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 대마도는 우리땅

 

제목 :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5-04-05 조회수 : 692

 


 

 

- 국제사회 공식문헌을 중심으로 -

 

김 상 훈

 

 

금번 제 3회 이승만 포럼의 주제는 작년(2010년) 11월 26일 육군사관학교에서 개최되었던 한.일 군사문화학회 추계학술발표대회와 12월 7일 국회 대마도 정책포럼 특별강연에서 잇달아 발표된 논문 ‘국제사회가 공인(公認)한 대마도(對馬島) 영유권과 반환요구 타당성’ 중, 이승만 대통령과 관련된 사항을 중심으로 기술한 것입니다. 본 내용은 저작권 위원회에 등록되었으며 전체 내용은 출판될 예정입니다.

 

 

1. 연구의 배경과 요약

 

 

1907년 미국 죠지 워싱턴 대학 졸업 앨범에 청년 이승만 학생이 역사와 철학을 다루는 토론회에서 자주 연사로 강연했었다는 것과, 이 대학 도서관에서 발견한 이승만의 영문저서 『Japan Inside Out』에 나와 있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오래된 명확한 해상경계가 있다.’라는 언급을 기초로 건국 후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을 상대로 여러 차례 대마도 반환을 요구한 내용에 관심을 가지고 추적해 보았다.

 

1948년 8월 18일 대한민국 건국 3일 후 대통령은 첫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일본에 대마도를 한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대마도는 上島及下島(상도와 하도)의 二島(두섬)로 되어 한일 양국의 중간에 위치한 우리영토인데 삼백 오십년 전 일본이 탈취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9년 1월 8일 연두기자회견에서,

 

“대일 배상문제는 임진왜란 시부터 기산(起算;시작해서 계산)하여야 한다.

대마도는 별개로 하여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대마도가 우리 섬이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3백 5십년 전 일본인들이 그 섬에 침입하여 왔고 도민들을 민병을 일으켜 일본인과 싸웠던 것이다. 그 역사적 증거는 도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마도의 여러 곳에 건립했던 비석을 일본인들이 뽑아다가 동경박물관에 갖다 둔 것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비석도 찾아올 생각이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

 

 

 

< 1949. 1.8일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에서 대마도 반환을 요구한 이승만>

 

  

또, 1949년 12월 31일 대통령 연말기자회견에서 거듭 “대마도는 우리의 실지(失地)를 회복하는 것이다. 대마도문제는 대일 강화회의 석상에서 해결할 수 있으며, 일본인이 아무리 주장해도 역사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고 주장한다.

 

당시의 기사에서 보면 이승만은 일본으로부터의 대마도 반환에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었고, 중국 여론도 이를 지지하고 있었으며, 중국거주 우리 동포들이 이를 지원하는 대규모 시위를 하였음과, 다급해진 일본 수상이 일본 천황에게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과 관련 대마도 상황을 보고하는 와중에 대마도에 한국인이 실제 2천 명 정도 거주하고 있다는 일본 측 주장을 실은 언론기사들도 보도되고 있었다.

 

기사를 통해 우리 국민들도 다가오는 1950년을 실지를 회복하는 희망찬 한해가 될 것을 소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불과 6개월 뒤 벌어진 6.25 전쟁을 모르고....

 

 

 

<1949. 12.31일 대통령 연말 기자회견에서 대마도 반환이 실지회복 차원임을 강조한 이승만>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 내용을 근거로 당시의 국제적인 역사자료를 추적하여 수집하고, 이를 고증하여 마침내 일본이 1861년 2월과 1862년 4월 미국의 해리스(Harris)대사, 영국의 알코크(Alcock)대사 등 당시 열강의 대사들에게 제시한 다음의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 판’을 통하여 울릉도, 독도뿐 아니라 대마도도 우리영토임을 국제적으로 공인하였음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다음의 이 지도가 당시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동북아시아, 특히 우리나라와 일본주위의 섬 지역들을 점령해 들어오면서 국가별 영토를 획정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사용한 원본임을 증명하였다.

 

 

아울러 이렇게 사용한 결정적인 증거를 일본의 누가, 어떻게 은폐하고 대마도 관련 역사를 왜곡시켜 왔는지 그 일단을 밝혀보고 이승만 대통령은 이에 어떻게 대응해 독도를 지켜내고 대마도를 지켰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대마도, 독도가 모두 우리영토로 기술된 국제법상 공인지도인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 1832년 Klaproth제작>

 

2. 1862년 동북아시아 국제공인 영토지도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

 

앞의 지도는 일본인 임자평(하야시 시헤이; 林子平, 1738~93,일본 에도시대 경세론가)이 작성한 삼국접양지도라고 하는 지도로, 이의 해설서가 삼국통람도설인데 이는 당시 일본과 그 주위 3국인 조선국, 류쿠국(오끼나와), 하이국(북해도)과 무인도였던 오가사와라(소립원;小笠原, 일본 남부 태평양 1000km지점의 80여개 군도)제도에 대한 지도와 해설을 독일인 Klaproth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프랑스어 판 지도의 국제적 가치는 호사카 유지 교수의 일본어 논문(三國通覽與地路程全圖』と‘伊能島’の 中の 獨島. 독도 창간호, 영남대 독도연구소. 2008)과 다음 페이지의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문서에 잘 기술되어 있는데,

 

 

먼저, 호사카 유지 교수(세종대 독도연구센터 소장)는 당시 일본 정부가 이 지도를 국제공인지도로 활용했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본에 개국을 요구한 미국의 페리는, 오가사와라를 미국령으로 할 목적으로 이미 미국인을 군도에 살게 하였고, 이 사실을 들어 막부에 오가사와라를 미국령으로 인정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이에 대해 막부측은, 임자평의 ‘삼국통람도설’과 그 삽입지도인 ‘삼국통람여지노정전도(삼국접양지도)’를 제시하였는데, 이를 미국이 인정하지 않자, 그 프랑스어판을 제시하여 겨우 미국의 영유권 주장을 물리친 것이다. 이와 같이 임자평의 ‘삼국통람도설’과 그 삽입지도는 오가사와라의 영유권을 결정하는 사료로서 역사적으로 일본의 막부에 의해 활용되었던 것이다.

 

 

임자평이라는 한 개인에 의해 작성된 지도(삼국접양지도)와 그 해설서(삼국통람도설)이긴 하지만, 막부의 공인지도로서 사용된 이상, 그 시점부터 그것은 영유권을 주장한 막부의 공식지도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지도에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로 표기된 것과 관련하여 “결론적으로 오가사와라가 일본영토인 점을 국제법적으로 인정한 임자평의 ‘삼국통람도설’과 그 삽입 지도(삼국접양지도)는, 동시에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국제법적으로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임자평의 ‘삼국통람도설’과 ‘삼국통람여지노정전도(삼국접양지도)’ 만으로도 독도의 영토문제는 해결된다.”고 하였다.

같은 논리로, 같은 지도에 대마도가 조선영토로 되어 있다면 대마도의 영토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이제 그 지도의 원본이 위와 같이 발견된 것이다.

이 지도가 포함된 삼국통람도설이 일본과 미국의 영토분쟁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 하는 자료가 있다.

 

하단의 삼국통람도설 책자는 1786년 임자평이 작성한 원본이 아니고 그의 사후인 1924년 즉, 일제가 조선을 합병한 14년 뒤 대륙침략이 한창 무르익던 시기, 후대에 임자평의 위대함을 기리기 위해 발간된 것으로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조선총독부 도서관 소장 직인이 우 상단에 있었다.

 

좌측 위에 ‘光格天皇御叡覽’ 이라 쓰여 있는데 여기서 叡覽이라함은 과거 임금이 친히 열람한 경우에 붙이는 경어로서 당시 일본의 광격천황이 직접 열람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즉, 한사람이 만든 책을 당시 일본천황이 친히 열람할 정도로 매우 가치있고 귀중한 자료로 이 책은 후에 이를 기념하여 별도로 발행하였다는 뜻이다. 이 책 후기에는 매우 의미 있는 사항이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었다.

 

 

 

<1924년 일제하 발간된 일본천황열람 ‘삼국통람도설’과 後記의 미.일 영토협상기록 >

 

 

“삼국접양지도를 작성한 일본인 林子平을 막부말엽 일본제국의 대외 관계 수립 대 은인으로 칭송. 1853년 미국이 오가사와라(小笠原)를 발견하고 이를 미국 식민지화 하였으며 이 때문에 당시 막부정권이 곤경에 처했을 때 임자평이 출판한 삼국통람도설을 독일인(클라프로토;Klaproth)이 번역, 출판하였다는 것을 듣고 이를 구해서 증거물로 제출함으로써, 미국대사가 이를 인정하여 오가사와라를 일본에 영구 귀속 확정토록 하였음. 모든 일본인은 임자평 선생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함. 광격천황께 바쳐져서 원본을 친히 열람하셨음.” 조선총독부 도서관 직인.

 

위에 나타난 기록을 요약하면 프랑스어 판 삼국통람도설(삼국접양지도)은 영토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자료로 사용했고, 원본을 일본천황도 인정한 중요 자료였다는 것이다.

 

이 삼국통람도설(삼국접양지도)이 1860년대 미.일간의 오가사와라제도 영토 협상과 관련되어 어떻게 활용되었는가를 설명한 미국과 일본의 기록이 추가로 있다.

 

‘오가사와라 모험(The Ogasawara Venture; 1861~1863, Hyman Kublin 著, 1951년)이라는 미 하버드 아시아문제 연구소에서 발간한 논문과, ’유황도와 소립원도를 둘러싼 일미관계‘(硫黃島と小笠原をめぐる日米關係. Robert D. Eldridge, 대판대, 2008.8)라는 일본의 논문이다.

 

두 논문에 의하면, 일본을 강제 개항한 미 해군제독 페리는 1853년 미국인 Savory와 몇 명의 외국인이 살고 있던 무인도나 다름없는 이 제도에 미국포경선을 위한 저탄장을 설치하여 식민지화 하고 일본과 개항협상 시에는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공연히 언급함으로써 이 섬들에 관심 없던 일본막부정권에게 오가사와라를 알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1858년 미국은 일본에 자국 대사 해리스(Harris)를 파견하여 일본과 정식으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일본은 1860년 미국에 사절단을 보내게 된다.

 

막부는 사절단을 미국에 보내면서 왜 페리가 일본에 왔었는지 그 이유를 파악하라고 밀명을 내리게 된다. 이에 따라 미국을 방문하고 귀국한 일본 사절단은 페리가 미 상원에 제출한 아래의 ‘일본원정기(Narrative of Tthe Expedition of an America Squadron)'를 입수하여 첩보 보고한다.

보고서를 통해 페리의 일본 원정 목적중의 하나가 일본 남방 1000km 떨어진 오가사와라를 식민지로 한 것이었음을 확인한 일본 막부는 그간 버려졌던 오가사와라에 관심을 갖게 된다.

 

 

 

<1856년 페리가 미 의회에 제출한 일본원정기, Klaproth의 삼국통람도설에서 발췌하였음이 우측에 보임>

 

 

 이에 따라, 막부는 오가사와라에 우선 정찰단을 편성하여 오가사와라의 현황과 활용가치를 파악하게 되는 데 이 정찰단의 책임자로 다나베 다이치(田邊太一) 선발되고 이들은 1861년 정찰을 하게 된다.

 

그 이듬해인 1862년 정찰을 마친 다나베로부터 막부는 ‘오가사와라는 資源의 寶庫’라는 보고를 듣게 된다.

 

이 오가사와라를 미국으로부터 빼앗아 일본에 귀속시킬 결심을 한 막부는 일본 이주민단을 편성하여 오가사와라에 이주시키는 등 적극적인 정책을 펴면서 오가사와라가 자국의 영토임을 증명할 갖가지 자료를 찾다가 임자평의 삼국접양지도 일본어판을 제시하면서 오가사와라가 이 섬을 발견한 일본인 오가사와라(小笠原)의 이름에서 그 명칭이 유래된 것이라 하면서 자국영토임을 설득한다.

그러나 일본어 지도는 국제법적 공인을 할 수 없다는 미국(Harris)과 영국(Alcock) 등 강대국 대사들의 주장을 물리칠 방도를 찾지 못하다가 당시 유럽제일의 동양학자인 Klaproth가 번역한 임자평의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 판’을 제시하여 공인 받게 된다.

 

논문에는 후일 일본인들은 이때 대마도를 우리영토로 표기한 삼국접양지도를 처음 임자평과 이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국제공인지도로 만들어준 Klaproth를 일본에 ‘오가사와라를 안긴 은인(Benefactors)’으로 불렀다는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의 주장을 기록하고 있었다.

 

 

3. 대마도를 은폐한 일본의 지식인들은 누구인가?

 

일본은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고자 증거자료를 없애고 독도는 우리영토로 되어 있으나 대마도는 일본영토로 조작된 자료를 19세기부터 지금까지 다량 배포함으로써 우리를 기만해왔고 이 중 대표적인 것으로 판단되는 자료는 다음과 같다.

 

 

 

 

 

 

 

   

<독도를 우리영토로 기록하고 있다고 언론에 공개한 삼국접양지도 일어(좌),

불어(우) 세종대 호사카 유지교수 제시,

 

 

여기에 대마도는 일본영토로 표기되어 있거나 흑백사진으로 나타내 식별이 어렵게 되어 있다.>

<독도를 우리영토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으로 가수 김장훈 구입 기증,

 

여기에도 대마도는 일본영토로 표기되어 있다. 2008.9.22>

또,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거나 박물관에 소장된 일본어판 삼국접양지도들(Google에서 삼국접양지도 ‘이미지’클릭하면 확인가능), 심지어는 일본 극우단체가 제시한 프랑스어 판 삼국접양지도 조차도 모조품으로 판단되었다.

 

<일본 극우단체(日韓 近代史會)에서 제시하고 있는 모조 프랑스어판 삼국접양지도,

한국이 주장하는 것은 독도가 아닌 울릉도라고 하면서 대마도가 일본령인 것을 표기.>

 

 

필자는 삼국접양지도와 함께 수록된 조선팔도지도 원본(대마도가 우리영토로 다음과 같이 표기, 임자평 서명)도 일본 동북대에서 찾아내었는데 일본정부는 이 지도를 일본천황이 인정한 1788년부터 1873년 10월 이전까지 최소한 85년간 우리영토를 식별하는 공식지도로 활용해왔다.

 

 

 

<日本 東北大에서 발견한 ‘조선팔도지도’ 원본, 우리영토 대마도 표기, 우하단 임자평 서명>

 

 

시중이나 기존 박물관 등에 전시 중인 대마도가 일본령으로 표기된 아래와 같은 조선팔도지도들 역시 모조품이거나 필사본인 것으로 판단되었다.

 

 

<美 하와이대(좌)와 日 와세다대(우)의 ‘조선팔도지도’ 대마도 일본령 표기, 우하단 임자평 서명>

 

 

일본은 프랑스어 판 지도로 미국, 영국 등 제 외국 대사와 직접 협상하여 일본의 영토를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후, 메이지 유신 후 군국주의화 하면서 이를 은폐하기 시작한다.

 

이제 이들 일본 지식인들이 일제 강점기와 해방이후 지금까지 어떻게 대마도 관련 역사를 왜곡하고 은폐해 왔는지, 그리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지 기록을 통해 설명해 보겠다.

<일본 센다이(仙臺)시 공원에 있는 임자평 동상>

 

 

삼국접양지도를 처음 만든 것은 임자평(林子平 ; 하야시 시헤이)이다.

임자평은 일본이 해상국가로서 해상방위를 튼튼히 해야 하며 일본 주위의 무인도를 확실히 일본의 영토로 할 것을 주장하고 조선을 정벌하여 국가방위의 영역을 확대할 것을 주장, 소위 征韓論의 타당성을 역설하는 시조역할을 하게 되고 후일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는 대동아 공영권 사상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는 자로 일본 중등학교 교과서에도 선각자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임자평이 만든 삼국접양지도와 조선팔도지도는 그가 활약하던 센다이(仙臺)에 와 있던 네델란드 선원들로부터 위도, 경도, 축척 등 지도제작 방법을 전수받고 국가별로 색깔, 위도, 경도, 거리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제작한 것이다.

 

이 임자평의 지도 1부가 Issac Titsingh이라는 일본거주 네델란드 인에 의해 프랑스의 Klaproth에게 전해지고 Klaproth는 이를 소지하고 아시아지역을 1810년부터 1820년까지 현지를 정찰하면서 확인 후 프랑스어 판을 출판하여 유럽에서 당대 제 1의 아시아 학자가 되는데 앞에서 제시된 지도가 그 원본이다.

 

다음 페이지 도표에서 보듯, 대마도가 우리영토로 표기된 임자평의 삼국접양지도를 직접 읽어보고 잘 그렸다고 칭찬한 사람은 지금도 일본에서 천황들 중에서 가장 박학다식한 천황 중의 한명이라고 소개되고 있는 현 일본왕의 5대 조부인 光格天皇이다.

 

<일본 119대 광격천황, 明治의 조부요 현 日王의 5대 조부>

 

 

 

임자평의 삼국접양지도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유럽에서 동양학자로 명성을 올린 자가 Julius Klaproth이며 이 지도를 국제공인지도로 하여 미국, 영국 등 제외국의 대사와 1861년과 1862년 협상을 한 자는 위에서 언급한 다나베 다이치이다.

 

 

 

<대마도 은폐와 관련된 대표적인 3명의 일본 지식인 : 다나베 다이치, 이토 히로부미, 다보하시 키요시 >

 

<다나베 다이치(田邊太一)>

 

 

 

다나베는 1862년 미국,영국 대사등과 오가사와라를 일본영토로, 대마도, 울릉도, 독도를 우리영토로 공인한 영토 협상을 마치고 그 이듬해인 1863년 주 프랑스 초대 대사로 파리에 부임하게 된다.

Klaproth가 프랑스에서 발간(기록에는 수십 부 ; Dozens of Copys, 서정철 외국어대 명예교수는 50부 주장)한 삼국접양지도로 영토협상을 하여 그 위력과 효과를 실감한 다나베는 협상 후 부임지 파리 현지에서 대마도가 우리영토로 표기된 이 지도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다나베는 불과 7개월 후 일본으로 복귀하고 이어 1867년 재차 프랑스대사로 복무하게 된다. 그 이듬해인 1868년 대마도 귀속을 앞둔 일본 막부가 계획적으로 대마도가 우리영토로 기록된 Klaproth 지도 원본을 모두 수거 또는 파기하라는 밀명을 사전에 내려 이를 수행하기위해 다나베가 프랑스로 가지 않았는가를 유추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 프랑스어판 원본이 발견되지 않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다나베는 귀국하여 그 후 일본 외부성 국장을 거쳐 외무대신에 이르게 된다. 이 다나베는 외무부 국장시절 ‘松島(독도)는 일본인이 명명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울릉도에 속하는 于山이다... 지금 이유없이 사람을 보내어 순시하는 것은 남의 보물을 조사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독도가 우리영토임을 사실상 인정하는 발언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다나베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강화도조약이 맺어지기 2년 전인 1874년 4월 초대 기록국장 心得으로 취임함으로서 외무성의 수뇌부로 부상하고 외교에 관계된 외무성내외의 중요문서에 대한 정리, 편찬뿐 아니라 분류, 보존과 공간 등의 업무를 총괄함으로써 통신편람에 이어 속 통신편람을 편찬하는데 기반을 닦아놓았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직후 수신사로서 일본을 방문했던 김기수는 다나베에 대해 “외국의 학문을 잘 알고 세계에 가보지 않은 데가 거의 없다고 하였다.”는 평가를 내렸던 적이 있다.

 

다나베에 관한 연구는 우리학자의 논문(메이지초기 일본외무성관리 다나베 다이치의 울릉도, 독도인식. 한철호; 2008.3)에서 잘 분석되고 있는 바, 독도에 관한 다나베의 위 발언은 다나베가 국제공인 영토지도 프랑스어 판 삼국접양지도 원본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본다.

 

두 번 째 인물이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이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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