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영토 답사기

 

제목 : 력상의 현장을 찾아서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6-05-16 조회수 : 485

 

                   온성 대교 ,사이섬 ,그리고 륙지


                                  1.《온성대교》



온성대교는 도문시 량수진소재지마을에서 동남쪽으로 4-5리쯤 떨어진 곳에 있다.소재지마을앞에서 온성대교로 통하는 제방뚝이 뻗어있는데 제방뚝을 따라 내려가노라면 진초록빛이 질펀하게 내려앉은 들녘을 만난다.


도문시에서 제일 넓은 평야는 두만강이 억겁의 세월을 흐르면서 개석해놓은 총적지로서 곡창지대이다.초가을 곡식이 익는 매틀한 내음이 코를 야싸하게 자극했다.바야흐로 이우는 여름이지만 한낮은 백야의 계절처럼 무더위가 맹위친다.
초가을 전야를 바라보노라면 꽹과리 울리고 북소리 요란한 전야제라도 한바탕 치르고 텁텁한 막걸리에 대취하고 싶어진다.

두만강좌안에는 낚시군들로 활황이다.여위고 초라하던 두만강은 여름장마덕에 수역을 욕심스레 챙기고 레저를 즐기는 사람들을 반기고있었다.
완상의 다리ㅡ온성대교,반세기전 굉장한 폭음속에서 허리를 질린채 변도력사의 슬픈 현장을조용히 지키고있었다.

소화 7년(1932년)일본본토의 비밀지령으로 《남만주식회사지질조사소》에서 《두만강도폭지질설명서》를 만든후 군부차원에서 조선과 중국대륙을 련결하는 철도,순환망을 기획하고 중ㅡ일간에 《국제로다리협정》을 조인한후 두만강 상류로부터 하류에 이르는 칠백리구간에 무려 십여개나 되는 다리를 부설하기 시작하였다.


온성대교는 그중의 하나로서 조선총독부교통국의 감독밑에 소화11년(1936년,강덕 3년)봄 두만강상류 250킬로메터구간,조선온성과 만주국 간도성 왕청춘방구량수 천자7구(현재 도문시 량수진)사이에 건설되였는데 이듬해에 사용에 교부되였다.때를 같이 하여 세관이 섰는데 검은 토기와를 얹은 목조가옥 지붕우에는 만주국국기와 일본국기가 나란히 펄럭거렸다.

강이 얼어붙는 한겨울에는 사람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다가도 그것도 팔팔한 젊은 놈이 아니라 사철 코물을 질척거리는 늙은이가 덤덤히 앉아 몇글자씩 끄적거려 객보(세관통과절차)흉내를 냈다.만주국과 조선의 천연국계-두만강.일본사람들에게는 국계의 강이 아니라 지도에서 수없이 반복하는 등고선과 같은 존재로서 그저 하천이라는 자연물에 그쳤을뿐이였다.

하기에 여기에는 숱한 아이러니가 생겨 지금까지 전해지고있다.로인들과 아낙네들이 제일큰곤욕을 치렀다고 한다.다리를 건느려면 교두또치까에서 일군경비병을 만나는데 《나는 일본황국신민이다》라는 말을 일어로 번져야 했다.하지만 혀가 굳은 로인들에게는 삼빡한 왜말이 《좔좔》할리가 만무했다.왜말수습을 못한 수염이 허연 로인들은 새파랗게 젊은 일본군들에게 숱한 따귀를 맞았단다.아낙네들은 일본식《몸빼》(일본식바지일종)를 입어야만 도강이 가능했는데 판을 모르고 한복을 입으면 치마는 물론 속치마까지 찢겨야 하는 수모를 치르기도 했다.일본사람들이 노화교육과 세뇌작업에는 섬뜩할 지경으로 놀랄일이다.

온성다리에서 2리쯤 아래로 내려오면 광서12년(1886년)에 오대징이 남긴 《룡호석각》이있는데 이 시기부터 량수천자일대는 번창해지기 시작했고 변도곡창지로 소문났다.만주국황제의 어곡전이 있었다는 일설도 있다.더욱이 목재와 석탄이 흔천했는데 소화7년에 만든 간도지역 지질구조와 두만강류역의 지질구조도포에 의하면 조선온성과 량수천자일대를 중심으로 방원 몇백평에 모두 석탄층이 매장되여있다고 했다.제3기갈탄이여서 연기가 많고 탄화가 잘되지 않아 공업용으로는 마땅치가 않지만 그대신 갈탄속에서 석유를 정제해낼수 있어 일본사람들이 욕심을 낸것이다.온성대교를 거쳐 건너간 석탄,목재,량식이 얼마인지 누구도 모른다.

온성대교의 교각은 딴딴한 암석우에 선 것이 아니라 석탄층에 섰는데 세계교량사화에서도 류례를 찾아볼수 없을것이다. 교각우에는 드러누운 거대한 강철공형보와 로면의 콩크리트는 모두 교각을 통해 침정밑바닥에 압력이 전해지는데 침정기초견고여부는 다리의 전반수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것이다.
두만강우에 건설한 모든 다리에 일설이 있듯이 온성대교에도 일설이 있는데 말하자면 다리침정작업을 할 때 악독한 십장을 세멘몰탈과 함께 다져넣었다는것이다.말하자면 미이라설이다.민간에서는 몇번째 교각이라고 믿고있는 사람들이 많다.

온성은 조선조 4대 세종22년에 녀진들이 붙인 《다온평》으로부터 온성이라고 다시 이름짓고 고종3년에 군이 되여 경흥,경성 등과 함께 변도 6진의 하나로 이름났다.함경선에서 최북단에 자리잡아 군사요충지로 충당되였다.이런 의미로 해석하면 량수천자일대도 지리적가치가 자못 높은것이다.

1945년 8월12일 이른아침 온성대교가 두토막으로 허리가 뭉청 끊겨 사명을 마쳤다.승승장구로 진격하는 구쏘련홍군들의 진격로를 저지할셈으로 대교를 폭파한것이다.80여세되는 로인들은 지금도 그날 아침의 폭음을 기억하고있는데 폭파소리가 어찌도 굉장했던지 량수일대는 물론 십여리 떨어진 재너머마을에서도 충격파에 창호지가 갈기갈기 찢어졌고 시렁에 얹어놓은 사발들이 봉당에 굴러떨어졌다고 한다.온성대교는 8년이라는 짧은 수명을 마쳤다.역시 교량사화에서 찾아볼수가 없는 일이다.




                                                                           2.《사이섬》




온성대교에서 두만강(실로 중국의 내륙하 청계하)을 거슬러 1.5리쯤 올라오면 사이섬을 만난다.지도에서는 온성도라고 밝혔지만 량수사람들은 《샛섬》이라 통칭한다.새가 많아서 《샛섬》이라는 일설도 있지만 따지고보면 사이섬의 준말이다.온성대교,사이섬일대는 두만강이 억겁의 세월을 흐르면서 개석한 분지외에도 무려 16개나 되는 사이섬을 만들어놓았는데 처음 관광오는 사람들은 국계를 몰라 갈팡질팡한다.왜냐 하면 사이섬으로 돌아오면 국계가 두만강이 아니라 중국의 내륙하 청계하가 국계가 되기때문이다.

두만강지류인 청계하는 량수서쪽면을 감돌아 흐르면서 두만강에 합류한다.가물면 종적을 감추는 보잘것없는 하천이지만 한여름 장마때에는 제법 기세가 있고 송어,황어 같은 큰 고기들이 거슬러올라와 풀떡거린다.두만강은 7백리를 흐르면서 가야하.홍기하.사만강...등 수많은 지류를 받아들이지만 청계하만큼 장난이 심한 하천은 없다.

사이섬은 청계하가 두만강과 합수목을 바꾸면서 만들어놓은 걸작이다.사이섬은 큰 촌락을 하나 앉혀도 남을만큼 넓은 땅을 가졌다.
원래 청계하는 사이섬 웃목에서 두만강과 합류할 때는 사이섬이 없었지만 두만강이 저 혼자웃목에서 물곬을 남쪽으로 바꾸면서 청계하만 달랑 남겨놓아 사이섬이 생겼다.두만강은 장난이 무척 심한 강으로 물곬을 자주 바꾸면서 이런 《사이섬》을 수없이 만들어놓았는데 자연의 장난과 희로은 인세에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희비극을 출연시켰다.

여기서 백리도 채 못가 위치한 사이섬ㅡ간도는 중국광제욕(현재 월청진 선구촌)과 조선 종성사이에 난 자그마한 섬이였지만 한일합방후 대륙땅을 념념히 노리던 일본사람들이 《대륙정책》에 리용되여 이미지가 엉뚱하게 바뀌면서 력사에 이름을 남긴 간도(사이섬)라는 낱말이 생겨난것이다.
필자의 할머니는 사이섬에서 오래 살았고 아버지는 사이섬태생이다.그러고보면 이 사이섬이생성된지가 백년이 못된다.현재 량수진의 김현빈씨가 꾸린 휴원지자리에 세멘트와 돌로 만든 선착장자리가 있었고 강삭배고정고리가 만들어졌있었다.세멘트의 출현으로 보아 1920년대일것으로 추정한다.


                                                      3.《륙지》


청계하는 여기서 변계의 강이 아니라 내륙하로 바꾼다.바꾸는 자리는 두만강의 원 몰곩자리다.현재는 자그마한 홈채기로 남았는데 변계표시로 백양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었다.이제부터는 나무가 변계가 된다.봄이나 여름,가을에는 두나라 농사군들이 밭머리에서 어쩔수없이 만나는데 《곡식자람새가 좋습니다》《올해 날씨가 잘해준 덕으로 풍년이 들 것 같쑤다》라는 인사말을 주고 받는데 비법이라 할 수 있지만 인간들이 어찌 소 닭 보 듯 모르는 체 할 수 있으랴.

홈채기가 남쪽으로 나가다가 없어지는데 그대신 여기에는 자그마한 둔덕이 변계를 대신한다.말하자면 둔덕남쪽이 조선땅이고 뒤쪽이 중국땅인 것이다.여기의 밭들은 모두 평행으로 뻗었는데 내막을 모르면 경계를 구분 못한다.하기에 낚시군들은 때론 구역을 잘못 짚고 들어가는데 건너편에서 손짓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신호를 보낸다.이국 땅으로 낚시하러 가는 셈이다.


다리로부터 사이섬 그리고 륙지까지는 불과 2,3리 거리다. 이런 기묘한 자연우세때문인지 사철 관광객이 끊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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