청제국의 천진과 북경을 차례로 함락시킨 다음 열하로까지 피신하는 소란을 벌이면서 끝내 북경조약과 천진조약을 체결하고 막대한 손해배상금과 기독교 포교의 자유, 남북 각지의 항구를 개방시켜 엄청난 권익을 획득케 함으로써 이제까지의 중원 천지에 천자로 군림하던 청이, 영향권 하에 있던 여러 나라의 역사관 가치관의 뒤흔들어 놓았다.



이 중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에는 당시 북경을 방문했던 우리나라 동지사가 이듬해 정월에 돌아와 전후사실을 조정에 보고함으로써 조야가 발칵 뒤집혔다.

이 당시의 상황을 달레는 다음과 같이 조선천주교회사에 기록하고 있다.




수 만리 밖에서 침공해 온 영불 연합군에게 쫓기어 중원 대국의 천자가 북경을 버리고 열하로 갔다면 양제의 군대는 반드시 뒤따라 추격할 것이 아닌가.



그같이 되면 천자는 십중팔구 압록강을 건너서 조선 땅으로 피난을 오게 될 것이요, 따라서 우리나라는 의리상 천자를 서울로 보실 수밖에 없을 것이니 이러할 경우 영ㆍ불 양국군대는 서울까지 추격해 올지 모르니 큰 난리가 날 것 같아, 이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이리하여 서울 장안에 어느덧 피난 소동이 벌어지고 양반 부유층이 피난봇짐을 싸가지고 사대문이 메어지도록 빠져나가는가 하면 시민들도 우왕좌왕 살길을 찾기에 바빴다고 하였다.



반면 일부 천주교신도들은 자신들은 난리가 나도 안전할 것이라 생각하였으며, 위장 급조된 열성신도가 급격히 늘어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금기로 되어 있던 성서와 찬송가, 소형의 십자가를 목에 걸고 활보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조는 전통사회에 사상적인 마찰과 윤리 도덕상의 모순을 빚어내면서, 또 한편으로는 낯선 이양선의 접근이 백성들을 불안케 한 데다 우연의 일치로 우리나라 연해에 외국선박들의 출몰로 흑사병, 호열자 등 괴질이 번져 사회적 불안을 가중하게 하고 세도가의 학정은 줄어들지 않고 백성들의 생활은 암담해지면서 국내도처에서 잇달아 일어나게 되니조정에서의 변경대책이 올바로 세워질 리가 없었다.



이러한 국내사정과는 달리 국제정세는 애혼(愛琿)조약 체결이래 러시아의 우수리강을 중심한 동해연안 진출로 군사기지 확보에 주안을 두고, 두만강 가까이에 있는 Posiet를 병영화하기에 이르렀다.



즉 러ㆍ청 공동관리지역으로 있던 이 지대를 러시아는 청의 동의여부와는 관계없이 임의로 이 지역에 진출하여 다각적인 활약을 펴 오고 있었다.



1853년 Posietdp 기지를 둔 러군은 이듬해인 1854년(철종 5년) 음력 4월 27일 우리나라 덕원군의 용성진(龍城津)과 영흥부(永興府) 대강진(大江津)에 나타나 포민(浦民)을 살상할 정도로 이미 잔악성을 드러냈으며,



철종 7년(1856)에는 시베리아 총독 Muraviev가 해군중장 Putiatin의 휘하에 속하는 Pollada호 함장 Unkovski와 Vostok호의 Korsakov 함장으로 하여금 우리나라 두만강 연안을 측수하고 다시 남하하여 영흥만(Broughon bay)에 내도하여서는 lazareff port라고 명명하였다.



이렇듯 무모하게 러시아는 우리나라 동해안을 측량하고 앞으로의 진출을 위해 종횡무진 사전 답사를 한 것이다.

이처럼 황급히 동해안에 러시아人이 출몰하게 된 것은 우라디보스독에 군항을 마련하기는 했으나 연중 7, 8개월이 동빙상태(凍氷狀態)라 작전에 불편을 느끼게 되자 한시바삐 부동항을 찾고자한 것이 주 요인이였던 듯하다.



이러한 러시아인들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전술한 Pollada호의 난폭한 우리나라 양민의 살상으로 조정에서는 러시아와 국교이전의 일이어서인지 해당 지역의 관리인 덕원부사 오택선과 영흥부사 임백수를 문책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북경조약의 조인으로 인한 청ㆍ러간의 국경이 설정된 사실조차 몰랐고 더욱이 녹둔도의 노령화는 알 턱이 없었다.

철종 12년(1861) 7월에 흥개호계약에 따른 두만강상류 20리 지점에 土(T)자비가 세워지고 우리나라 최북단의 함경북도 경흥군 무이진 소관하의 망덕산 봉수대를 지키던 병사의 보고가 있음으로써 비로소 국경변경에 관한 사실을 중앙에서 알게 되었다.



철종기사에 의하면, 봉수대에서 두만강 건너편에 기마를 탄 호인들이 나타나 천막을 치고 수명의 장정들이 드나드는 모습이 보였는데, 그곳 경흥부사가 그들과 대화를 하고자 함에 의사가 통하지 않아 필답으로 문답을 한즉, 그들은 혼춘(琿春)에서 온 아라사인과 청인으로 국경분계를 표하기 위해 강변에 계비를 세우고자 한다고 하며, 문서를 보여 줌에 이를 부사는 필사하여 중앙에 보고하였다고 한다.



이같이 정경하에 계비작업이 이루어졌고, 따라서 한ㆍ러국경선은 한국측이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획정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나라 두만강변계의 백성들은 전과 다름없이 자유로이 강을 왕래하면서 경작을 하여 왔다. 두만강 하류는 오랜 옛날부터 국경하천이라는 의식 없이 단지 한 사회 내지 한 군현의 관할내로 흐르는 내하로밖에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러시아측의 계비설립 후 국경관리에 따른 조치가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측에서는 이전과 다른 조치는 취하지도 못하였고 또한 변방의 주민들도 국경선을 넘나든다는 의식을 가질 수가 없었다. 러시아측도 그들대로 경작할 일손을 아쉬워하는 터이라 한인들의 내주에 특별한 시비를 하지 않았다.



당시 국내실정은 삼정의 문란과 처처에서의 민란, 그리고 잇단 흉년으로 말미암아 집단이주민들이 적지 않게 생겼는데 연해주지역으로 이주하는 이도 해마다 늘어갔다.



크라베 조사에 의하면 우라디보스독 및 우수리등지에 춘경추귀하던 한인들이 1863년 Posiet지역에 13호가 이주하기 시작하여 1865년에는 60가구 380인이, 1869년에는 766가구, 1884년에 1764호에 5447인이 대거 이주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렇듯 늘어나는 이주현상은 비록 영토의 분계는 되었다 하나 경작지는 예나 지금이나 정든 토지이고 국경의식은 별로 없던 데다, 러시아인들은 한인농민들을 환영하는 실정이었기에 이주 희망자는 늘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녹둔도 역시 국적이나 영토의 귀속문제이전의 상태에서 우리의 선조들은 그대로 거주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정황하에서 러시아는 끈질기게 한국과의 통상을 요구하며 문호개방을 위해 온갖 수단을 다 펴 나갔다.



그러나 이미 이 당시의 한국은 국제열강들의 각축장화 함으로써,러시아의 녹둔도 점령은 일본의 대륙진출 야욕과 맞부딪쳤으며 영국은 우리나라 남해의 거문도를 점령함으로써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응하고 나섰다.



특히 일본은 러시아가 녹둔도를 점령한 데 대한 진위를 탐색하고자 무려 4연간이나 줄기찬 첩보활동을 펴 왔으며 영국 또한 민감한 반응을 늦추지 않았다.







5. 결 어




두만강하구의 일개 소도서인 녹둔도가 국제적인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바로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적 야욕의 발로이었던 것이다.



한말에 기울어 가는 국운 속에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적절히 대응치 못함에 따라 조상전래의 귀중한 영토를 상실함으로써, 유사이래 일대변혁이라 할 수 있는 국경상의 삼각관계를 초래하고 말았다. 비록 지리상으로 불과 16.5km밖에 되지 않는 접경이나 800여km에 달하는 전래적인 중국과의 국경과는 매우 다른 역사적 사건이 이 국경선을 통해 발생하였고 또한 앞으로도 예측키 어려운 사건들이 이 지역을 통해 일어날 불길한 전망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녹둔도를 상실한 지 120년이 되었지만, 이 땅은 역사적 측면에서나 지리적 측면에서나 국제법상으로도 분명한 우리의 영토인 것이다.



비록 지금 당장 실효적인 조치를 취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결코 도외시할 것이 아니라, 언젠가 통일된 대한민국에서의 반드시 제기될 국경영토문제임을 감안할 때, 한ㆍ러 국경선상의 녹둔도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하는 요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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