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지역 영유권

 

제목 : [진단] 간추린 일제의 식민사관(植民史觀)③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5-03-13 조회수 : 410

 






 











 심천 자유기고가 (발행일:
2015/03/12 18:49:08
)

 













[진단] 간추린 일제의 식민사관(植民史觀)③
-SPn 서울포스트, 심천 자유기고가


五, 조선국토 영역과 조선지도


대진국(발해)이 왜 역사 속으로 갑자기 사라졌는지 분명치 않다. 일설에는 거란족의 침입으로 멸망했다고 하나 그들은 왜 그들이
정벌한 광활한 발해(지금의 만주 일대)땅을 그대로 두고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알려진 것이 없다. 아무래도 대진국의 멸망년도와 백두산의 대 폭발
년도가 같다는 점에서 백두산 폭발로 인하여 백두산 바로 아래에 위치했던 대진국 수도 ‘용천부’가 화산재에 파묻혀 버린것이 원인이 아닌가 추정될
뿐이다.

대진이 멸망하고 나서 그 광활한 영토는 오래도록 비어둔 채 버려져 있었다. 그러나 차차 세월이 흘러가면서 흑룡강 지역은
선비족, 말갈족 등의 종족들이 몰려들었고, 요동지역은 여진족이 자리를 잡았다. 북간도와 서간도 지역에는 고려인들이 간간히 흘러들어가 황무지를
개간하고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근세조선 초기 세조때, 남이 장군이 27세의 젊은 나이에 ‘야차와 같이’ 단기로 돌진하여 요동을
정벌하고 여진족 족장을 사로잡은 일화는 유명하다. 이런 공노로 남이 장군은 약관 28세에 병조판서에 오르지만 한명회의 사주를 받은 유자광의
모함으로 이 절세의 영웅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요동을 정복했으면, 간도 용정 등지에 흩어져 살던 조선인이나 대진 유민들을
이주시켜 살게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렸다면 요동과 간도, 연해주 등 옛 대진국의 그 광활한 영토는 모두 조선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조는 여진족이 다시는 압록강 이남 조선영토를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매년 조공을 바칠것을 약조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후 세월이 흘러흘러
요동에서는 슬그머니 청나라가 세금을 걷우어 드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간도 지방에까지 손을 뻗치려고 가진 수작을 다 부렸다.

드디어
숙종은 이중하(李重夏)를 감계사로 삼고 청나라와 조청국경에 대한 담판을 짓게된다. “이 칼로 내 목을 찌를수는 있어도 조선땅은 한치도 내 줄수
없다” 그 서슬 퍼런 기개는 어디로 갔는지, 어떤 타협이 있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수는 없지만, 어쨌던, 압록강, 토문강(송화강 줄기),
송화강을 서쪽 경계로 삼고, 북으로는 흑룡강을 경계로하는 국경선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고 나서도, 토문강과 백두산 동쪽 두만강 발음이 비슷하여
종종 국경분쟁이 일어났다. 이에, 숙종 38년(1712) 감계사 이중하와 청나라 강희재 특사격인 총관 목극등(穆克登)이 다시 만나, 상기 합의
내용을 재 확인하고 압록강과 토문강이 만나는 분수령에 조청경계비를 세워 상기 내용을 상세히 새겨넣고 양측 참관인들 이름도 새겨넣었다.


이렇게하여 뚜렷한 이유도 알려지지 않은 채, 요동지방은 청나라로 넘어가고, 간도 용정은 물론 해삼위(지금의 브라디 보스토크)를
포함한 연해주 일대가 우리 영토로 되었다. 이때 세운 조청경계비가,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파손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으로
믿으며 이는 주권을 가진 중국과 우리나라가 맺은 최후의 국경 경계비가 되는 것이다.

구한말 무렵까지도 간도, 용정, 해삼위
등지에는 우리 조선인이 자리잡고 살았으며, 간도 용정 등지의 조선인 수는 약 10만호(약 4,5십만명), 해삼위 일대는 약 5만호
(약20만명)였다고 한다. 그러나, 상기 조청경계비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집요하게 우리 동포를 괴롭히며 부당한 세금을 징수해 가기도 했다. 이에
백성들이 조정에 글을 올려 이 지역 우리 백성을 보호해줄 것을 요청하게 되고 조정에서는 1902년 8월 11일 관리사 이범윤(李範允)을 파견하게
된다. 이범윤은 사포대를 조직하여 자체 방어를 튼튼히 하고 청나라 간섭을 물리치며 우리 국토를 잘 지켜나갔다.

당시 국제정세는
어지러웠지만, 그래도 조선반도에는 세우지 못한 안중근의사 기념비를 해삼위에는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을 강점한 일본은 청국과 소위
‘간도협약’이란 것을 체결하여 간도지방을 송두리 채 청나라에 넘기고 만다. 엄연히 불법이다. 일본과 하등 관계가 없는 남의 나라 땅을 제 맘데로
주고받고한 불법인 것이다. 청나라는 한술 더 떠서,우리 땅 해삼위를 포함한 연해주 지방을 러시아에 양도 하고 만다. 이것도 불법이다.


토문강, 송화강 이동(以東), 흑룡강 이남(以南)이면, 조선반도의 몇배나 되는 광활한 땅이다. 그런데,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은,
왜 우리나라 지도가, 그때나 지금이나, 압록강-두만강으로 경계선을 이루고 있냐는 것이다. 어지러운 한 말은 그렇다치고 왜 숙종, 영조, 정조
때도 토문강-송화강-훅룡강을 잇는 우리나라 지도를 만들지 않았는지 통한이 사무친다.

이를 기화로 일제는 압록강-두만강 을 국경으로
하는 우리나라 국경을 고착화하고 아울러 이에 따른 지도를 만들어 보급, 교육함으로써 우리 국민은 영문도 모르고 토끼모양이다 호랑이 모양이다 라고
하며 은연중 압록강-두만강을 우리 국경으로 알고 그데로 고착화되고 말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간도, 해삼위 등지에 살던 우리 백성들까지도
남의나라 백성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6.25 직전까지 서간도, 용정, 백두산 남북면 모두는 우리국토로 양국이
인식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모택동시절 중공 총리 주은래는 분명히 "고구려는 한국역사의 한 갈래다"라고 못박고 만주에 산재해 있는 고구려
발해의 유적들을 봉인해 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직후 모택동은 김일성(김성주)에게 한국전 참전 대가로 서간도, 용정, 백두산 북면을
중공에 양도하라고 욱박질렀다. 김성주가 묵묵부답하자 중공군이 무력으로 침공하여 백두산 북면 이북을 뺏어가고 말았다. 어처구니 없는 강탈이다.


국제재판소에 제소해서라도 토문강-송화강-흑룡강 을 경계로하는 간도, 연해주 등지를 찾아와야 할 것이다.

▣ 재미교포
자유기고가 (심 천-민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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