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풍죽로당

 

제목 : 박규수가 그림으로 전한 연암의 자취 첨부파일 : 다운로드[1]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0-06-29 조회수 : 1233

 

박지원은 1796년 안의현감을 그만두고 군직(軍職)을 받아 상경하여 제생동(濟生洞))으로 돌아왔다. 제생동의 집은 1788년 마련한 것으로, 종제인 박수원의 소유였는데 그가 선산부사로 나감에 따라 집이 비게 되어 그곳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제생동은 창덕궁 서쪽, 오늘날의 계동인데, 계동(桂洞), 계산동(桂山洞), 계생동(桂生洞) 등으로도 불렸다. 현대그룹 본사와 중앙고등학교 인근이다. 당시 이곳은 과수원이었는데, 박지원은 1796년 이곳에 집을 하나 더 지었다. 가마에서 굽지 않고 햇볕에 말린 흙벽돌을 사용하여 지었는데, 서쪽에 다락을 얹은 건물을 만들고 창문을 내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계산서숙(叢桂書塾)이라 하였다. 그래서 박지원이 죽고 한참의 세월이 흐른 1824년 한 거지가 계산서숙에 와서 보고 안의의 관아에 있는 정자와 똑같다고 한 것으로 보아, 제생동의 집 역시 중국식 벽돌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지원의 본가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재동(齋洞)에 있었는데 곧 오늘날 헌법재판소 인근으로, 아름다운 백송(白松)이 서 있다.

그러나 계동과 재동의 서울집에서 박지원은 오래 살지 못하였다. 제용감 주부, 의금부 도사, 의릉령(懿陵令)을 지내다가,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로 나가면서 이 집은 남들에게 맡겨졌다. 박지원은 면천에서도 안의에서처럼 실학자적 면모를 유지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1798년 농서(農書)를 구하는 교서에 응해 지어 올린 <과농소초(課農小抄)>가 이 때의 것이기도 하다. 또 버려진 땅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도 하였다. 향교 앞에 버려진 언월지(偃月池)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박지원은 백성들을 모아 연못을 준설하고 개울물을 끌어 들인 다음, 연못 가운데 작은 섬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6각 초당을 만들었는데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라 이름하였다. 두보(杜甫)의 <늦봄 양서의 새로 빌린 초가에 쓰다(暮春題瀼西新賃草屋)>에서 가져온 구절이지만, 벗 홍대용이 고향에 건곤일초정주인(乾坤一草亭主人)을 자처하였으니, 벗과의 옛 일을 떠올린 것이기도 하다. 

그 후 박지원은 1800년 양양부사(襄陽府使)로 나갔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돌아왔다. 목민관으로서 한계를 인식했다. 당시 양양의 천후산(天吼山) 신흥사(神興寺)의 승려가 궁속(宮屬)들과 결탁하여 역대 임금의 필적을 봉안한다는 핑계로 백성들을 침탈하였는데, 박지원이 이를 막으려 감사에게 보고하였으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아 병을 핑계대 물러나 버린 것이다. 벼슬에서 물러난 박지원은 1802년 문생 이광현(李光顯)과 함께 다시 젊은 날의 추억이 서린 연암협으로 들어가 계곡에 정자를 짓고 살았다. 그해 겨울 부친의 묘를 포천(抱川)으로 이장하려다 유한준(兪漢雋)과 산송(山訟)이 생기자 양주(楊州) 성곡(星谷)으로 이장하였다. 이로 인해 병이 위중했고, 말년에 중풍으로 몸이 마비되어 글을 짓지 못하다가 1805년 10월 20일 제생동의 집에서 생을 마쳤다. 그리고 12월 5일 장단(長湍)의 송서면(松西面) 대세현(大世峴)에 장사 지냈다.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는 부친을 빛내기 위하여 『연암집』과 『과정록』을 편찬하였으며, 손자 박규수는 조부를 빛내기 위하여 조부가 살던 곳을 그림으로 그려두었다. 연암협의 모습은 정철조가 그렸음을 앞서 말한 바 있다. 박규수는 정철조의 그림을 칭송하였지만 자신의 붓으로도 연암협을 그려두었다. 박규수의 벗 신석우(申錫愚)는 1844년 박규수가 직접 그린 <연암산거도(燕巖山居圖)>에 발문을 쓴 바 있다. 신석우는 박지원을 무척 좋아하여 박지원을 대신하여 <연암기(燕巖記)>를 제작하였는데 『연암집』에 산견되는 연암협에 대한 박지원을 글을 엮어 만든 독특한 것이다. <연암산거도발(燕巖山居圖跋)>(『海藏集』 권12)에는 이 기문이 실려 있다.

 

나는 일찍이 연암(원문에는 朴燕巖이라 되어 있으나 ‘朴’은 衍文이다)을 사모하여 화장산(華藏山) 속에 집을 정하여 늙어 죽을 계획을 하였다. 처음 집터를 볼 때 산이 깊고 길이 막혀 종일 가도 사람 하나 만날 수 없었다. 갈대밭에 말을 세우고 채찍으로 높은 언덕을 구획 지으면서 말하였다. “저기라면 울타리를 치고 뽕나무를 심을 수 있겠군. 갈대에 불을 질러 밭을 갈면, 한 해에 곡식 천 석은 거둘 수 있겠네.” 쇠를 쳐서 불을 놓으니 바람에 불이 번졌다. 꿩이 소리 내어 울면서 놀라 날아오르고, 새끼 노루가 앞으로 달아나 숨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쫓았지만 시내에 막혀 돌아왔다. 그 깎아지른 절벽과 나뭇단을 세워놓은 듯한 협곡에는 나무와 풀들이 무성하여 처음에는 길이 없었다.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니 산자락이 모두 감추어지고 갑자기 면세가 바뀌었다. 언덕이 평평해지고 기슭이 예쁘장하며, 흙이 희고 모래가 밝아, 훤하게 트여 있다. 남쪽으로 집을 얽어매었다. 앞쪽 왼편으로 푸른 절벽이 깎은 듯 서 있어 그림 병풍을 펼쳐놓은 듯하다. 갈리진 바위틈이 입을 벌리고 있어 절로 집 모양처럼 되어 있는데 그 안에 제비가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이 바로 연암이다. 집 앞 백여 보에 평평한 둔대와 굽은 개울이 있는데 그 아래가 조대(釣臺)다. 개울을 따라 흰 바위가 평평하게 펼쳐져 있어 마치 먹줄을 쳐서 잘라놓은 듯하다. 어떤 곳은 평평한 호수가 되고 어떤 곳은 맑은 못이 되는데, 매번 서산의 석양이 비치면 그 그림자가 바위 위에까지 어린다. 이곳이 엄화계(罨畫谿)다. 손수 가시덤불을 베고 나무에 붙여서 지붕을 이었다. 담장 둘레로 천 그루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를 심었다. 3무(畝)의 못에는 한 말의 새끼 물고기를 풀었다. 바위벼랑에는 백 통의 벌을 치고 울타리 사이에는 소 세 마리를 묶어두었다.

 

신석우는 박지원이 백동수, 홍대용, 형수를 위해 쓴 글을 엮어 이렇게 기문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신석우는 박규수의 <연암산거도>와 자신이 엮어 놓은 박지원의 글을 비교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

 

산이 겹겹이고 물이 이어지는데 풀과 갈대가 울창한 것은 선생이 말을 세우고 노루를 쫓았다고 한 것이겠지. 꽃이 곱고 버들이 무성한데 담과 지붕이 들쑥날쑥한 것은 선생이 나무를 심고 과일나무를 기르는 땅이라 한 것이리라.  파란 논과 푸른 밭의 어린 나락과 여린 뽕나무는 선생의 경륜을 시험해본 것이다. 휘도는 못과 고인 호수에 비단같이 빛나는 개울, 울긋불긋 벼랑에 소나무 그림자가 바위를 쓸고 있는 것은 선생이 밤낮으로 지팡이를 짚고 신발을 끌면서 배회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사각의 처마를 단 둥근 정자, 이중으로 된 전각과 긴 회랑, 뚫어서 창을 내고 아자(亞字)로 난간을 만들었으며, 수차의 바퀴에 물이 튀기고 우물에 도르래로 물을 긷는 것은, 또한 산속의 집에 마땅히 있는 것이지만 채 만들지 못한 것인데, 환경(瓛卿, 박규수)이 마음속으로 만들어 보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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