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영토 답사기

 

제목 : 연변일보 향토문화기행시리즈-1(두만강 발원지 좌표)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1-06-11 조회수 : 2005

향토문화기행시리즈-1(두만강물줄기)

옌벤일보 2011-6-8 15:35:56

 

올해 중국공산당 창건 90돐, 래년의 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으며 본부는 6월부터 금요일 5면에 "향토문화기행"이란 컽을 달고 륙속 시리즈기행을 펼치려 한다. 이 땅에 력력한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 그 자취의 연혁사도 더듬어보면서 재조명함으로써 이를 통하여 오늘에 사는 이들에게 새로운 느낌,  새로운 계시를 주어 향후 발전과 진흥을 추진하고저 하는 것이 이번 기획보도의 취지이다. 우리는 제1보로 두만강물줄기를 따라 취재활동을 전개하려 한다. 한것은 두만강은 우리 선조들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반항하여 가렬처절한 싸움을 벌린 투쟁의 강, 공화국창건과 그후 휘황한 업적을 쌓은 영광의 강, 오늘날 글로벌시대에 새로운 전설을 엮어가는 희망의 강이기 때문이다.—편집자지도를 펼쳐보시라. 저 하늘을 치받고 우뚝 솟은 장백산에서 짙푸른 천리두만강이 청룡마냥 굽이치며 북으로 북으로 흘러흘러 방천의 출구를 거쳐 동해로 숨어든다. 천만년간 두만강량안의 옥토를 적시면서 우리 민족의 젖줄기가 된 어머니의 강, 수난의 강, 투쟁의 강, 영광의 강—두만강, 이 두만강의 발원지는 과연 어디?우리 향토문화탐방팀은 연변인민방송국 화룡기자소 한창진소장의 안내하에 현지답사를 시작하였다. 그는 여기서 나고 자라고 사회에 진출한 토배기 숭선태생이라 이 고장의 인문, 력사, 지리에 대하여서는 손금보듯 환하였다. 당시 우리들은 두만강이  장백산천지의 동쪽에서 발원한다는 것만 알았지 구체적인 것은 감감부지였다.우리가 차를 타고 도달한 진정한 발원지는 바로 천지중심에서 약 30여킬로메터 내려온 적봉이다. 천지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 바로 그“달문”으로 흰 비단필이 하늘에서 풀여져 내리는 것 같은 폭포수는 송화강 발원지의 하나이다.적봉, 중조변경선 21호 비석이 박힌 이 자그마한 산은 일명 홍토산, 붉은 산이라고도 한다. 비록 미연하게 늘어진 구릉에 불과하지만 워낙 지세가 높은 지대여서 해발 1321메터에 달한다. 여기를 "삼각지대"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비석이 삼각형을 이룬데로부터 비롯되였다. 비석의 북켠에는 한어로 "中国(중국)", 남쪽에는 우리 글로 "조선" 이라고 아로새겨놓았다. 실상 인적기 하나 없는 무인지경이지만 그래도 엄연한 변경이라 두 나라의 국경을 분명하게 갈라놓았다.바로 21호 비석이 세워진 이 삼각지대안에 조그마한 샘이 있다. 샘이라야 동서 3메터, 남북 5메터 남짓한 수수한 샘터, 수정같이 해맑고 정갈한 이 샘, 동경 128도27분; 북위 42도01분, 바로 여기서 두만강이 시작된다.샘으로부터 흘러내리는 강은 개울물만하여 어지간한 장정은 가로타고 세수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 자그마한 실개천을 따라 무수한 샘줄기들이 여기저기서도 퐁퐁 솟아나오는데 이 실개천을 따라 한참 내려가면 적봉에서 발원한 홍토수, 원지(圆池) 일명 옥련지에서 내려온 약류하, 석을수, 무두봉기슭의 삼지연에서 흘러나오는 홍단수가 합류하면서 제법 큰 하천을 이루어 동쪽으로 그 흐름을 돌려놓는다.적봉의 북켠으로 수백메터 남짓한 거리에는 푸르른 하늘을 그대로 옮겨 놓은듯 거울같이 맑은 호수가 고즈넉이 누워있다. 만족어로 옥련지(玉莲池)라고 부르는 늪이다. 우리 민족이 장백산을 민족의 성산이라고 한다면 만족들도 청나라 건국전설이 깃들어있는 장백산을 민족의 발상지로 숭상한다.만족의 전설에 의하면 먼 옛날 세 선녀가 여기 이 늪에서 목욕을 하였다. 그중 가장 나어린 처녀 푸쿠쿤이 붉은 열매씨를 먹은후 푸쿠리용순을 낳았다. 그가 커서 어머니의 당부대로 삼성이란 지방에 가 내란을 평정한 후 군주로 되였으니 그때부터 그 지방을 만주(满州)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옥련지 늪이 이런 전설적인 명늪인 것이다. 비록 1헥타르 남짓한 자그마한 늪이지만 이처럼 숭엄한 뜻을 내포하고 있어 뭇사람들의 가슴을 설레이고도 남음이 있다.

 

천리두만강이 발원지로부터 량안의 소홍단수, 서두수, 연면수, 상천수, 홍기하 등 지류를 받아들이면서 무수한 여울목을 에돌며 괴암절벽에 울창한 수림으로 장관을 이룬 협곡과 험준한 뭇산들의 사이로 흘러 지난다. 그래서 만나는 부락이 바로 하늘아래 첫 동네로 불리우는 두만강 1번지 유서깊은 숭선이다.숭선은 화룡시소재지로부터 남부로 80여킬로메터 상거한 개척한지 오랜 고장이다. 서쪽은 안도현과 이웃하고 남으로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이웃나라 조선과 마주앉았다. 조선족이 대부분으로서 총인구의 83%를 차지한다.한창진선생은 우리 일행을 인도하면서 먼저 숭선의 연혁사부터 소개하였다. 그에 따르면 여기에는 청조 광서초년부터 조선에서 건너온 이민들로 부락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광서11년(1885년) 청나라정부가 두만강류역 변강지구월간국을 설립하면서 숭선지역을 한개 사로 뭇고서 숭선사로 이름 지었다. 지금 숭선진에 합병된 로과지역은 선화사라 이름 불렀는데 일제통치하에서 1933년에 두개 사를 합병하여 역시 숭선사로 불렀다. 숭선은 청나라의 선통원년(1909년)  3월에 현을 설치하면서 화룡현에 귀속되였다. 하지만 올기강을 기준으로 하여 서남부의 대동촌 등지는 중화민국시기에는 선후로 료녕성 안도현 홍기사로, 일제침략시기에는 안도현 아동사로 되였다가 1942년에  숭선사에 귀속되여 관리하였다.  오늘날 숭선에는 화룡시의 통상구인 장백산아래 첫 통상구가 있다. 고성리통상구는 일찍 1927년에 설립되여 대안의 조선 량강도 대홍단군 삼장리와 무역을 하였다. 1933년 9월 도문세관이 서면서 여기에 관세분소를 설치하였다. 새 중국이 창건된 후 1953년 12월 고성리변방검사소를 설립하고 중, 조 두 나라 친선을 도모하고 변방경제를 진흥시키고 변강을 건설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놀고있다.유서깊은 대안의 삼장나루터와 고성리가 나무다리를 놓고 출입경 일군들을 맞고 보내던 이곳에는 1964년부터 세멘트부두를 앉히고 줄쪽배를 갖추어 너비가 40메터 남짓한 두만강을 오가면서 통상실무를 펼치였다. 그후 1994년에 중조 두 나라는 공동투자하여 콩크리트다리를 놓고 "두만강제1교"라 이름 지었다. 지금은 현대화한 통상구청사에서 현대화시설을 갖추고 사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고있다.오늘날 숭선은 경제가 번영하고 변강이 공고하고 인민대중이 안거락업하는 변강의 강진으로 건설되였다. 숭선은 비록 고한산간지대의 산간벽지에 위치한 고장이지만 벼농사와 담배농사 등 농작물농사가 벌방에 짝지지 않는다. 특히 해발 800~1000메터에 달하는 이런 고한산간지대에서 벼농사로 다수확을 확보한다는 것은 거의 기적이라 할수 있다. 이는 지난 세기 50년대말부터 수리관개건설을 틀어쥐고 드팀없이 추진한 것과 갈라 놓을 수 없다. 당시 일신으로부터 약 10킬로메터 떨어진 원봉까지, 원봉에서 다시 상천벌에 올라간 두만강인수관개시설, 높이 49메터, 길이 120메터인 관개시설—"은하교"를 놓아 시만골의 물을 남석벌로 끌어들인 관개시설은 이 고한산간지대에 천지개벽을 가져왔다. 그때 "물이 산으로 올라 벼꽃을 피운 현대전설"은 전국을 들썽하게 소문을 놓으며 세인의 감탄을 자아냈다.숭선은 화룡시의 주요한 생태농업기지, 잎담배기지, 축산업기지, 림업기지로 되고있다. 특히 중약재를 주로 한 특산업기지는 이 진의 일대 우세이다. 오미자 재배면적은 15헥타르에 달하고 삼림인삼재배면적은 170헥타르에 달한다. 진적으로 총농업경제수입은 년간 1588만여원에 달하고 인당 순수입은 5056원에 달한다.

 

“숭선은 왜 고성리라고도 부르는가요?”“이제 그 유적지들을 돌아 보느라면 자연히 알게 될 겁니다.” 우리들의 물음에 한창진선생은 이렇게 대답하면서 우리들을 숭선진에서 서쪽으로 5리쯤 상거한 홍기하(일명 올기강)기슭으로 데려갔다. 여기는 화룡시에서도 유명한 숭선풍경구, 진정 도화원, 인간선경을 방불케 하였다.뒤켠에서 우아한 군함산이 방금 입항한 군함처럼 저 멀리까지 뻗어가면서 그 웅장한 기세를 한껏 뽐낸다. 앞은 기암괴석으로 이룬 석벽이 한껏 펼쳐지여 고대성벽을 방불케 한다. 그 아래로 맑디맑은 홍기하가 사품치며 굽이친다.“아, 저 푸르른 창공에서 풀어내리는 비단필을 보시오.” 바라보니 한줄기 폭포가 군함산서쪽 개바위로부터 아츠랗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름도 개바위폭포, 아츨한 산꼭대기를 가리마처럼 살짝 가르고 그 사이로 한줄기 하아얀 물줄기가 수십메터 내리드리웠는데 그야말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바로 여기가 고성리성터 자리입니다.”  한창진선생이 절벽으로 이루어진 앞산을 가리켰다. 홍기하와 두만강줄기의 합수목, 깎아지른 절벽으로서 일반 사람들은 도저히 빈손으로 오를 수 없는 천연요새였다. 산우는 바로 덕이였는데 여기가 발해시기(기원 699년—926연)의 고성리성터였다.고증한데 의하면 이 성의 동쪽벽(60메터)과 서쪽(180메터)은 모두 인간이 현무암돌을 쌓아 올린것이라고 한다. 북쪽벽(220메터)과  남쪽벽(250메터)은 천연적성벽으로 리용되였던 것이다. 산덕의 넓은 땅은 농민들이 이미 수전을 풀어서 논밭이 되였는데 옛 성벽이 물도랑 량켠의 곁벽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숭숭 구멍이 난 화산석으로 쌓인 돌벽의 웃부분이 1.5~2메터, 아래 부분이 5~6메터로서 우리 조상들의 근로용감한 정신, 고심참담한 노력이 력력히 엿보이는 력사의 견증물이였다.여기서 서켠 산자락에 오붓한 대동촌부락이 옹기종기 모여앉았는데 마을은 훤하게 펼쳐진 넓은 벌판을 마주하고 있었다. 여기에도 발해시기의 유적지가 있다. 대동촌 이남 100메터 되는 언덕에 동서 300~400메터, 남북 150메터 되는 지면에서 기와, 토기 등 건축물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대동촌의 한 농가에서 움을 파다가 옛사람들의 묘자리를 발견하였는데 여기서도 놋술, 놋팔찍, 귀걸이 등 장식품들이 출토되였다.얼마전 그제날 숭선에 귀속되였던 석인구에서 구식기시기 고인류 대형유적지가 발견되였다. 북경, 장춘 등지에서 온 저명한 고고학자들이 여기서 발견된 1500여점의 고대문물을 고증한 결과 동북아범위에서는 십분 보기 드문 대형구석기시기 고인류로천유적지라고 한결같이 인정하고 고고학적가치가 아주 높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외에 대동촌지역에서도 수천년전의 고대유적지가 발견되여 한창 발굴중에 있었던 것이다.숭선은 이처럼 간 곳마다 력사유적지가 있고 김일성낚시터, 홍기하매복전 전적지, 마록구삼림경찰대 습격지 등 혁명전적지도 적지 않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을 포함한 력사학가, 문인들의 커다란 흥취를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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