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지역 영유권

 

제목 : 백두산정계비와 간도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7-09-05 조회수 : 80

 

(간도문제) 조선과 중국의 국경이 토문강? 백두산 정계비/간도

2009.09.05.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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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킨뒤 만주족들은 중국 대륙을 지배하기 위해 대대적인 이주를 실시합니다.    뭐 실시한 것 까지는 좋았지만, 필연적으로 만주지역은 텅비게되죠....

 

이게 문제가 되자 1653년 요동초민개간조례(遼東招民開墾條例) 를 반포하고, 사람들이 요동 일대로 와서 땅을 개척하도록 장려하는 정책을 발표합니다.    그런데, 이게 예상치 못한 문제를 일으키죠...  워낙 만주족 이외의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서 만주족 전통을 훼손할 지경이 되자, 청국 정부는 1662년 <영고탑 등지에서 유민 금지 조례>를 반포하고 1669년에는 1653년에 반포했던 요동초민개간조례(遼東招民開墾條例)를 폐지해 버립니다.

 

이 기간중에 청의 순치제(1638~1661)는 한족의 만주이주를 막기위해 버드나무로 아주 긴 울타리를 세웠습니다.   이 울타리는 사람 키를 조금 넘길 듯하게 버드나무를 엮은 모습이었고, 울타리 앞에는 다시 호를 파서 사람의 접근을 금지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현재의 우리는 유조변(柳條邊)이라고 부릅니다.

유조변이 세워진 위치는 다음의 지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유조변 지도)

Qing Willow Palisade (청대의 유조변 - 녹색선)
(Qingdai Liu-tiao-bian 淸代柳條邊 楊樹森, 遼寧省: 人民出版社, 1978)

 

참고) 유조변 http://blog.naver.com/cms1530/10027131897


이어서 1676년에는 요녕과 길림은 나라의 대업을 이룩한 곳이므로 유민들이 들어가는 것을 영원히 금지한다는 칙령을 내립니다.   유조변에는 무장병력을 배치해서 한족들이 만주지역으로 넘어오는 것을 막고 있었습니다.

유조변을 세우고 팔기로 하여금 출입을 못하게 틀어막게되자, 또다시 이 지역은 무주공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조선인들이 슬금슬금 넘어왔던 거죠.....

이 시기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강'을 넘어 땅을 개간한 조선인이나 삼을 캐러 국경을 넘은 조선인을 처벌하라는 중국 사신의 요구를 받고 골머리를 앓거나 범죄자들을 극형에 처하는 장면이 수도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냥 '강'이라고 하면, 또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사람이 분명히 있겠지만, 이 당시 중국과 조선의 국경은 분명히 압록강-두만강 line 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아래 기록을 보죠...

 


숙종 31권, 23년(1697 정축 / 청 강희(康熙) 36년) 5월 18일(정유) 2번째기사
영중추부사 남구만이 《성경도(盛京圖)》라는 지도를 바치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남구만(南九萬)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신이 선조(先朝)에서 근신(近臣)으로 입시(入侍)하였었는데, 재신(宰臣)이 일을 아뢰고 인해서 말하기를, ‘심양(瀋陽)에서 영고탑(寧固塔)으로 가려면 길이 매우 험하고 멀지만, 만약 우리 나라의 서북(西北)의 변경을 거쳐서 간다면 매우 가까우니, 피중(彼中)에서 만약 급박한 변고가 있어 옛날에 살던 땅으로 되돌아 가려고 하면 틀림없이 돌아가는 길을 버리고 질러가는 길로 나아가면서 우리 나라의 서북 변경을 짓밟으려 할 텐데, 조정에서는 더욱 유의하여 미리 방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신미년9259) 사이에 피중에서 백두산(白頭山)의 그림을 그리겠다고 말을 하면서 아울러 다섯 명의 사신을 보내어 우리에게 길을 빌리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위로는 조정에서부터 아래로는 하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피중에서 틀림없이 급하게 옛날 살던 지역으로 돌아가야 할 일이 생겨 이렇게 백두산을 그린다고 핑계를 대지만 실제로는 도로를 엿보려는 일이라고 여기고 시끄럽게 떠들며 어수선하여 금지시킬 수 없었습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의 서북 두 곳의 변경은 겹쳐진 산봉우리와 깊은 골짜기에 험하고 좁은 길이 하늘에 달려 있는 듯하니, 심양(瀋陽)과 영고탑(寧固塔)의 사이가 틀림없이 이보다 험하거나 이보다 멀 이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대명일통지(大明一統誌)》의 요동 도사(遼東都司)가 관찰하는 곳은 기재한 것이 매우 간략하여 황복(荒服) 밖의 여러 위(衞)의 경우는 확실히 지적하여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작년 봄에 사신으로 연경(燕京)9260) 에서 돌아온 자가 있었는데, 돌아오던 중 인가(人家)에서 새로 지은 《성경지(盛京誌)》를 얻어 보았으나 사행(使行) 중에 값을 치를 돈이나 물건이 없어 사오지 못했다고 말하였습니다. 성경(盛京)은 바로 옛날의 심양(瀋陽)이며 청나라 사람이 처음 요동(遼東)을 얻었을 때에 도읍으로 정했던 곳이니, 거기에 대하여 기록을 틀림없이 상세하게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신이 감히 경연(經筵) 가운데서 진청(陳請)하여 사오도록 하였었는데, 금년 봄의 사행(使行)이 과연 한 본(本)을 구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예람(睿覽)을 거쳐 비국(備局)에 내렸는데, 신이 처음으로 거기에 기록된 역참과 길을 상고하여 보니, 심양의 동북(東北)에서 오랄(烏剌)까지는 8백여 리이며, 오랄의 동남(東南)에서 영고탑(寧固塔)까지는 4백여 리인데, 이 길은 오랄을 거치도록 설치하였기 때문에 앞에는 북쪽을 향하게 하고 뒤에는 남쪽을 향하게 하여 매우 멀리 도는 듯하며, 합해서 계산해 보면 그래도 1천 3백 리가 됩니다. 만약 심양에서 질러가는 길을 취하여 곧바로 동쪽으로 영고탑을 향하여 간다면, 또한 틀림없는 1천 리는 되겠지만 가깝기는 합니다. 설령 청나라 사람들이 정말로 급하게 돌아가야 할 일이 있었다면, 이러한 지역 내의 익숙한 가까운 길을 버려두고 다른 나라의 한 번도 지나가 보지 않은 먼길을 빌린다는 것은 실제로 이치나 형세로 보아 반드시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성경지(盛京誌)》 중에 기재된 조그마한 그림을 가져다 그것을 넓혀서 큰 폭으로 만들어 거기에다 이수(里數)를 긋고 산천(山川)·주현(州縣)·참로(站路)의 이름을 갖추어 기재하였으며, 또 그림 아래 역대(歷代)의 연혁(沿革)과 지금 설치한 관청을 대략 기록하여 두루마리로 싸서 붙여 두었습니다.
 
신(臣)이 여기에서 또 그윽이 느낀 바가 있습니다. 대체로 두만강(豆滿江) 북쪽은 지금은 비록 다른 지역이 되었지만 실로 이곳은 우리 목조(穆祖)·익조(翼祖)께서 임금을 탄생하게 한 곳이니, 주(周)나라에 비교하면 바로 불굴(不窋)9261) 이 스스로 융적(戎狄) 틈으로 도망한 것과 고공(古公)9262) 이 도혈(陶穴)에서 살았던 것과 같습니다. 지금 두만강 북쪽인 알동(斡東)과 해관성(奚關城) 사이는 옛날 덕릉(德陵)9263) 과 안릉(安陵)9264) 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만하며, 그 곳에는 철룡(鐵龍)이 산에 묻히고 백마(白馬)가 물을 건넜다는 고사는 변방의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이야기로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북쪽을 바라보시며 깊은 지혜로 길이 발현하게 한 상서로움에 대하여 틀림없이 추모하며 깊이 생각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요동(遼東) 왼쪽에 이르서서는 처음에는 바로 기자(箕子)가 봉지(封地)로 받은 지역이며, 개원현(開原縣)은 바로 옛날의 부여국(扶餘國)이며,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 주몽(朱蒙)이 나라를 세운 곳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개평현(盖坪縣)은 바로 진한(辰韓)의 옛 지경인데, 역시 우리 삼한(三韓)의 하나입니다. 일찍이 고구려가 융성할 때에는 요동 일대와 여진(女眞)에 속한 것들이 거의가 모두 지경 안에 속해 있으며, 이 때문에 해동(海東)의 강국(强國)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끝에 이르러서는 임금과 신하가 도리를 잃어, 강토는 수(隋)나라와 당(唐)나라에게 침략을 받아 줄어들었고, 백성들은 양자강(揚子江)과 회수(淮水) 지역으로 옮겨가는 등, 정벌을 당하여 멸망되어서 다시는 남은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는데, 그 흉하고 망하며 번성하고 쇠퇴하던 시기와 병탄(倂呑)하고 분열(分裂)되었던 자취가 모두 이 그림 한 폭 가운데 기재되어 있으니, 또한 개연(慨然)히 탄식을 일으키며 출연(怵然)히 두려움을 생각하게 하는 도구가 되기에는 충분합니다. 압록강과 두만강 두 강의 근원이 모두 백두산 꼭대기에서 출발하여 동서(東西)로 나뉘어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나라의 계한(界限)입니다. 때문에 지금 이 성경도(盛京圖)에도 이렇게 조선(朝鮮)의 경계를 두 강의 남쪽으로 쓴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쇠약한 형세와 조잔하고 피폐한 힘을 돌아다 볼 때 늠름(凛凛)하게 스스로 보전하지 못할 근심이 있는데, 기자(箕子)의 옛 강토와 목조(穆祖)·익조(翼祖)가 옛날에 살던 곳을 회복하는 데 대해서는 진실로 감히 망령되게 의논하지 못하지만, 심지어 피중(彼中)의 도적(圖籍)에 기록한 바 우리 나라의 지경으로 여기는 부분에 대해서도 감히 구역을 나누어서 지키며 여러 곳에 주진(州鎭)을 설치하여 거듭 강토를 견고하게 하는 법을 삼는 것마저 엄두를 내지 못하고 내버려 두고 있어, 사람이 살지 않는 수풀 뿐인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단지 인삼(人蔘)을 캐는 간사한 백성으로 하여금 몸을 숨기고 자취를 감추며 들락날락 오가며 마음대로 국경을 넘는 죄를 범하여도 누가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논하는 자는 단지 그곳에다 채운 백성들이 국경을 넘는 죄를 범하는 것만 염려할 뿐, 땅을 비워두는 것이 국경을 넘는 죄를 범하는 것보다 더 심한 잘못이 되는 줄을 모르니, 신은 참으로 한스럽게 여깁니다.
 
거듭 기근이 든 나머지 공용(公用)과 사용(私用)이 모두 곤궁하게 떨어진 때를 당한 지금 진(鎭)을 옮기고 고을을 설치하는 것은 진실로 경솔하게 거론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무산(茂山)의 서쪽인 박하천(朴下遷)·천평(天坪)과 강계(江界)의 동쪽이며 자성(慈城)의 서쪽인 해평(海坪) 등지는 더욱 기름지다고 일컬어지므로, 생업을 잃은 백성들이 그곳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가 매우 많다고들 합니다. 우선 그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한 변장(邊將)에게 들어가기를 원하는 백성을 거느리고 개간(開墾)을 주관하도록 해서 가난한 백성을 편안히 거주하게 하며, 또 토지를 개간하고 곡식을 저축하는 계획을 삼아 점차로 개척(開拓)하는 계책을 세우되, 규모(規模)를 일정하게 하여 흔들리게 하거나 침탈당하는 바가 없으면, 방수(防守)하고 연락(聯絡)하는 형세가 여러 해 되지 않아서 이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그 전에 선조(先朝) 때에 북관(北關)9265) 을 다스리는 명을 받고 변방을 순찰하였으므로, 이런 등등의 형세를 대략 알고 소(疏)를 봉하여 올리면서 겸하여 지도를 바쳤더니, 선대왕(先大王)께서 신의 어리석은 견해를 굽어 채택하시어 그 곳에다 시설(施設)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에, 북쪽에서는 무산(茂山) 등 세 진보(鎭堡)를 설치하고 서쪽에는 후주(厚州)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계해년9266) 에 병조 판서에 임명되면서 또 자성(慈城) 등지에다 변장(邊將)을 설치하도록 청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 겨우 설치하였다가 도로 혁파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을축년9267) 에 국경을 넘어가는 죄를 범한 일이 발생한 것을 인하여 조정의 의논이 무산(茂山)과 후주(厚州)를 아울러 혁파하려고 하므로, 신이 그것을 혁파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극력 말하였으나, 이해(利害)를 지목하여 진달한 것이 명백하지 못하여 마침내 후주는 혁파되었고, 무산은 다행히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 들으니, 육진(六鎭) 여러 곳에 해마다 흉년이 들었지만 유독 무산만은 언제나 풍년이 들어 다른 고을에서도 그 영향을 의뢰하고 있으며, 심지어 국경을 넘어가는 죄를 범하여 사건을 발생시키는 경우도 다른 곳에서는 자주 들리지만 무산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발생하지 않은 것은 비록 다행이기는 합니다만, 국경을 넘어가는 죄를 범하는 근심이 반드시 새로 설치한 곳에서만 걱정거리가 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신은 나이 많고 병이 심하여 죽을 날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이에 지도 올리는 것을 인하여 상세하게 말하는 것이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卿)의 차자(箚子) 내용을 살펴보고 잇따라 지도를 살펴보매, 그 국가를 위하여 깊고도 멀리 염려하는 정성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내 마음에 매우 가상하게 여기며 기쁘게 생각한다. 더욱 자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차자 원본을 비국에 내려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숙종 38권, 29년(1703 계미 / 청 강희(康熙) 42년) 4월 4일(기묘) 4번째기사
주청사의 행차로 돌아오다가 의중 중강에서 익사한 역졸들을 우휼하게 하다

 

주청사(奏請使)의 행차가 돌아오다가 의주(義州) 중강(中江)에 이르러 역졸(驛卒) 다섯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 임금이 이를 듣고는 놀라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역졸이 비록 미천할지라도 만 리 길을 왕복하여 겨우 우리 우리 국경에 이르러 뜻밖에 물에 빠져 죽었으니, 진실로 불쌍히 여길 만하다. 압록강이 어찌 패선(敗船)할 곳인가? 그런데도 본부(本府)에서 썩은 배로 사람을 건너다가 이런 사고를 초래하였으니, 부윤(府尹) 홍숙(洪璛)을 먼저 파면한 후에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이어 본도(本道)에 명하여 빠져 죽은 사람을 우휼(優恤)하게 하였다.
 

 

 

숙종 35권, 27년(1701 신사 / 청 강희(康熙) 40년) 5월 14일(경자) 3번째기사
함경 북도 병사 홍하명이 두만강 서쪽의 강물 범람의 대책에 관해 장계

 

함경 북도 병사(兵使) 홍하명(洪夏明)이 장계를 올리기를,
 
육진(六鎭)은 오랑캐의 땅과 두만강(豆滿江)을 경계로 하여 그들은 강의 동쪽에 있고, 우리는 강의 서쪽에 있는데,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아서 강물이 장마로 인하여 붇게 되면 물이 서쪽으로 밀려서 갈래가 집니다. 그리하여 본래 흐르던 갈래는 점점 물이 적어지고, 새로 생긴 갈래는 점점 물이 많아져서 경흥부(慶興府)의 가장 가까운 강변(江邊)이 물결의 충격으로 언덕이 붕괴되니, 그 형세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갈라진 물을 감하여 물을 옛길로 돌리려고 한다면, 비록 도민(道民) 전체의 힘을 동원시킨다 하더라도 또한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피해가 더욱 심한 곳에다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를 꽂아서 울타리 같은 모양을 만들고 그 안쪽으로 토석(土石)을 메운다면, 느릅나무와 버드나무가 뿌리를 내리게 되어 서로 연결되어 버티는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하책(下策)에 불과합니다마는 구급(救急)하는 방도를 강구(講求)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이 일을 비국(備局)에 내리도록 하였다.

 

 

이상의 기록들을 보더라도,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질 무렵 중국과의 국경은 분명히 압록강-두만강 line인 것입니다.

 


1712년 청의 예부는 국경을 명확하게 할 목적으로 공문을 보내는데, 그 내용을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해 8월에 태학사(太學士) 온달(溫達) 등이 아뢰어 성지(聖旨)를 받들어서 금년에 목극등(穆克登) 등이 봉성(鳳城)에서 장백(長白)에 이르러 우리의 변경(邊境)을 답사(踏査)하려 하였으나, 길이 멀고 물이 큼으로 인하여 곧장 그곳에 이름을 얻지 못하였다. 명년 봄 얼음이 풀리는 때를 기다려 따로 사관(司官)을 차견(差遣)하여 목극등과 함께 의주(義州)에서 작은 배를 만들어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되, 만약 능히 전진(前進)하지 못한다면 곧장 육로(陸路)로 토문강(土門江)으로 가서 우리의 지방을 답사키로 한다. 다만 우리의 변지(邊地)가 도로(道路)가 요원(遼遠)하고 지방이 매우 험준(險峻)하여서, 만일 중로(中路)에 막힘이 있다면, 조선국(朝鮮國)으로 하여금 차츰 조관(照管)16020) 케 하여야 하니, 이 정유(情由)를 해부(該部)에서 조선국에 효유(曉諭)하라

 
여기 목극등(穆克登)이 바로 문제의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사람입죠.....

 

 


숙종 51권, 38년(1712 임진 / 청 강희(康熙) 51년) 5월 23일(을사) 1번째기사
접반사 박권이 백두산 정계의 일에 대해 치계하다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이 치계하기를,
 
“총관(摠管; 게시자주- 목극등)이 백산(白山)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압록강(鴨綠江)의 근원이 과연 산 허리의 남변(南邊)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境界)로 삼았으며,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고개 위에 비(碑)를 세우고자 하며 말하기를, ‘경계를 정하고 비석을 세움이 황상(皇上)의 뜻이다. 도신(道臣)과 빈신(貧臣)도 또한 마땅히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겨야 한다.’고 하기에, 신 등은 이미 함께 가서 간심(看審)하지 못하고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김은 일이 성실(誠實)하지 못하다.’는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하였다.

 

이 때 세워진 정계비와 분수령의 위치는 아래 대동여지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대동여지도 - 백두산부분 확대

 

 

 

청나라 사신 목극등은 제 딴에는 청나라에 유리하게 국경을 결정할 생각을 가지고,  조선 관리들을 따돌리고  구색맞추느라 쫄병들 몇 명만 데리고 가서 제멋대로 정계비를 세웁니다.   마치 조선관리와 합의하에 세운것 처럼 조선관리들의 이름도 이 비석에 새겨 넣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져 버렸지만, 이 비석의 내용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대청

 
오라총관 목극등은 (황제의) 명을 받들어 변경을 조사했다.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다. 
그러므로 분수령 위에 돌을 새겨 기록으로 삼는다.
강희 51년 5월 15일

 

 

 

 

그런데, 조선과의 경계를 분명하게 할 목적으로 파견된 청나라 사신 목극등이 병신짓을 한게 발견됩니다.

 

 

숙종 52권, 38년(1712 임진 / 청 강희(康熙) 51년) 12월 7일(병진) 3번째기사
백두산 정계가 잘못된 것에 대한 겸문학 홍치중의 상소. 이에 대한 논의와 거산 찰방 허양의 공술 내용

 

이때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선부(李善溥)가 백두산(白頭山)에 푯말 세우는 역사(役事)를 거의 다 끝냈다는 뜻으로 계문(啓聞)하였다. 겸문학(兼文學) 홍치중(洪致中)이 일찍이 북평사(北評事)로서 푯말을 세우던 초기에 가서 살펴보고, 상소하여 그 곡절을 진달하기를,
 
“신(臣)이 북관(北關)에 있을 때 백두산의 푯말 세우는 곳을 살펴보았습니다. 대저 백두산의 동쪽 진장산(眞長山)안에서 나와 합쳐져 두만강(豆滿江)이 되는 물이 무릇 4갈래인데, 그 중에 가장 남쪽의 네번째 갈래는 곧 북병사(北兵使) 장한상(張漢相)이 가장 먼저 가서 살펴보려 하였다가 빙설(氷雪)에 막혀 전진(前進)하지 못한 곳입니다. 그 북쪽의 세번째 갈래는 곧 북우후(北虞候) 김사정(金嗣鼎) 등이 추후(追後)로 간심(看審)한 곳이고, 그 북쪽의 두번째 갈래는 곧 나난 만호(羅暖萬戶) 박도상(朴道常)이 청차(淸差)가 나왔을 때 도로(道路)에 관한 차원으로서 따라갔다가 찾아낸 것입니다. 그 가장 북쪽의 첫번째 갈래는 수원(水源)이 조금 짧고 두 번째 갈래와 거리가 가장 가깝기 때문에 하류(下流)에서 두번째 갈래로 흘러 들어 두만강의 최초의 원류(源流)가 된 것이고, 청차가 가리키며 ‘강의 원류가 땅속으로 들어가 속으로 흐르다가 도로 솟아나는 물이라.’고 한 것은 첫번째 갈래의 북쪽 10여 리 밖 사봉(沙峰)밑에 있는 것입니다. 당초 청차가 백두산에서 내려와 수원(水源)을 두루 찾을 때 이 지역에 당도하자 말을 멈추고 말하기를, ‘이것이 곧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이라.’고 하고, 다시 그 하류를 찾아보지 않고 육지(陸地)로 해서 길을 갔습니다. 두 번째 갈래에 당도하자, 첫번째 갈래가 흘러와 합쳐지는 것을 보고 ‘그 물이 과연 여기서 합쳐지니, 그것이 토문강의 근원임이 명백하고 확실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 이것으로 경계(境界)를 정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이 여러 수원의 갈래로 경계를 정하게 된 곡절의 대략입니다.
 
신(臣)이 여러 차사원(差使員)들을 데리고 청차가 이른바 강의 수원이 도로 들어가는 곳이란 곳에 도착하자, 감역(監役)과 차원(差員) 모두가 하는 말이 ‘이 물이 비록 총관(摠管)이 정한 바 강의 수원이지만, 그때는 일이 급박하여 미처 그 하류(下流)를 두루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푯말을 세우게 되었으니 한 번 가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허(許)와 박(朴)【거산 찰방(居山察訪) 허양(許樑)과 나난 만호(羅暖萬戶) 박도상(朴道常)이다.】 두 차원을 시켜 함께 가서 살펴보게 했더니, 돌아와서 고하기를, ‘흐름을 따라 거의 30리를 가니 이 물의 하류는 또 북쪽에서 내려오는 딴 물과 합쳐 점점 동북(東北)을 향해 갔고, 두만강에는 속하지 않았습니다. 기필코 끝까지 찾아보려고 한다면 사세로 보아 장차 오랑캐들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 만약 혹시라도 피인(彼人)들을 만난다면 일이 불편하게 되겠기에 앞질러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청차(淸差)는 단지 물이 나오는 곳 및 첫 번째 갈래와 두 번째 갈래가 합쳐져 흐르는 곳만 보았을 뿐이고, 일찍이 물을 따라 내려가 끝까지 흘러가는 곳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본 물은 딴 곳을 향해 흘러가고 중간에 따로 이른바 첫 번째 갈래가 있어 두 번째 갈래로 흘러와 합해지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가 본 것이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인 줄 잘못 알았던 것이니, 이는 진실로 경솔한 소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미 강의 수원이 과연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청차가 정한 것임을 핑계로 이 물에다 막바로 푯말을 세운다면, 하류(下流)는 이미 저들의 땅으로 들어가 향해간 곳을 알지 못하는데다가 국경의 한계는 다시 의거할 데가 없을 것이니, 뒷날 난처한 염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臣)이 여러 차원들과 함께 상의하기를, ‘이미 잘못 잡은 강의 수원을 비록 마음대로 우리가 변경할 수는 없지만, 하류가 어떠한지는 논할 것 없이 물의 흐름이 끊어진 곳 이상은 진실로 마땅히 푯말을 세우는 안이 되어야 하니, 먼저 비(碑)를 세운 곳에서부터 역사를 시작하여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되, 나무가 없고 돌만 있으면 돌로 쌓아 돈대를 만들고 나무만 있고 돌이 없으면 나무를 베어 목책(木柵)을 세우기로 한다. 오늘날 조정의 명령이 당초부터 한 차례 거행으로 역사를 마치려는 뜻이 아니었으니, 빨리 마치려고 하지 말고 오직 견고하게 하기를 힘쓰되 이른바 물이 나오는 곳에까지 이르지 아니하여 우선 역사를 정지하고 돌아간다. 강의 수원을 변통하는 것에 있어서는 서서히 조가(朝家)의 의논이 결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내년 역사를 계속할 때 진퇴(進退)하는 바탕으로 삼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더니, 차원들이 모두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뒤에 들으니, 허양(許樑) 등이 미봉(彌縫)하는 데만 급급하여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목책을 두 번째 갈래의 수원에다 대놓았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목책이 끝나는 곳은 바로 국경의 한계가 나누어지는 곳입니다. 두 나라의 경계를 정하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한 두 차원의 뜻만으로 조정에서 알지도 못하는 물에다 강역(疆域)을 제멋대로 정했으니, 이는 마땅히 징치(懲治)하여 강토에 관한 일을 중히 여김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강의 수원에 관한 한 가지 일은 또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보다 좋은 대로 잘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이유(李濡)가 연석(筵席)에서 아뢰기를,
 
목차(穆差; 목극등)가 정한 수원(水源)은 이미 잘못된 것인데, 차원들이 감사(監司)에게 말하지도 않고 평사(評事)의 지휘도 듣지 아니한 채 멋대로 푯말을 세웠으니, 일이 지극히 놀랍습니다. 청컨대 잡아다 추문(推問)하고, 감사도 또한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형조 판서 박권(朴權)이 아뢰기를,
 
“홍치중의 상소에 보건대, 수원(水源) 중에 최초의 한 갈래는 곧 목차가 정한 것인데, 이번에 세우는 푯말은 안쪽으로 거의 20리 가량 옮겨 세웠다고 했습니다. 만일 뒷날 그들이 와서 보고 멋대로 옮긴 까닭을 묻는다면 무슨 말로 답하겠습니까. 목차가 정한 물이 비록 북쪽으로 뻗어나갔다 해도 진장산(眞長山) 밖을 굽어 돌아 흘러내려 가는 것인 듯하고, 그 사이의 연무(延袤)16360) 가 비록 넓다 하지만 이미 목차가 정한 것이니 이대로 한계를 작정해도 진실로 해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끝내 과연 북쪽으로 뻗어나가 두만강에 속하지 않는 것이라면 목차에게 말을 전하되, ‘당초에 정한 것은 잘못 안 것 같다.’고 한다면, 그들이 마땅히 답변하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이유가 아뢰기를,
 
“그들이 이미 경계(境界)를 정하고 돌아간 뒤 이러한 잘못이 있음을 우리 쪽에서 발단(發端)하여 그들을 견책(譴責)받게 하는 것은 또한 불편한 데 관계됩니다. 우선 목차에게 연유를 묻고 답변을 얻어 본 다음에 요량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겠는데, 시급하게 다시 간심(看審)하지 않을 수 없으니, 도내(道內)의 수령(守令)들 중에서 일을 잘 아는 사람을 차원(差員)으로 택정(擇定)하여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본도(本道)로 하여금 다시 가서 자세히 살펴보고 계문(啓聞)하도록 하였다. 이유가 또 청하기를,
 
“접반사(接伴使) 또는 감사(監司)가 데리고 간 군관(軍官) 중에서 한 사람을 가리고, 선전관(宣傳官)과 무신(武臣) 중에서 또 한 사람을 가려 보내어 차원들과 함께 간심(看審)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 뒤 이유(李濡)가 또 연석에서 아뢰기를,
 
“청컨대 감사(監司)의 군관 조태상(趙台相)에게 명하여 무산 부사(茂山府使) 민제장(閔濟章)과 함께 그 고장 사람을 데리고 함께 가서 수원(水源)을 자세히 살펴보게 하소서.”
 
하고, 좌참찬(左參贊)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북병사(北兵使)가 전관(專管)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마는, 만일 경관(京官)을 보내려고 한다면, 조태상으로는 사체가 중대해지지 않을 듯합니다.”
 
하고, 한성군(韓城君) 이기하(李基夏)는 아뢰기를,
 
“문관(文官) 재상(宰相)을 가려서 보내야 사체가 더욱 중요해집니다. 북병사 이택(李澤)은 늙어 험한 곳을 다니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문신(文臣) 중에 당상관(堂上官)을 가려서 보내라고 명하였다. 우참찬 김진규(金鎭圭)가 상소하여 조신(朝臣)을 차출하여 보냄은 불가하다고 논하였는데, 이르기를,
 
“물이 땅속으로 흐르고 있는 곳에 푯말을 세움은 목차(穆差)가 앞서 한 말이 있으니 비록 우리 편의 관원이 단독으로라도 할 수 있습니다마는, 수원의 갈래가 어느 땅으로 들어갔는지를 살펴보는 것에 있어서는 저들의 차원과 함께 하지 않고 현탁(懸度)16361) 한 말만 가지고 할 수 없습니다. 저들의 차원 없이 단지 조신(朝臣)만 보내어 도로(道路)가 저쪽에 속하는지 이쪽에 속하는지를 불구하고 오직 수원만 찾기에 힘쓴다면, 이것이 과연 봉강(封彊)을 신중하게 지키는 도리이겠습니까.”
 
하고, 또 논하기를,
 
“전하(殿下)께서 대신의 말에 따라, ‘목차(穆差)가 경계를 정하고 돌아간 뒤에 이러한 잘못이 있는데, 만일 곧장 그 나라에 주문(奏聞)한다면 그가 편하지 못할 것이니, 우선 통문(通問)하여 회답을 보고 처리하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신(臣)은, ‘국경에 관한 일은 이미 중요한 것이어서, 정한 경계에 과연 잘못이 있다면 사리상 마땅히 그 나라에 먼저 알려 다시 간심(看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그 나라에 알리지 않고 사사로이 그 신하에게 말을 물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논하기를,
 
“허양(許樑)과 박도상(朴道常)이【곧 그때의 차원으로서 잡혀 와 추문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미 잡혀 와 있으니 마땅히 이 무리들을 아울러 사핵(査覈)하여 더 자세한 것을 알아내고, 혹은 저들의 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거나 혹은 주문하여, 피차가 함께 간심하기를 청해야 거의 두루 상세하고 정대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유가 또 임금에게 아뢰기를,
 
“김진규의 소가 대체에 있어서 진실로 옳습니다. 직질(職秩)이 높은 관원이 경솔하게 그들의 땅에 들어감은 과연 편리하지 않으니, 차원들을 잡아 오기를 기다렸다가 자세하게 물어본 다음에 의논해서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 상소에 또 ‘목차에게 사사로이 물어서는 안되고 마땅히 자문을 보내거나 주문해야 한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대신의 의견이 모두 편리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목차가 견책(譴責)받는 것은 아직 말할 것이 없고, 만일 저들이 다른 차원을 보내 다시 간심한다면 목차처럼 순편(順便)할지 보장하기 어려운데다가, 혹은 경계를 정하는 곳에 있어서 도리어 변개(變改)하여 감축(減縮)하는 우려가 있다면 득실(得失)에 큰 관계가 있을 것이니, 먼저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그 고장 사람 중에서 일을 잘 아는 사람을 가려 보내 편리한 대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고 계문(啓聞)한 뒤 상의(商議)하여 처리함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또 다시 그대로 따라, 문신(文臣) 당상관은 아직 차출해 보내지 말고, 먼저 도신으로 하여금 편리한 대로 사람을 보내 자세히 살펴보고 계문하게 하고, 또 차원을 잡아다 추문하기를 기다린 뒤에 상의하여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그 뒤에 차원 허양(許樑)과 박도상(朴道常) 등은 잡혀 왔으나 사령(赦令)으로 인해 용서받았는데, 비국(備局)에서 불러다 물어보니, 허양 등이 공술하기를,
 
“백두산 도형(圖形)을 가지고 말한다면 목차(穆差)가 지적한 소류(小流)가 첫번째 갈래가 되고, 도로 차사원(道路差使員) 박도상과 갑산(甲山) 사람들이 지적한 바 수원(水源)이 솟아나는 곳, 즉 지금 푯말을 세운 곳이 두번째 갈래가 되며, 송태선(宋太先)이 지적한 바 물이 솟아나는 곳이 세번째 갈래가 됩니다. 당초 목차가 백두산에서 내려왔을 때, 박도상과 갑산의 길을 인도하는 사람 등을 먼저 두만강의 물이 솟아나는 곳으로 보내어 기다리도록 했는데, 목차 또한 뒤쫓아와서 물이 솟아나는 곳에서 채 10여 리쯤 못미쳐 하나의 소류(小流)를 발견하자 말을 멈추고 지적하기를, ‘이 산의 형세를 보건대 이 물은 응당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겠다.’고 범범하게 말했고, 곧장 두번째 갈래 수원(水源)의 머리 밑 4, 5리쯤 되는 곳에 이르러서는 목차가 이에 ‘이 물은 원래의 갈래가 분명하니, 내가 그 발원하는 곳까지 가 볼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군관(軍官) 조태상(趙台相) 한 사람만 혼자 가서 발원한 곳을 살펴보았고, 목차 일행들은 흐름에 따라 내려가다가 4, 5리를 지나지 않아 또 소류(小流)가 북쪽으로부터 흘러내려 오는 것을 발견하자, ‘앞서 발견한 첫번째 갈래의 물이 흘러와 이리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또 20리를 더 가 지숙(止宿)하는 곳으로 내려왔을 때 목차가 우리 나라의 여러 사람들을 초치(招致)하여 산도(山圖)를 내보이며, ‘첫번째 갈래의 물에다 목책(木柵)을 세우면 당신네 나라에서 말하고 있는 물이 솟아나는 곳에 견주어 10여 리나 더 멀어지게 되니, 당신네 나라에서 땅을 많이 얻게 되어 다행이다.’라고 하므로, 따라간 일행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의심없이 믿고, 중간의 8, 9리는 다시 간심(看審)하지 아니한채 그대로 흐름을 따라 내려와, 노은동산(盧隱東山)을 지나 어윤강(漁潤江)에 있는 사신(使臣)이 머무는 곳으로 와서 모였습니다.
 
8월 초순에 순찰사(巡察使)가 비국(備局)의 관문(關文)에 따라 다시 백두산에 푯말을 세우는 차원(差員)으로 차출했기 때문에 경성(鏡城)으로 달려가서 북평사(北評事)와 함께 역군들을 데리고 역사할 곳으로 갔는데, 데리고 간 장교(將校) 손우제(孫佑齊)와 박도상(朴道常) 및 무산(茂山) 사람 한치익(韓致益) 등과 함께 가서 30여 리를 가며 찾아보니, 수세(水勢)가 점점 커지며 북쪽을 향해 흘러갔고 두만강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30리를 오가는 동안 피인(彼人)들이 다닌 자취가 있었기 때문에, 손우제는 혹 피인들과 서로 만나게 될까 염려하여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며 번번이 뒤쳐졌고, 한치익은 또한 ‘저는 변방 국경에서 생장한 사람이기에 피차(彼此)의 지형을 잘 알고 있는데, 이 물은 분명히 북쪽으로 흘러가고 두만강으로는 들어가지 아니합니다. 만일 혹시라도 두만강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한다면 뒷날에 제가 마땅히 터무니없이 속인 죄를 입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또 목차가 말한 바 소류(小流)가 흘러 와 합쳐지는 곳이란 데를 다시 간심(看審)해 보았더니, 곧 산골짝 사이의 몇 리 쯤에서 곁으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지고 돌아가 평사(評事)에게 보고했더니, 물이 솟아나는 곳에 이르러서는 우선 역사를 정지하되 품하여 결정하기를 기다린 뒤 처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했습니다. 당초 저들과 우리 나라 사람들의 흐름을 따라 내려올 때 바로 지금 푯말을 세우는 곳에서부터 아래의 대홍단(大紅丹)까지는 각각 2일 반의 길이었는데, 목차가 지적한 첫번째 갈래라는 곳과 바로 지금 푯말을 세우는 곳의 중간에서부터 미미한 언덕이 시작되어 그대로 진장산(眞長山)이 되었고, 구불구불 내려가 무산(茂山)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사이에는 원래 다른 물이 내려와 합쳐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또 목차가 지적한 첫번째 갈래에서 바로 지금 푯말을 세우는 곳까지는 거리가 대략 10리 가량이었고, 평사(評事)가 말한 첫번째 갈래는 곧 목차가 지적한 소류(小流)가 내려와 합쳐지는 곳인데, 지금 푯말을 세우는 곳과 거리가 몇 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목차가 지적한 물이 이미 잘못 본 것이라면, 박도상(朴道常)과 갑산 사람들이 지적한 두번째 갈래는 원류(源流)임이 분명하여 조금도 의심스러운 잘못이 없는 것이니, 이곳에다 푯말을 세우는 것 외에는 다시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평사가 말한 첫번째 갈래는 원래 산골짝 사이의 몇 리 남짓에서 옆으로 나온 세류(細流)이었으니 결단코 이를 가지고 물이 솟아나는 곳이라고 지적할 수 없으며, 만일 기필코 목책(木柵)을 이 물로 놓으려고 한다면 원류(源流)임이 분명한 상류(上流)를 버려 두고, 8, 9리 쯤을 돌아 내려가 비로소 푯말을 세워야 하니, 또한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또 흐름이 끊어진 곳에서 물이 솟아나는 곳까지의 사이에 북쪽으로 향한 소류(小流)가 5, 6갈래나 되고, 물이 솟아나는 곳에서 아래로 남증산(南甑山)까지의 소류로서 두만강으로 들어가는 것이 4, 5갈래인데, 숲이 하늘에 닿아 지척(咫尺)을 분간할 수 없는 곳에 소류(小流)가 이처럼 혼잡하므로 무식하고 얕은 생각으로는, 만일 뒷날 차원(差員)이 잘못 알고서 북쪽으로 흐르는 물에다 목책을 세운다면 앞으로 염려가 없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영문(營門)을 오가는 동안에 반드시 1순(旬) 또는 1달을 허비하게 되므로 사세로 보아 외딴 국경에서 마냥 기다릴 수도 없고, 지친 백성들이 4, 5일의 길에 여러 차례 역사에 동원되어 폐해가 적지 않았습니다. 한결같이 형편에 따라 우선 푯말을 세우고 시급히 영문에 달려가 자세하게 실상을 진달하는 것이 무방할 듯하였기에, 여러 차원(差員)들과 함께 의논한 다음 비(碑)를 세운 곳에서 아래로 25리까지는 혹은 목책을 세우고 혹은 돌을 쌓았고, 그 아래의 물이 나오는 곳 5리와 건천(乾川) 20여 리는 산이 높고 골짝이 깊으며 내[川]의 흔적이 분명하기 때문에 푯말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또 그 밑으로 물이 솟아나오는 곳까지의 40여 리는 모두 목책을 세우되, 그 중간의 5, 6리는 이미 나무나 돌도 없고 또한 토질이 강하기에 단지 흙으로 돈대만 쌓았습니다. 전후의 실상이 이러한 데 불과합니다.”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이로 계주(啓奏)하고, 또 그들이 올린 도본(圖本)을 올렸다.
 
이어 복주(覆奏)하기를,
 
“자신들을 해명한 말이라 그대로 믿기 어려우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손우제(孫佑齊) 등 각 사람과 조태상(趙台相)에게 사문(査問)하여 장문(狀聞)하도록 하되, 그들이 공술(供述)한 것을 가지고 피차(彼此)의 동이(同異)를 고찰해 보고 서서히 다시 간심(看審) 여부(與否)를 품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목극등이 조선 관리들을 따돌리고 제 멋대로 세운 비석때문에 조선 조정이 골머리를 앓고 있죠?

 

오늘날 간도영유권 주장의 핵심인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 경위는 이렇습니다.

 

이 비석은 두고두고 문제를 일으키는데,

청나라는 처음엔 두만강을 건너온 조선인개척민을 무조건 철수하라고 요구하다가,

나중엔 호복과 변발을 하고 중국정부에 세금을 낼 것을 조선출신 정착민들에게 강요합니다.

 

어정쩡하게 대응하던 조선정부는 청일전쟁 후 부터 러일전쟁 전까지는 러시아세력을 등에 업고,

러일전쟁 이후에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가지고 있던 통감부를 통해,

'간도'가 조선영토라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시작하게됩니다.

그 근거중의 하나가 바로 저 백두산 정계비 입니다.  바로 백두산정계비게 토문강이 국경이라 되어 있고,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다라는 주장이었죠....

 

이 당시에는 이미 조선인 수 만명이 강을 넘어 간도지역을 바탕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조선정부로서도 무조건 귀환하라고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때문에 조선정부는 외세를 등에 업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러일전쟁전 러시아는 만주지역에서 세력확장을 꾀하고 있었고,

러일전쟁후 일본도 만주지역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환상적인 파도를 타기만하면 그냥 꿀꺽 할 수도 있었을런지도 모릅니다.

(조선으로서는 나름 以夷制夷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아무리 만주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왜구들이었지만,

이 따위 것을 근거로 광활한 만주땅 (또는 간도땅)을 먹기엔 근거가 너무 박약했습니다.

일본은 철도부설권을 얻는대신, 이 지역에서 청나라의 영유권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게 일본이 간도를 넘겨 줬다고 요즘 욕을 들어먹는 이유입니다.....

흐흑~~~ 억울해라~~~~

 

 

 

조선인들이 개간한 땅이니 조선땅이지무~~~~  대한제국이 간도영유권을 주장할 무렵 발간된 지도

이 당시 일본의 통감부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가지고 있었다.

  북간도가 함경북도에 포함되 있으면, 서간도, 동간도는 어디????? 

저기요....  혹시 저 위에 "청국 만주(淸國滿州)"라고 써 놓은 것은 보이시는가????

 

 

 

 

 

그러니까, 조선과 중국 사이에 합의된 국경이 두만강이 아니라 토문강이란건 있을수 없는 일이란겁니다.

모든것은 목극등의 병신짓 때문입니다.

 

조선은 강을 넘어간 사람들을 잡아 처벌했는데, 이 사람들이 제일 잘하는 변명거리가

강을 건너 즉, 국경을 넘어 간 것이 아니라, 강 가운데 있는 섬에 다녀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강을 건넜다고 하면 죽음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죠....

이게 바로 간도(間島; 사이섬)의 유래입니다.

 

실제로는 강 건너 중국에 갔다 온 거지만, 대외적으로는 강 중간에 있는 '사이섬'에 다녀왔다고 하게 되고,

이게 의미의 변화를 일으켜서 두만강 너머 특정 지역을 간도(사이 간(間), 섬 도(島); 사이섬)라 부르게 된 겁니다.

 

 

두만강 중류 어딘가에 한국인들이 세워 놓았던 '간도(사이섬)' 비석

중국 정부에 의해 철거 (어딘가의 정보에 의하면 '폭파') 되었다고 합니다.

 

 

 

 

중국은 '간도'라는 명칭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일본은 한일합방전 통감부 시절에는 간도지방의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간도파출소를 두어 무장병력을 이 지역에 주둔시키고 있었고,   한일합방 후에는 간도 총영사관을 두었었으며,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세워진 이후에는 이 지역을 '간도성'이라는 행정구역명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중국에게는 '간도'라는 명칭자체가 (일본의) 침략을 상기시키는 행위인거죠.....

 

 

출처) 중국 사이트 어디어디....

 

 

 

그러니, 저 딴 비석을 중국땅에 세워 놓는 것은 용감하다 해야할까?  무식하다 해야할까?

무식하면 용감하다 하는게 정답일 듯 합니다.......

 

 

 

일제시대에 발간된 '만주국-간도성' 지도

 

 

 

<중국-연변조선족자치주 = 일제시대 만주국 간도성 + 돈화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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