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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조병현칼럼> 위대한 애국자 보재 이상설을 추억하다 첨부파일 : 다운로드[1]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5-06-10 조회수 : 845
[조병현 칼럼] 위대한 애국자 보재 이상설을 추억하다


조병현 박사(북방민족나눔협의회 공동대표)

기사입력: 2015/06/08 [09:24]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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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북방민족나눔협의회’에서 주관하는 현충일 추념, 간도를 지킨 인물 묘소 참배가 올해는 지난 6월 6일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선생 묘소가 있는 충북 진천군 진천읍 이상설안길 10 숭렬사에서 열렸다. 필자는 참배를 마치고 2부에서 “위대한 애국자 이상설 정통령을 추모하다”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간도본부 회원과 종친, 마을주민, 청소년 등 많은 사람이 참석하여 선생의 생애와 업적, 나아가 헤이그 특사활동에 대해 추모한 것은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참 다행스러웠다.

선생의 활화산 같은 삶의 궤적은 개혁과 독립운동사를 대변할 뿐 아니라 오늘 우리 사회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04년 6월 일제가 황무지의 개간권을 요구하자 이의 침략성과 부당성을 폭로하는 일인요구전국황무지개척권불가소日人要求全國荒蕪地開拓權不可疏를 고종에게 올려 일본의 요구를 물리쳤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고종의 인준을 거치지 않은 사실을 알고 결사순국의 결단으로 조약에 반대할 것을 주문한 독이참찬소讀李參贊疏 상소문을 올렸다. 황제가 조약을 거절하지 못할 입장이라면 차라리 자결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옛날부터 국가위기에 신하들의 간언이 있어 왔지만 군주에게 사직을 위해 목숨을 끊어 자결할 것을 간언한 신하는 오직 이상설 뿐’이라고 평하였다.

을사늑약 파기투쟁 후 “국권을 찾지 못하면 다시 고국 땅을 밟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저동苧洞에 있던 집을 팔아 1906년 8월 북간도 연길현 육도구 용정촌에 최초 민족교육을 실시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건립하여 역사·지리·수학·국제공법·헌법 등 근대교육과 함께 반일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서전서숙은 1년 만에 문을 닫았지만 이를 계기로 서간도와 연해주, 국내 각지에서 민족교육이 크게 성장하였다.

1907년 4월 을사늑약이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을 폭로하고 이를 파기하기 위해 헤이그 국제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되었으나 “각국 정부가 이미 을사늑약을 승인한 이상 한국정부의 자주적인 외교권을 인정할 수가 없다”는 이유로 본 회의 참석과 발언권을 거부당했다. 영국은 인도 지배를 묵인받는 대신 일본의 조선지배를 묵인하는 ‘영일동맹’에 따라 일본을 지지하였고, 러시아는 러일전쟁의 여파로 일본을 견제할 목적을 가지고 조선의 특사 파견을 도왔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일제는 현지 공관과 회의대표에게 한국대표의 회의참석을 제지하도록 지시하여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본국에서는 이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되어 궐석재판闕席裁判을 열어 ‘밀사라고 칭한 죄’에 대하여 사형선고를 내렸다.

사형선고를 받은 선생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망명객으로 미국과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북간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홍개호興凱湖 남쪽 봉밀산蜂密山 부근에 땅 45방方을 사서 100여 가구를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운동 기지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였으며,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해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고자 1910년 유인석ㆍ이범윤ㆍ이남기 등과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였다. 7월에는 고종에게 군자금 하사와 ‘권황제아령파천소勸皇帝俄嶺播遷疏’을 권하는 소를 올려 망명 정부의 수립을 기도하였다.

1913년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를 세워 광복군 사관을 양성하다가 1914년 해외망명 최초 임시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를 세워 초대 의장 정통령正統領에 선임되었다. 정통령은 ‘임금님 밑의 차상위 최고지도자’라는 뜻의 상임의장 자리이다. 대한광복군 정부는 1919년 9월 6일 상해 임정에 통합되었다. 1915년 3월 상해에서 민족운동자들과 화합해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해 본부장을 맡는 등 국권 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다 1917. 3. 2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선생은 왜 위대한 애국자인가? 조국을 되찾지 못한 죄인으로 부끄럽다며 묘지도 남기지 않았다. 나라와 나랏님을 잃은 불충의 인물이 무엇을 남긴다는 생각이 추호라도 있다면 그것조차 불충이라고 생각한 최고 충신이다. 매국노, 친일파가 판치는 나라에서 위대한 애국자다운 모습이다.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 정세가 선생이 활동하던 그 때와 비슷해 더 그립지만, 결사순국의 결단과 민족교육 및 항일애국 활동 등 참된 업적을 제대로 알고 있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선생의 보배로운 피는 봄에 이슬이요 여름에 비이니라. 선생의 빛난 정성은 밤에 별이고, 낮에 태양이다. 혼란스런 오늘, 우리는 결사순국을 간언할 수 있는 진정한 애국자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선생의 영정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영토수복에 더욱 매진해야 한다. 진천군에서 추진하고 있는 ‘서거 100주기 기념 숭모사업’을 잘 마무리하고, 선생의 참된 평가와 함께 후손의 번창을 간절히 빌어본다. 그리고 예전 발해 옛터를 흐르는 ‘슬픈 강’의 뜻을 지닌 ‘수분하’ 강변에 세워진 유허비를 찾고 싶다. 수분하 강변에 서서 선생의 유허비를 참배하지 않고는 어찌 “사랑한다” 말 할 수 있으랴! 선생의 위대한 애국정신을 다시 한번 더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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