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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노론 집안 연암 박지원은 ‘당론’ 풍자 첨부파일 : 다운로드[1]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0-10-08 조회수 : 1223

 

 

 
우리 편은 “공론(公論)”, 남의 편은 “당론”당쟁에 생사 걸려 양보 못해
 
노론 집안 연암 박지원은 ‘당론’ 풍자… 성호 이익은 ‘타협의 상생’ 묘책 제시

연암 박지원(1737~1805)과 성호 이익(1681~ 1763)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개혁사상가다. 연암은 노론 출신이고, 성호는 남인 출신이다.

그들의 개혁사상 중 상당부분은 그 시대의 당론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젊었을 때 연암은 노론 골수파로 그 누구 못지않게 당론을 추종했다. 그는 선천적인 노론 골수파이자 당론 추종자였다.

이른바 선조(宣祖)의 ‘유교7신(遺敎七臣)’ 중 한 명인 박동량이 그의 6대 조상이었다. 유교7신이란 선조가 승하하면서 비밀 유언으로 영창대군을 부탁했다고 하는 7명의 서인 중진이다.

유교7신은 광해군이 즉위한 후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과정에서 숙청당하였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서인들이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축출한 사건이 이른바 인조반정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박동량의 후손들은 서인의 골수였다. 그것도 왕실과 밀착된 서인의 핵심이었다. 박동량의 큰아들 박미는 선조의 딸 정안옹주와 혼인한 부마였다. 박미의 5대 후손이 되는 연암은 넓게 보면 선조의 외손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돈녕보첩>이라고 하는 왕실 족보에도 이름이 올라 있다.

인조반정 이후 중앙정계를 장악한 서인은 주도권을 놓고 분열했다. 표면적 계기는 송시열과 그의 제자 윤증의 갈등이었다. 윤증이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을 스승 송시열에게 부탁했는데, 송시열이 성의 없이 썼을 뿐 아니라 은근히 비난까지 했다.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전투에서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은 대의명분에 어긋난다고 질책했던 것이다.

현실보다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송시열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과 현실을 무시한 채 대의명분만 내세우는 송시열에게 윤증은 불만을 토로했고, 이를 계기로 둘 사이는 점차 멀어졌다. 송시열은 충청도 회덕에 살았고, 윤증은 이산에 살았기에 둘 사이의 갈등을 ‘회니시비(懷尼是非)’라고 하였다.

이 회니시비에서 송시열을 두둔한 사람들이 노론(老論)이었고, 윤증을 옹호한 사람들이 소론(少論)이었다. ‘늙은 사람들의 논의’라는 말 그대로 노론에는 서인 중의 원로급이 많았던 반면 ‘젊은 사람들의 논의’라는 말처럼 소론에는 소장파가 많았다. 그때 서인의 골수였던 박동량의 후손들은 당연히 노론이었다.

‘회니시비’ 단계에서 노론은 윤증을 스승의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이에 비해 소론은 송시열을 불가능한 명분을 강요하는 위선자라고 맞받았다. 당시 노론과 소론 사이에는 다분히 감정적 비난이 난무했지만, 서로 간에 살육은 없었다. 하지만 경종대에 이르러서는 살육을 주고받기에 이른다.

노론은 경종에게 불치의 병이 있다는 이유로 연잉군을 세제(世弟)에 책봉하고 대리청정까지 밀어붙였다. 이 같은 노론의 행위를 소론은 역모로 단정했다. 경종대에 노론과 소론의 충돌은 이른바 임인옥(壬寅獄)이라고 하는 참극을 유발했다. 임인년인 경종 2년(1722) 소론이 노론 170여 명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거나 귀양보낸 사건이 임인옥이다.

하지만 노론의 도움을 받은 연잉군, 즉 영조가 즉위하자 상황은 역전되었다. 노론은 임인옥을 조작된 옥사라고 주장하며 소론에 가혹한 정치보복을 가했다. 노론은 소론을 배신자들의 집단이자 정치조작집단으로 매도했다. 소론은 노론을 위선자들의 집단이자 역적의 집단으로 비난했다.

‘당론(黨論)’이란 당파의 논의라는 뜻이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이른바 4색당파 가운데 북인이 몰락하고 노론·소론·남인의 3개 당파가 주류였다. 노론·소론·남인은 숙중과 경종 대에 격심한 당쟁을 겪으면서 서로 간에 살육을 주고받았다. 각 당파는 자신들의 논의를 정론(正論)으로 미화하면서 상대 당파의 논의를 사론(邪論)으로 매도했다.

노론의 경우 무조건 송시열을 미화한 반면 소론은 무조건 윤증을 옹호했다. 노론의 후손들은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온 당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만약 노론의 후손이 송시열을 비난하거나 윤증을 옹호하면 그것은 당론을 어기는 일일 뿐 아니라 조상을 욕보이는 일이기도 했다.

당파에서뿐만 아니라 가문에서도 쫓겨날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감히 당론에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연암 가문은 탕평정책에도 반대하던 강경 노론이었다. 배신자들의 집단이자 정치조작집단인 소론 출신은 아무리 사람됨과 재능이 뛰어나도 어울릴 상대가 아니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연암이 존경해 마지않던 친할아버지 박필균은 소론 공격에 앞장서서 노론의 맹장이라고 불렸다. 연암은 31세 되던 해에 부친상을 당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가문의 전통 그대로 강경 노론이었다.

31세 이전에 연암 박지원은 송시열을 열렬히 추종했다. 송시열이 소리 높여 주창한 ‘친명배청’과 ‘복수설치’도 열렬히 찬성했다. 연암은 29세, 송시열과 관련된 <초구기(貂퐐記)>라는 글을 지었는데, 거기에 이런 시를 덧붙였다.

 

 
 


“우리의 선왕이신 효종 대왕에게(唯我先王)
또한 위로 임금님이 계셨으니(亦維有君)
위대한 명나라의 천자님이 바로(大明天子)
우리 효종대왕의 임금님이셨네(我君之君)
효종대왕에게 신하가 있었으니(先王有臣)
이름은 시열이요, 자는 영보라네(時熱英甫)
명나라의 천자님께 충성하기를(忠于天子)
자기 임금께 충성하듯 하셨다네(如忠其主)
효종대왕에게 원수가 있었으니(先王有仇)
만주 건주의 여진 오랑캐라네(維彼建州)
어찌 우리나라만의 원수이랴?(豈獨我私)
위대한 명나라에도 원수라네(大邦之讐)
효종대왕께서 복수설치하려고(王欲報之)
대로 송시열 선생과 도모하며(大老與謀)
힘쓸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는(王曰懋哉)
초구를 하사한다고 말씀하셨네(賜汝貂퐐)
(중략)
우리는 위대한 명나라의 유민이요(明之遺民)
효종대왕께서는 성인이시라네(先王聖人)”
(박지원, <연암집> 권3, 공작관문고, 초구기)

위에 나오는 ‘초구’란 효종이 “연경지역은 추위가 일찍 오지만, 이것으로 바람과 눈을 막을 수 있습니다”라며 송시열에게 주었다는 가죽옷이다. 초구에는 청나라를 북벌하려는 효종의 강렬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효종의 북벌 추진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사람이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이 주창한 친명배청론과 복수설치론이 북벌론의 핵심이었다.

<초구기>에서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노론 일반의 당론이 잘 드러난다. 현실성 없는 친명배청과 복수설치를 명분으로 북벌을 주장하고, 그 북벌을 명분으로 권력 장악을 정당화하는 노론의 당론과 전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초구기>를 지을 때만 해도 연암은 북벌론으로 대표되는 노론의 당론을 충실히 추종했다.

하지만 연암은 부친의 3년상을 치른 이후부터 노론 당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사실은 벗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북벌론의 허구성과 비현실성을 신랄하게 폭로했다. 연암은 북벌론 대신 북학론을 들고 나왔다. 정조 4년(1780) 44세의 나이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저술한 <열하일기> ‘허생전’에서 연암은 북벌의 비책을 듣고자 찾아온 이완 대장에게 이렇게 대꾸하도록 했다.

“(전략) 허생은 ‘무릇 대의를 온 천하에 외치고자 하면서 천하의 호걸을 먼저 사귀지 않고는 성공한 적이 없었다. 남의 나라를 치고자 하면서 간첩을 쓰지 않고 성공한 적도 없었다. 만주의 여진족이 갑자기 천하의 주인이 되어 아직은 중국과 친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던 판에 조선이 다른 나라보다 솔선해 항복하였으니, 청나라에서는 우리나라를 믿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이렇게 청하라. ‘우리 자제들을 귀국에 보내어 학문도 배우고 벼슬도 하여 옛날 당나라와 원나라 시절처럼 해주고, 장사치들이 드나드는 것도 막지 말아 주시오.’ 그러면 저들은 분명 우리가 친절하게 해주는 것을 기뻐하여 허락할 것이다. 그러면 나라 안의 자제들을 가려 뽑아 머리를 깎고 되놈의 옷을 입혀 지식층은 가서 빈공과(賓貢科)에 응시하고 서민들은 멀리 강남에 가서 장사치로 스며들게 하라.

그들의 허실을 엿보고 그들의 호걸과 교제를 맺어야 천하의 일을 도모할 수 있고 나라의 부끄러움을 씻을 수 있다. 그 후 명나라 황제의 후손을 찾아 임금으로 세우거나,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천하의 제후들을 거느리고 한 사람을 하늘에 추천해 임금으로 세우면 된다. 그렇게 해서 잘되면 우리나라는 대국의 스승 노릇을 할 것이요, 못되어도 천자의 존경을 받는 나라는 무난하지 않겠는가?’ 하였다.”(박지원, <열하일기>, ‘옥갑야화(玉匣夜話)’, 허생전)

이완 대장은 송시열과 함께 효종대의 북벌을 상징하던 인물이었다. 송시열이 이론적으로 북벌을 뒷받침했다면, 이완 대장은 군사력으로 북벌을 뒷받침했다. 그 이완 대장이 북벌의 비책을 물으러 왔는데, 허생은 북벌과 정반대로 북학을 이야기했다. 당연히 이완 대장은 “요즘 사대부들은 모두 예법을 지키는 판이어서 누가 과감하게 머리를 깎고 되놈의 옷을 입겠습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허생은 목소리를 높여 “이놈, 소위 사대부란 도대체 어떤 놈들이냐? 오랑캐 땅에 태어나 제멋대로 사대부라고 뽐내니 어찌 앙큼하지 않은가”라고 일갈했다. 나아가 허생은 “너희는 대명(大明)을 위해 원수를 갚겠다고 하면서도 그까짓 상투 하나를 아낀다는 말이냐? 장차 말 달리기, 칼 쓰기, 창 찌르기, 활 당기기, 돌팔매질 등을 해야 하는데 그 넓은 옷소매를 고치지 않고 제 딴에 그것을 예법이라고 한다는 말이냐”라고 쏘아붙였다.

결국 허생은 “신임받는 신하가 겨우 이 정도란 말이냐”며 칼을 찾아 찌르려 하였고, 깜짝 놀란 이완 대장은 뒷 들창을 뛰어나와 달음박질쳐 도망쳤다가 이튿날 다시 와보니 허생은 벌써 집을 비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허생이 칼을 들어 찌르려던 이완 대장은 사실 북벌론의 허위의식과 비현실성이었다.

 

 
 

그 북벌론은 다름 아니라 송시열이 주창한 노론의 당론이었다. 송시열이 북벌을 주장했을 때는 병자호란의 참혹한 기억이 생생하던 때였다.

청나라를 오랑캐라며 무시하고 조선을 소중화의 나라로 미화하는 일이 비록 비현실적이기는 해도 그것으로써 상처 입은 민족의 자존심을 위로함으로써 긍정적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 논리가 100여 년이 넘도록 지속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청나라는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는데도 노론은 여전히 청나라를 오랑캐로 무시하고 조선을 소중화로 미화했다. 연암은 그 같은 노론의 허위의식과 비현실성을 칼로 찌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찌르려던 노론 당론은 사실상 연암 자신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 그는 노론의 당론을 묵수했다. 뿐이랴? 그의 가문은 대대로 노론의 당론을 묵수했다. 그 당론을 칼로 찌른다는 것은 결국 젊은 시절의 자신을, 엄연히 현존하는 자신의 가문을, 그리고 과거의 조상들과 송시열을 찌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연암이 위대한 개혁사상가로 알려진 이유는 바로 조상 대대로 묵수하던 당론을 칼로 찌르려 한 그 정신과 행동에 있다.

당시 대부분의 양반은 감히 조상으로부터 전해받은 당론을 칼로 찌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배신자라는 지탄을 받을까 두려웠고, 기득권을 잃을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노론 출신의 연암은 가문의 배경 면에서 누구보다 유리했다. 학문적 재능 또한 다른 사람보다 월등했다. 연암은 34세에 소과 시험에 응시하여 장원까지 했다.

영조가 그 사실을 알고 칭찬까지 했다. 대과 시험에 응시했다면 합격은 떼어 논 당상이었다. 연암은 노론 출신이었기에 충분히 대과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고, 또 노론 당론을 묵수했다면 정승·판서 역시 충분히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연암은 보장된 미래를 스스로 내던졌다. 부친의 3년상이 끝난 35세 이후 과거 시험을 포기했다.

그러고는 북학을 내세워 북벌의 허구성과 비현실성을 신랄하게 폭로했다. 왜 그랬을까? 남다른 현실감각과 비판의식을 지닌 연암은 젊었을 때부터 양반들의 허위의식과 위선을 예리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양반들의 허위의식과 위선 중에서도 뿌리가 되는 허위의식과 위선은 다름 아니라 북벌론으로 대표되는 노론 당론이었음을 깨달았다.

그 허위의식과 위선의 중심에 바로 젊은 날의 본인이 있었고 그의 가문과 송시열이 있었다. 연암은 20대부터 자신의 미래를 놓고 크게 고민했다. 눈에 보이는 허위의식과 위선을 무시하고 입신출세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허위의식과 위선을 깨기 위해 입신출세를 포기할 것인가? 입신출세를 택하기에는 그의 현실감각과 비판의식이 너무 강렬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포기하기에는 그의 기득권이 너무 컸다. 연암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황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로 괴로워했다. 그렇게 10여 년을 고민했다. 그 사이 할아버지 박필균과 아버지 박사유가 세상을 떠났다. 연암은 아버지의 3년상이 완전히 끝나던 35세가 되어서야 진로를 결정했다.

그는 입신출세를 포기하고 비판자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연암은 노골적인 비판자가 되지는 못했다. 그는 풍자와 야유를 통해 양반들의 허위의식과 위선을 폭로했다. 그 이상을 하기에 연암은 선천적으로 너무 많은 기득권을 타고났다. 그래서 연암은 마치 이완 대장을 칼로 찌르려던 허생이 결과적으로는 진짜 찌르지도 못하고 도리어 자기가 세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풍자와 야유로 양반들의 허위의식과 위선을 비판했을 뿐이었다.

현실적으로 볼 때 비판자로서 연암의 일생은 불우했다. 우선 지독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권력으로부터 탄압도 당했다. 노론 친구들은 배신자라고 욕을 해댔다. 여진 오랑캐에 물들었다는 중상모략도 뒤따랐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연암을 불행하게 만든 것은 상실감과 울분이었다. 그는 보장된 입신출세를 포기하고 비판자의 길을 선택했지만 현실을 별로 바꾸지 못했다.

 

 
 

풍자와 야유를 가지고 양반들의 허위의식과 위선을 아무리 찔러봐야 양반들의 의식이 금방 바뀌지도 않았다. 20년 가까이 비판자로 살던 연암은 50세 이후에 천거받아 벼슬길에 나갔다.

스스로 버렸던 입신출세를 늘그막에 다시 붙잡은 셈이었다. 관료로서 연암의 최고 벼슬은 군수가 최고였다. 현실적인 입신출세로 본다면 참혹한 실패였다. 그러나 연암은 비판자로 살던 30대와 40대의 20여 년간 진실을 만끽했다.

대부분의 양반들이 당론에 눈이 멀어 현실을 보지 못하였지만 그는 현실을 보고 깨달았다. 진실의 눈이 밝아진 몇몇 선각자들과 깊은 교유를 나누기도 했다. 진실을 깨닫고 함께 나눈다는 기쁨이 그나마 연암을 20여 년간이나 비판자로 살 수 있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결정적으로 연암은 비판자로서 양반전, 허생전, 호질, 열하일기 등 불후의 명작들을 남겨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그가 주창했던 북학론은 비록 당대에는 별로 빛을 보지 못했지만 근대 개화파에 의해 되살아났다.

그런 면에서 연암은 비록 현실적인 입신출세에서는 실패했지만 개혁사상가로서는 역사적인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성호 이익은 연암과 또 다른 측면에서 당론과 대결하여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노론 출신인 연암은 노론 당론에 내재된 허위의식과 위선에 맞섬으로써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연암에게는 당론 그 자체보다 당론에 내재한 허위의식과 위선이 본질적 문제였던 것이다. 반면 성호는 당론 그 자체를 본질적 문제로 삼아 따져봄으로써 불후의 논설을 남길 수 있었다. 남인 출신인 성호는 당쟁으로 크나큰 희생을 치른 사람이었다. 성호는 당쟁에 휩쓸린 아버지가 유배된 곳에서 태어났다.

성호가 태어난 다음해에 그의 아버지는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훗날 그의 형 또한 당쟁에 휩쓸려 곤장을 맞고 죽었다. 충격을 받은 성호는 벼슬을 포기하고 평생 학문에 몰두했다. 성호는 당쟁을 멈추게 할 방법을 찾기 위해 당쟁의 원인을 탐구했다. 그는 자문했다. 명색이 유학자인 양반들이 왜 화합하고 소통하지 못한 채 서로 죽고 죽이는 당쟁에 매달릴까?

공자의 사상을 공유하는 양반들이 왜 자기 당파의 주장은 무조건 공론으로 미화하고, 상대 당파의 주장은 무조건 당론으로 매도할까? 성호가 찾아낸 원인은 의외로 간단했다. 당시의 양반정치가 마치 ‘옥송(獄訟)’처럼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옥송은 재판장에서 이익을 다투는 소송이다. 돈·권력·명예 등 현실적 이익을 놓고 서로 자신이 갖겠다고 다투는 것이 옥송이다.

타협 없이 이긴 쪽이 다 갖고 진 쪽은 감옥에 가야 하는 것이 옥송이었다. 성호는 당쟁에 임하는 양반들이 마치 옥송에 임하는 사람들 같다고 생각했다. 옥송에 임하는 사람들이 소장을 준비하듯, 당쟁에 임하는 양반들은 당론을 구실 삼았다. 당론을 가지고 양반들은 당쟁에 뛰어들었다. 당쟁에서 이긴 쪽은 모든 것을 얻었고, 그렇게 얻은 것을 지키기 위해 또다시 당쟁에 몰두했다.

반대로 당쟁에서 진 쪽은 잃은 것을 되찾기 위해 당쟁에 몰두했다. 이긴 쪽과 진 쪽 모두 당쟁에 몰두하다 보니 당론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그럴수록 당론을 이용해 당쟁 자체를 부추기고 악용하는 양반들이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차지했다. 인격을 연마하고 실력을 닦은 사람보다 당쟁에 몰두하는 사람이 세상을 좌우했다.

현실적으로 당론과 당쟁은 출세의 지름길이요, 치부의 지름길이기도 했다. 당론과 당쟁의 원인을 옥송으로 파악한 성호는 그 해결책으로 몇 가지를 제시했다. 우선 당쟁에 임하는 양반들이 자신들의 정치 행태가 옥송과 같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제점을 수긍해야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성호는 옥송과 같은 당론과 당쟁의 해결책을 <주역> 송괘(訟卦)의 상구(上九) 효사(爻辭)에서 찾아냈다. 상구의 효사는 ‘옥송에서 이겨 큰 상을 여러 번 받아도 한순간에 잃어버릴 수 있다.(或錫之?帶 終朝三?之)’는 내용이었다. 이긴 쪽은 너무 이기려고만 하지 말고, 진 쪽은 일거에 모든 것을 만회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긴 쪽과 진 쪽이 조금씩 양보하고 타협하라는 교훈이었다. 그러나 이런 교훈은 교훈 자체로는 훌륭할지 모르지만 크나큰 이해가 걸린 당사자들에게는 절박한 호소력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성호는 나름대로 현실적 대안들을 제시했다. 양반이 관직과 정치 이외의 다른 직업에도 떳떳하게 종사할 수 있도록 사회를 개혁하자는 주장이었다.

조선시대 양반은 관직과 정치를 독점했지만 그렇기에 다른 직업에 종사할 수 없었다. 양반이 늘어날수록 관직경쟁은 치열해졌고, 그 경쟁에서 낙오된 양반은 과거낭인 아니면 정치백수로 추락했다. 달리 활로가 없는 과거낭인과 정치백수들은 마치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처럼 당론과 당쟁에 몰두했다.

양반이 관직과 정치 이외의 직업에도 떳떳하게 종사할 수 있다면 과거낭인과 정치백수가 줄어들고 당쟁도 진정되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요원한 일이었다. 성호가 마지막으로 희망을 둔 곳은 주권자 국왕이었다. 오늘날의 주권자인 국민도 당론 및 당쟁과 관련된 성호 이익의 다음 생각을 한 번쯤 음미해봄직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 당론과 당쟁으로 말미암아 귀하게 된 자들은 어찌 옥송으로써 벼슬을 얻은 자들이 아니겠는가? 왕도란 편당도 없고 반측(反側)도 없이 오직 공(公) 하나로 포괄된다. 공의 반대가 사(私)다. 사는 오직 자기만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이익 중에서 큰 것은 재물과 벼슬이다. (중략) 임금이 재물과 벼슬에 청렴결백한 자를 채용하면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자들이 그칠 것이요, 재물과 벼슬만 추구하는 자는 내쳐 벼슬도 재물도 다 얻지 못하게 하면 그 또한 무슨 마음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무익한 옥송을 하겠는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당론과 당쟁을 종식시키려 하다가는 결과적으로 당론과 당쟁을 부채질하게 된다.”(이익, <성호사설> 권7, 인사문, 당론)

 

 2010-02-15 13:02:50
 

신명호
 

1965년 강원도 출생.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선임연구원과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를 거쳐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의 왕>(1998), <조선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2002), <조선의 공신들>(2003), <궁궐의 꽃, 궁녀>(2004), <조선왕비실록>(200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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