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풍죽로당

 

제목 : 안의현치기(安義縣治記)> 첨부파일 : 다운로드[1]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0-06-29 조회수 : 960

신석우, <연암산거도발(燕巖山居圖跋)>(『海藏集』)

 

박규수는 조부가 살던 연암협의 실경에다, 조부가 감탄한 청나라 벽돌집을 그리고, 수차와 도르래 등을 이용하여 편리한 생활을 하는 농가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박규수는 정철조의 그림을 극구 칭송하였지만, 은자로서가 아닌 실학자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이렇게 새로 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박규수는 조부가 세운 안의의 중국식 건물에 대한 그림도 그린 바 있다. 1856년 신석우는 박규수가 그린 하풍죽로당의 그림을 보고 안의 관아를 찾아갔다. 그리고 박지원의 기문과 박규수의 그림을 바탕으로 하여 하풍죽로당 등 박지원이 세운 건물에 대한 답사 기록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고을로 들어가니 고을원 김재현(金在顯, 德夫)이 광풍루(光風樓)에 내 숙소를 잡아주었다. 광풍루는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선생이 창건한 것으로 탁 트여 훤하였다. 앞에 큰 하천을 임하고 있고 하천 남쪽에 느티나무와 버들나무를 줄지어 심어놓았는데 들판이 광활하였다. 마침 단비가 내려 보리가 새파란 빛을 띠었다. 한밤이 되자 베갯가에 여울의 물소리가 비로소 커졌다. 아침에 고을의 재사(齋舍)로 들어가 연암의 옛 자취를 물었다. 연상각은 재사 남쪽의 작은 정자로 곁에는 못이 있었지만 못은 마르고 섬만 있었다. 하풍죽로당은 못 북쪽의 건물인데 그 제도가 환경(瓛卿)이 그려서 보여준 것과 똑 같았다. 공작관은 하풍죽로당 북쪽의 관사인데, 아마 관아에 예전부터 있던 재사에 편액을 걸어둔 듯하다. 마루에는 공작관이라는 편액을 걸어두고 방에는 하풍죽로당이라는 편액을 또 걸어두었다. 내가 그 편액을 떼서 돌아가 정자를 하나 짓고 걸려 하였다. 문 옆에 작은 집이 있는데, 둥근 창이 반쯤 드러나게 벽돌로 쌓고, 바람이 들어오도록 기와로 노전(魯錢) 문양으로 세워놓은 것이 통인청(通印廳)이다. 나는 이곳이 반드시 관자오륙동자육칠당(冠者五六童子六七堂)일 것이라 하였다. 오동각은 객사의 협실(夾室)에 이 이름을 걸어놓았지만 고을원이 모르는 것인 듯하다. 뜰의 오동나무를 가리키면서 이것을 가리키는 듯하다고 하였다. 뜰에는 붉은 살구와 흰 매화, 대숲이 있었다. 공작관 북쪽에도 대숲과 가지가 천 개 달린 소나무가 있었다.

   

신석우, <안의현치기(安義縣治記)>(『海藏集』)

박지원이 안의를 떠난 후 한 갑자 겨우 지난 시간에 이미 안의 관아에 박지원이 세운 건물은 잊혀졌다. 고을원 조차 박지원이 이름붙인 건물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위의 글에서, 『논어』에서 공자(孔子)도 함께 하고자 한, 증점(曾點)의 풍류를 박지원이 과시하려 ‘관자오륙동자육칠당’이라는 긴 이름의 건물을 지었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박지원의 글에 이것이 보이지 않으니 사람들은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하게 되었다. 사정이 이러니 신석우가 찾아간 때로부터 150년이 지난 오늘에 안의 관아터에 무엇이 남았겠는가? 

『열하일기』를 비롯하여 박지원이 남긴 글은 고전 중의 고전으로 널리 읽히지만, 그가 살던 자취는 어디에서 찾을 수 없다. 중국풍으로 만들었던 안의현 관아의 여러 건물이나 제생동 집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 시기조차 말해주는 데가 없다. 한국 역대 최고의 문인으로 내세울 만한 박지원이건만, 그의 자취를 더듬을 곳이 이 땅에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이가원 선생의 『연암소설연구』 앞에 실린 화보에 실은 희미한 연암협의 그림이 있지만 그조차 이제 찾기가 쉽지 않다. 박규수가 그린 연암협과 안의현의 그림이 나오기를 간절히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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