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풍죽로당

 

제목 : 안의현(安義縣) 현사(縣司)에서 곽후(郭侯)를 제사한 기(記) 첨부파일 : 다운로드[1]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0-06-29 조회수 : 1123

내가 안의현의 정사를 보던 해 8월 17일에 호장(戶長) 하(河) 아무개가 아뢰기를,

“내일 갑신일(甲申日)에 현사(縣司)에 행사가 있으므로, 감히 그 일을 볼 서리와 노속들로 하여금 물러가 목욕재계하게 하였으면 합니다.”하기에,

“현사에 무슨 행사가 있단 말인가?”라고 물으니,

“옛날 만력(萬曆) 정유년(1597, 선조 30)에 왜적에게 황석산성(黃石山城)이 함락당했을 때에 현감 곽후(郭侯)가 순사(殉死)하였는데, 황석산성은 우리 고을의 성이고, 곽후는 우리 고을의 어진 부군(府君 원님)입니다. 그러므로 해마다 이날에 제사하여 감히 폐하는 일이 있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나라의 환란을 막았으면 그런 분들은 법에 따라 마땅히 제사를 지내 주게 되어 있다. 곽후는 고립된 성을 지키며 백성을 보위한 것이 3년이나 되었으니, 큰 환난을 막았다 이를 수 있을 것이고, 마침내 자신의 직분을 지키다 순사하여 그의 외로운 충성과 굳센 절개가 나라 안에 드러났으니, 나라를 위해 죽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정에서는 그의 훌륭한 행적을 포상하는 은전을 여러 번 더해 주어 마침내 이조 판서로 관직을 추증하였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정문(旌門)을 세우고 그 후손을 녹용(錄用)하였으니, 집안에 가묘(家廟)를 세우고 대대로 불천(不遷)의 제사를 모셨으리라.

곽후는 현풍(玄風) 사람이다. 따라서 현풍에 있는 사원(祠院)은 ‘예연서원(禮淵書院)’으로 사액(賜額)되었고, 본현(本縣)에 있는 것은 ‘황암사(黃巖祠)’로 사액되었으니, 두 고을이 모두 제사를 올려 받들고 있다.

무릇 현사(縣司)라는 것은 구석지고 누추한 장소요, 아전들이 거처하는 곳이니, 현사에서 곽후를 사사로이 제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분에 대한 모독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곽후의 신령이 어찌 달갑게 스스로 그 존엄을 버리고 이곳에 내려와 흠향하겠는가.”하였다.

그런데 제사하는 날 저녁이 되자 호장(戶長)이 온 고을의 아전과 노복들을 거느리고 크고 작은 일들을 분주히 처리하기를 조심하고 엄숙하게 하였다. 어렴풋이나마 마치 곽후가 관아에 앉아 있는 것을 다시 뵙고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 다담상을 올리는 듯이 하였고, 숙연하기로는 마치 곽후가 호령을 발하는 것을 다시 듣고 고개를 숙여 명령을 받드는 듯이 하였다.

그리고 횃불을 휘황하게 밝혀 놓고 절하고 무릎 꿇는 것이 예가 있어 헌작(獻爵)으로부터 철상(徹床)에 이르기까지 감히 시끄럽게 하거나 나태한 기색을 나타냄이 없었다. 이로써 더욱 알았거니와 예란 인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요, 인정상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 없는 예에 대해서는 성왕(聖王)도 그것을 바꾸게 할 수가 없는 법이다.

필부(匹夫)가 나무를 껴안고서 불타 죽은 것이 세시(歲時)의 절기와 무슨 관계가 있으랴마는, 후세의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이날이 되면 더운 음식을 먹지 않는데, 하물며 곽후는 일찍이 이 고을의 부모가 되어서 몸소 야지(野地)를 피로 적시고 이 고을 백성과 아전을 위해 죽었음에랴!아! 지금 중앙의 모든 관청과 지방의 주현(州縣)에는 이청(吏廳)의 옆에 귀신에게 푸닥거리하는 사당이 없는 곳이 없으니, 이를 모두 부군당(府君堂)이라 부른다. 매년 10월에 서리와 아전들이 재물을 거두어 사당 아래에서 취하고 배불리 먹으며, 무당들이 가무와 풍악으로 귀신을 즐겁게 한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또한 이른바 부군(府君)이라는 것이 무슨 귀신인지 알지 못한다. 그려 놓은 신상(神像)을 보면 주립(朱笠)에 구슬 갓끈을 달고 호수(虎鬚)를 꽂아 위엄과 사나움이 마치 장수와 같은데, 혹 고려 시중(侍中) 최영(崔瑩)의 귀신이라고도 말한다. 그가 관직에 있을 때 재물에 청렴하여 뇌물과 청탁이 행해지질 못하였고, 당세에 위엄과 명망이 드날렸으므로 서리와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그 신을 맞아 부군으로 받들었다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최영은 일찍이 몸소 장수와 정승을 도맡고도 능히 위태로운 상황을 버텨 내어 나라를 보존하지 못하고 말았으며, 죽어서도 밝은 귀신이 되어 나라의 제사 의식에 오르지 못하고, 마침내 도리어 서리와 하천배에게 밥을 얻어먹으면서 그들의 무람없는 대접을 기꺼이 받고 있으니, 신령하지 못한 어리석은 귀신이라 이를 만하다. 관직에 있을 때 청렴했다는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꼭 모셔야 할 귀신이 아닌데 그 귀신을 섬기면 군자는 이를 아첨이라고 이른다. 하물며 음탕하고 너절하며 예가 아닌 제사로 섬긴다면, 아첨이 이보다 큰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안의의 이청(吏廳)에서만은 이른바 부군당이라는 것이 없다. 곽후 같은 이는 이 고을에 훌륭한 수령이 되어서 국사에 순절하여 밝은 귀신이 되었으니, 어찌 참된 이 고을의 부군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현사에서 제사할 때 유독 부군으로 일컫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개 예가 아닌 제사와 혼동될까 봐서 부군당이라는 이름을 피한 것이리라.

아! 지금의 수령들이 위엄 있는 모습으로 서리와 백성을 대하여 눈 한 번 치떠보고 손가락 한 번 까딱하면 끓는 물이나 불속에라도 들어갈 듯이 하다가도, 그날로써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가게 되면 전송을 절반도 못 가서 등을 돌리는 자가 있는 법이다. 정유년이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이니, 그때의 백성이나 아전들 중에 그 아들이나 손자가 살아 남아 있겠는가? 그런데도 안의 사람들이 지금껏 곽후를 두려워하고 사랑하기를 이와 같이 하고 있으니, 진실로 그의 충의가 사람들을 깊이 감동시키지 않았다면 어찌 이토록 사람들이 그를 배반하지 않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사옥(祠屋)이 겨우 두 칸뿐이라 비좁아서 곽후를 모시는 묘당이라 하기에는 부족했다. 금년 봄 조정의 명을 받들어 고을의 성황당(城隍堂)을 여단(厲壇)의 왼쪽에 신축하였는데, 이 고을의 백성과 서리들이 그 남은 재목을 요청하여 사옥을 보수하고 옛 규모보다 조금 넓혀서 단청을 덧칠하였다.

나는 고을의 서리들이 곽후에 대하여 세월이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소홀히 대하지 아니하여 예의(禮儀)가 엄하고 또 정성스러우며, 현사(縣司)에서 제사를 받들면서도 잘못된 인습을 따르지 아니하여 그 칭호와 명분이 바르고 분명하며, 나라 안에 소문이 나게 하고 이웃 고을에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한 점을 가상하게 여기는 바다. 다만, 해가 오래됨에 따라 사모함이 갈수록 약해지게 되면 예의가 혹 전날만 못할 수 있고 명호(名號)가 습속으로 인하여 어긋나기가 쉬워서, 사람들이 이 사당이 현사에 있음을 보고 의심을 둘까 걱정스럽다.

그래서 후(侯)의 휘(諱) 준(䞭)과 자(字) 양정(養靜) 및 그의 제사를 받들게 된 본말을 써서 사당의 벽에 간수하게 하였다.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세 번째 계축년(1793), 성상(聖上) 17년 통훈대부(通訓大夫) 안의현감 진주진관병마절제도위(行安義縣監晉州鎭管兵馬節制都尉) 반남(潘南) 박지원이 기록하다.

사람들이 오래도록 잊지 않는다는 대목에 이르러 감개가 일어나게 하고, 부군당이란 이름을 피한 이유를 밝히고 명분을 분명하게 제시한 부분은 고을 사람들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바로서 문장의 기세가 웅장하게 변했으니 이야말로 군자가 남을 사랑하는 글이 되었다.

 

[주D-001]내가 …… 해 : 연암은 1791년(정조 15) 음력 12월에 안의 현감에 임명되었으며, 1792년 음력 1월에 임지에 도착했다.[주D-002]호장(戶長) : 아전의 우두머리를 말한다.[주D-003]현사(縣司) : 현의 호장이 직무를 보는 곳으로, ‘현사(縣舍)’라고도 한다.[주D-004]왜적 : 원문은 ‘倭’라고만 되어 있으나, ‘倭奴’ 또는 ‘倭寇’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주D-005]곽후(郭侯) : 곽후는 당시 안의 현감이었던 곽준(郭䞭 : 1550 ~ 1597)을 가리킨다. 곽준은 자가 양정(養靜), 호는 존재(存齋)이며,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가등청정(加藤淸正) 휘하의 왜군이 영남과 호남의 요충지인 안의(安義)의 황석산성(黃石山城)을 공격하자, 임진왜란 초기에 안의 현감을 지냈던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산성을 지키다가 그의 아들들과 함께 전사하였다.[주D-006]이조 판서로 …… 녹용(錄用)하였으니 : 곽준은 1692년(숙종 18)에 공조 판서 권유(權愈)의 건의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그 후손이 녹용되었으며, 1693년 영남 유생이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였으나 시장(諡狀)의 미비로 미루어 오다 1708년(숙종 34)에 와서야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肅宗實錄 18年 8月 23日, 34年 8月 20日, 34年 12月 13日》[주D-007]불천(不遷)의 제사 :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인물에 대하여 친진(親盡), 즉 제사를 지내는 대수가 지났음에도 그 신주를 옮기지 않고 계속해서 제사를 모시는 것을 말한다.[주D-008]사원(祠院) : 사당과 서원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으로 공통적으로 선현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다.[주D-009]필부(匹夫)가 …… 않는데 : 필부는 춘추 시대 진(晉) 나라의 개자추(介子推)를 가리킨다. 진 문공(晉文公)이 왕위에 즉위한 후 그의 공을 잊어버린 채 아무런 녹(祿)을 주지 않자 개자추는 어머니를 모시고 산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문공이 이를 알고 그를 나오게 하려고 산에 불을 질렀는데,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나무를 껴안고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이에 문공은 사당을 지어 그의 제사를 모시게 하고 그가 불에 타 죽은 날에는 일절 불을 피워 음식을 익히지 말고 미리 만들어 놓은 찬 음식을 먹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날 즉 한식(寒食)이 되면 사람들이 찬 음식을 먹는 풍습이 생겨났다.[주D-010]서리와 아전들 : 원문은 ‘府史胥徒’인데 부(府)와 사(史)와 서(胥)와 도(徒)는 원래 《주례》 천관(天官)에 규정되어 있는 하급 관직들로, 재화 관리와 문서 출납을 맡거나 관의 요역(徭役)에 응하는 자들이라 한다.[주D-011]주립(朱笠) : 융복(戎服)을 입을 때에 쓰는 붉은 칠을 한 전립(戰笠)을 말한다.[주D-012]호수(虎鬚) : 주립의 네 귀에 꾸밈새로 꽂는 흰 빛깔의 새털을 말한다.[주D-013]꼭 …… 이른다 : 《논어》 위정(爲政)에서 공자는 “꼭 모셔야 할 귀신이 아닌 귀신을 제사 지내면 이는 아첨하는 것이다(非其鬼而祭之 諂也)”라고 하였다.[주D-014]예의(禮儀) : 원문은 ‘禮義’로 되어 있으나, 이본들에 따라 바로잡았다. 문맥상 ‘禮儀’가 옳을 뿐 아니라, 바로 다음 문장에도 ‘禮儀’로 되어 있다.[주D-015]행(行) : 품계(品階)보다 관직이 낮을 경우를 표시한 말이다. 통훈대부는 정 3 품이고, 현감은 종 6 품이다.[주D-016]이야말로 …… 되었다 : 원문은 ‘斯其爲君子之愛人’인데, 《예기》 단궁 상(檀弓上) 중 역책(易簀)의 고사와 관련된 대목에서 증자(曾子)가 아들에게 “군자는 남을 사랑하기를 덕으로써 하고, 소인은 남을 사랑하기를 고식책(姑息策)으로써 한다.〔君子之愛人也以德 細人之愛人也以姑息〕”고 질책하였다. ‘군자는 남을 사랑하기를 덕으로써 한다’는 말은 군자는 남을 사랑하되 그 사랑을 통해 상대가 덕을 성취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연암집 제1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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