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15일, 100년 전 시간을 거슬러 들어갔다. 간도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언젠가는 간도 지역을 여행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윤동주의 ‘서시’를 읊조리며 스스로를 연민하고 위로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흩어진 우리 민족의 설움을 느껴 보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마침 윤동주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기리기 위해 ‘시산맥’에서 간도 여행을 기획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열일을 제쳐놓고 나는 간도 여행에 합류했다.


인천공항에서 연길공항까지 비행기로 1시간 25분 정도 소요 되었다. 짧은 거리 간도,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던 곳, 우리 민족의 유랑지, 윤동주 시인과 그의 고종 사촌 송몽규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곳, 이름도 남기지 못한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열정과 희망이 켜켜이 쌓여있는 곳, 같은 민족이면서도 아직까지 우리 민족에 흡수되지 못한 우리 민족이 사는 곳. 비행기가 연길에 가까워질수록 그 어느 여행보다 마음이 설레었다.


연길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일행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후덥지근한 여름 날씨였다. 연일 30도를 훌쩍 넘는 요즘 우리나라의 날씨와 다를 바 없었다. 우리나라와 다를 것이라고 예상했던 생각은 어디부터 기인된 것일까. 내 의식 밑바닥에 그곳이 이국이란 생각이 도사리고 있었다니. 그곳은 이국이 아니라 1960~70년대 우리의 고향 같았다. 연길 시내를 지나칠 때 ‘순이 냉면’이 증명해 주었다. 거리를 장식한 간판엔 한글과 한자가 공존하고 있었지만 그곳에 살던 순이도 동생을 등에 업고 엄마를 기다렸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윤동주 시비가 있는 대성중학교를 거쳐 윤동주 생가에 도착한 것은 오후였다.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긴 했지만 명동촌은 고향 같은 정감으로 다가왔다. 단정하게 자리 잡은 기와집과 뒤란에 있던 살구나무가 노랗게 우리 일행을 반겨주었다. 사각형의 우물이 있었다. 새로 단장한 것 같았다. 옛 우물을 잘 보존해 주었다면 하는 내 바람은 그 지역의 실정을 모르는 탓일까. 윤동주의 시 ‘자화상’이 떠올랐다. 우물 속을 들여다보며 밝은 달과 흘러가는 구름을 물끄러미 들여다본 시인은 자신을 반성하고 미워하다 돌아서고 다시 돌아서며 부끄러워졌다고 노래했다. 우물에 내 얼굴을 비추어 본다. ‘서시’를 알게 된 후부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가겠노라고 읊조렸던 날들, 돌아보니 나도 내가 밉고 부끄럽다.


생가 옆에는 명동교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윤동주의 할아버지이며 송몽규의 외할아버지가 이 교회의 장로였던 명동교회는 허름했다. 낡은 마룻바닥 구석엔 이곳을 찾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는 듯 소복이 먼지가 쌓여있었다. 정면을 장식한 제단 위에 두 개의 십자가가 선명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탁자를 장식한 것은 흰 십자가였고 제단 뒤 벽을 장식한 것은 붉은 십자가였다. 기독교인이 아닌 내게도 십자가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제대로 살라는 진리를 던지는 것 같았다. 윤동주의 작품 ‘십자가’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써졌을 것이다.


교회 내부 오른쪽에는 칸막이가 몇 개 세워져 있었다. 그곳에는 간도에서 활약했던 독립운동가와 윤동주 시인 및 친지들의 사진과 연보를 게재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을 위해 그곳의 안내를 맡아주었던 마을이장은 송몽규와 먼 친척이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한 장 한 장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사진을 설명해 주시던 그 분의 말 속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후손의 자부심이 면면히 드러났다.


시인의 고향을 떠나 일행이 도착한 곳은 윤동주의 묘지였다. 용정시 동쪽 합성리 마을 뒤 동산의 교회 공동묘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윤동주 시인은 그곳에 누워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이 등골을 타고 내려가는 동시에 허술하게 묘지를 관리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봉분에 잔디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와 동행했던 연변 시인한테 연유를 물어보았다. 그것은 가토를 한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가토란 겨울을 난 묘에 쥐구멍이나 뱀 구멍 같은 것이 생기기 때문에 그것을 메우는 작업이라고 하였다. 즉 묘지가 훼손 된 것을 보수하기 위해 청명 때 묘에 흙을 올리는 풍습이다. 지역의 풍습이나 문화를 섣부르게 내 잣대로 함부로 재단하는 것은 역시 금물이다. 묘지 관리를 용정 대성중학교에서 맡아 하고 있다고 그 분이 말해 주었다.


윤동주의 묘지가 있는 야트막한 산비탈을 오르자 광활한 들녘에 청록색의 옥수수 줄기가 가득 펼쳐져 있었다. 이 땅을 지켜내야 한다는 우리 조상들의 굳은 다짐 같이 우뚝 서 있었다. 우리 조상들이 살길을 찾아 유랑했던 간도. 이 땅을 지켜내기 위해 목숨 걸었던 정기가 저렇게 짙은 푸름으로 남아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후손인 나는 지금 어떤 신념과 어떤 욕망에 빠져 살아가는지 자꾸 뒤를 돌아보게 하였다.  쓸쓸한 하늘가에 검은 구름이 얼룩져 있었다, 울컥 시큼한 슬픔이 올라왔다. 한 시인이 맑고 순수한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간도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땅이었으면서도 우리 땅이라고 내세우지 못하는 그 곳 간도.


조숙향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