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 녹둔도 영유권

 

제목 : 50만 고려인 발원지… 지금은 수풀만 무성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09-11-07 조회수 : 768

 

 09.11.03 00:17 http://cafe.daum.net/LOVEGANDO/Aq2l/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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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만 고려인 발원지… 지금은 수풀만 무성








크라스키노에서 블라디보스토크 방향으로 15km쯤 가면 하천이 있다. 이 하천을 중앙으로 널따란 평원이 펼쳐진다. 국도 좌측은 상지신허, 우측은 중지신허, 중지신허 아래 즉 하천 하류는 하지신허라고 부른다. 국도에서 좌측으로 돌아 4km쯤 북쪽으로 가면 야트막한 구릉에 조선인 이주와 관련한 비가 있다. 지신허기념비다. 비문은 이렇다.

“이곳은 연해주 핫산지역 비노그라드노예에 있던 지신허라고하는 옛마을로서 1863년 함경도 농민 13세대가 두만강을 건너와 정착한 극동아시아 최초의 한인마을로 현재는 옛터만 남아 있다. 그러나 1937년까지 1700여명의 한인들이 모여 살던 큰 마을이었으며 현재 50만에 이르는 CIS지역 거주 한인들의 발원지가 되는 곳이다. 이에 우리는 이 비를 세워 한인거주 140주년을 기념하고 한국과 러시아의 친선우호를 돈독히 하며 우리 민족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바이다.” 2004년 5월 9일 한인러시아이주140주년기념사업회가 세웠고 ‘대한민국 음악인’ 서태지가 헌정했다고 적었다. 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는 러시아가 주도하는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 옛 소련에서 독립한 국가들의 연합체를 말한다.

‘극동아시아 최초의 한인마을’ 1863년 정착설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 정부의 정치적인 조선인 우대책 등으로 조선인의 연해주 이주가 급증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주자들은 지신허를 중심으로 남으로는 하산에서 북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 등으로 퍼졌으며, 이주자들은 조선에서와 같은 비참한 생활은 벗어났고, 초기에는 자치권을 얻어 주류사회를 형성할 정도의 능력을 보여줬다. 연추의병부대 운영과 연해주의 모든 독립운동을 후원할 정도의 재력을 갖춘 최재형(崔才亨)이란 걸출한 인물이 날 정도였다. 최재형은 고려인들에게는 ‘항일운동의 영웅’으로 인식되고 있다. 9세 때인 1860년 연해주로 이주해 러시아 교육을 받고 성장하면서 부를 축적하고, 연해주 동포들에 대한 인권보호와 계몽 등에 힘썼다. 1920년 일제에 체포돼 살해당했다. 1962년에 우리 정부는 최재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녹둔도에서 발견된 비석은 비록 최재형 같은 인물은 아니더라도 일반인들도 나름대로 성공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의 기록은 이를 짐작케 한다. 비숍은 1894년 1월부터 1987년 3월 사이 조선을 4차례 방문한다. 이 기간 어느 해 겨울에 일본 나가사키에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포세트, 노보키에브스크(크라스키노), 얀치헤(연추리)를 둘러보고 이곳에서 두만강 하류까지 여행한다. 영국으로 돌아가 1897년 11월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란 책을 펴내며 이곳의 조선이주민에 관한 내용을 19장 ‘시베리아에 사는 조선의 이주민들’에 실었다. 비숍의 당시 조선에 대한 시각은 우리 상식과 다른 면이 많다. 그럼에도 연해주에 이주한 조선인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긍정적이다.

“이곳(노보키에브스크) 주변의 모든 농민은 조선 사람으로서 생활은 부유한 편이었다. 이곳에서 조선 국경 지역에 이르기까지의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의 대다수의 생활양태는 양호했으며 이주민 중의 일부는 러시아 군대에게 밀과 곡식을 납품함으로써 재산을 축적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 사람 이주민들은 중국인을 능가했다. 그들은 실제로 중국 만주에서 야윈 소를 사들여 살찌게 키워 팔았다. 조선에서 살고 있는 조선 사람에게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라 확실한 관계 당국자의 주장에 의하면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조선 사람들은 중국인들과의 야채시장의 경쟁에서 완전히 승리하여 이 도시의 상권을 장악했다고 한다.”

비숍은 연추리(얀치헤)도 들러 다음처럼 그렸다. “최상류층 가족이 거주하는 조선식 가옥이 이 마을 전체에 산재되어 있었다. 가장 큰 마을 중의 하나는 140가구가 750에이커 땅을 소유하고 있다. ...조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약하고 의심 많으며 위축된 농민들의 특징이 이곳에서는 솔직함과 독립심을 가진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었다.”

연해주 조선 이주민에 대해 비숍은 머리말 서두에 “시베리아(연해주)에서 내가 본 것처럼 조선 사람의 품성과 근면성은 장래에 그 민족에게 훌륭한 가능성이 기대된다는 점에서 나를 일깨워 주었다”고 총평했다.

지신허기념비를 뒤로 하고 2km쯤 내려오다 오른편에는 이곳에서 터를 잡고 살았던 이주민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집터다. 가로 10보폭, 세로 31보폭이다. 세 귀퉁이는 연자방아 윗돌로 주춧돌을 삼았다. 이 집터에서 모두 8개의 연자방아 윗돌을 확인했다. 이주민들이 1937년 강제이주당한 후 러시아인들이 자신들의 집을 지으면서 연자방아를 건축자재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주변에는 여전히 많은 연자방아가 널려 있다.

중지신허는 오명환 두만강개발공사 회장이 러시아정부로부터 임차해 조성한 사과밭이 있다. 중지신허와 하지신허에도 역시 연자방아가 무수하게 발견된다. 연해주 전역에 한인이주민들이 마을을 형성해 살았다는 확실한 증거는 역시 연자방아다. 연자방아의 무게는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DNA에 새겨진 묵직한 진취적 기상과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크게는 우리 민족이, 작게는 이주민(고려인)들이 삶의 뿌리를 내렸던 연해주의 현재 상황은 예전 같지 않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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