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지역 영유권

 

제목 : [간도 영유권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조선·후금 국경 사이에 만든 비무장지대가 곧 간도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5-02-25 조회수 : 615

 

[간도 영유권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조선·후금 국경 사이에 만든 비무장지대가 곧 간도

강정민 변호사·‘간도반환청구소송’ 저자               

1. 지난호에 우리는 백두산정계비상의 토문이 두만강을 가리킨다는 점, 목극등이 두만강 발원지로 생각하고 정계비를 세운 지점이 사실은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토문강원이었다는 점, 결국 목극등이 의도와는 달리 엉뚱한 지점에 백두산정계비를 건립하였다는 점, 목극등의 이러한 착오는 중대한 과실에 의한 것으로 법리상 그대로 법률적 효력이 발생한다는 점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이러한 법리에 대해서는 중국도 대체로 인식을 같이한다. 을유·정해감계회담 당시 중국 측 대표들이 목극등의 감계가 양국의 공식적 감계가 아닌 청의 일방적인 변경 시찰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백두산정계비를 목비(穆碑)로 폄하했던 점, 기타 백두산정계비가 위작되었다거나 다른 곳에서 옮겨졌다고 주장했던 점으로 볼 때 그렇다. 즉 당시 중국 측 대표들은 백두산정계비가 국경조약으로서의 효력을 가진다고 할 경우 토문강(송화강) 국경설이 우위에 설 것을 염려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중국 학자들 역시 대체로 같은 입장이다.
   
   목극등의 실수로 간도가 조선의 영토가 되었다는 것은 왠지 궁색하고 찜찜하다. 원래 한민족은 요동과 만주까지 아울렀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가 이 지역을 근거로 활동했는 바, 간도는 원래 한민족의 영토이다. 어쩌다 한민족의 영토가 압록강·두만강 이남 한반도로 축소되고 만 것일까.
   
   발해 멸망 이후 북방영토는 한민족의 역사에서 소거되고 말았다. 고려와 조선은 한반도 내에 머무르며 북방영토를 방기하였다. 왜 그랬던 것일까.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우선 조선과 청의 국경제도에 대해 살펴보자. 역사를 소급하다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1616년 흥경에 도읍을 정하고 후금(後金)을 건국한 누르하치는 주변 부족을 통합하며 명과 패권 경쟁을 벌였다. 1619년 사르후전투에서 승기를 잡았지만 1626년 영원성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뒤를 이은 홍타이지가 1636년 칭기즈칸의 옥새를 손에 넣은 후 청으로 국호를 변경하고 1644년 베이징을 함락시킨다. 이후 홍타이지는 부족을 이끌고 베이징으로 천도하게 된다.
   
   한편 1627년 정묘호란에서 패하고 형제의 맹세를 한 조선은 1636년 병자호란에서 패하면서 신하로서의 맹세를 하게 된다. 형제의 나라에서 신하의 나라로의 변화는 큰 것이었지만 조선이 독립국가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국가는 주권과 영토 그리고 국민을 그 구성요소로 한다. 영토는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장소적 범위로서 국경은 이러한 영토의 외곽선을 의미한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의할 경우 조선의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청의 국경은 어디였을까.
   
   
   3. 1638년 청의 호부(戶部) 기록은 청의 국경선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아직 베이징을 함락시키기 전의 일이다.
   
   ‘압록강 하류 ‘암반’에서 ‘봉황성’을 거쳐 ‘감양변문’을 지나 ‘성창문(城廠門)’과 ‘왕청변문(汪淸邊門)’에 이르는 선에 국경표지 설치 공사를 실시하였다. 신계(新界)는 구계(舊界)에 비하여 동쪽으로 50리를 더 전개하였다.’
   
   1638년에 신계를 구축하였다는 기록이다. 신계는 구계보다 동쪽으로 50리 더 확장되었다고 되어 있다. 중국의 10리는 5㎞이므로 동쪽으로 25㎞ 확장되었다는 내용이다. 신계를 일률적으로 25㎞ 서쪽으로 이동시키면 구계가 될 것이다. 구계란 무엇일까.
   
   
   4. 1627년 3월 13일 조선과 후금은 강도회맹(江都會盟)을 체결하게 된다. 후금의 침입에 맞서 강화도로 천도하며 항거하였던 조선은 후금의 맹위에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게 된다. 검은 소 한 마리와 검은 말 한 마리의 목을 쳐 제사를 지내고 형제의 맹세를 하니 이를 강도회맹이라 한다. 강도회맹 제3조에 국경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
   
   ‘朝鮮國與金國立誓 我兩國已講和好 今後兩國 各遵誓約 各全封疆(조선국여금국입서 아양국기강화호 금후양국 각존서약 각전봉강)
   
   조선국과 청국은 서약하노니 양국은 이미 강화하였기에 지금부터 양국은 서약을 지키고 각자의 강역을 봉하여 보전하기로 한다.’
   
   한민족은 주변 민족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독립국가를 유지해 왔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후금은 조선을 직접 통치하지 않고 동생의 나라로 삼았다. 각전봉강(各全封疆), 각자의 영역을 봉하여 온전히 보전하기로 한다는 이 부분이 바로 국경과 관련된 부분이다. 강도회맹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후금의 국경선이 바로 구계이다. 구계는 ‘암반~봉황성~감양변문~성창문~왕청변문’을 연결한 선보다 25㎞ 서쪽에 있었다.
   
   
   5. 이상 1627년 강도회맹 체결 당시 양국의 국경선을 살펴보았다. 조선의 국경선은 ‘압록강~두만강’, 청의 국경선은 ‘암반~봉황성~감양변문~성창문~왕청변문’ 선을 일률적으로 25㎞ 서쪽으로 이동시킨 선이다.
   
   지도에서 확인해 보면 조선의 국경선과 청의 국경선이 맞닿아 있지 않고 그 사이에 공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국경이 맞닿아 있을 경우 충돌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완충지대를 둔 것이다. 일종의 비무장지대이다. 이를 무인공광지역이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합리적 의심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청과 조선 간에 완충지역으로 설정된 무인공광지역은 원래 어느 나라의 영토였을까 하는 것이다.
   
   정묘호란에서 승리한 후금이 자국 영토를 떼어 완충지대를 만들었을까. 아닐 것이다. 청이 1638년 병자호란 직후 구계를 확장하여 신계를 구축한 사실로 볼 때 후금이 자신의 영토를 떼어 완충지대를 삼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가능성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조선의 영토 일부를 떼어 완충지대로 삼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전쟁에 패한 국가는 승전국에 대해 전쟁배상금 등 많은 부담을 질 수밖에 없다. 과거에 없던 무인국경지대를 설정하기로 하였다면 분명 패전국인 조선의 영토가 할양되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이 지역이 험준하여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지역이기 때문에 양국 모두 별다른 이의 없이 무인공광지역으로 삼았을 경우이다.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사실에 부합하는지 현재로서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앞으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6. 조선과 청은 이렇게 설정된 무인공광지역을 엄격히 지켰다. 청과 조선은 백두산정계비 건립 전후를 막론하고 무인국경지대 유지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와 관련된 기록들을 보자.
   
   ‘1714년(숙종 40년) 경원과 훈술(訓戌) 건너편 대안에 청인이 초가집을 짓고 밭을 개간하려는 모습이 목격되자 사역원정(司譯院正) 김경국을 파견하여 그 철퇴를 요청하였다. 청은 즉시 봉천장군과 영고탑장군에게 조사를 명하였고 초가집을 헐고 이들을 강제이주시켰다.
   
   1731년(영조 7년) 청국 봉천장군이 망우초 지방에 수로방신을 설치하여 비류의 단속에 활용하려 하였으나 조선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위 사례들은 모두 백두산정계비가 건립된 직후의 일들이다. 1746년 영조 22년에는 심양장군이 봉황성 변책을 퇴전하여 병정에게 개간을 허락하고 중강의 월변 망우초에 관병을 증원할 것을 주청한 일이 있었다. 이후 태악부도통이 중강 월변 기지를 살펴보고 가자 조선은 진주사를 차출하여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황조어우 이래 내외 구계의 한을 엄히 하고 간세범월의 환을 생각하여 봉황성에 책을 설치하여 출입을 경계하고 책외 연강에 이르는 백여 리를 비워 입거를 금지하고 서로 바라보지 못하고 성문이 서로 접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굉모원계(宏謨遠計)는 사방에 미치고 만세에 미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만약 간토설둔을 허락한다면 왕래상통하기 쉬워 금령이 행해지지 않을 것이며 잠월이 더욱 많아지고 간폐가 백출하여 소방 민인이 많은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청은 병부상서로 하여금 현지조사하게 하였다. 병부상서는 조사 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망우초 등지는 청국 내지에 속하며 조선 계지와 상당한 거리가 있으며 변장을 개전하고 지구를 개간하려는 땅이 봉천 소속의 내지이니 조선국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조선과는 일수를 격하여 상대한다 하나 피차에 월계를 못하게 하고 각기 소속의 인민을 단속하면 시끄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고 변강은 영구히 안온할 것입니다.’
   
   조선의 영토가 아니니 문제될 것이 없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청의 황제는 조선의 문제제기가 옳다고 보아 봉황성 변책을 압록강까지 확장하는 것을 정지시켰다. 이후에도 무인공광정책은 계속 엄수되었다.
   
   ‘1748년(영조 24년) 훈술진(訓戌鎭) 대안 동변 20~30리 거리에 청인이 집을 짓고 간전하는 자가 있어 외교 공문을 보내니 이를 철퇴시켰다.
   
   1842년(헌종 8년) 상토진, 만포진 대안에 청인이 집을 짓고 토지를 개간하는 자가 있어 청에 통보하였더니 청이 성경장군으로 하여금 이를 철퇴하게 했는데, 이때 철퇴된 것만 토막 28칸, 초방 98칸, 간전 2300여동에 달하였고 이후 연간 2회에 걸쳐 연강 각처를 순찰하게 하였다.
   
   1846년(헌종 12년) 강계 상토진 월변에 청인이 들어와서 40여개 처에 집을 짓고 벌목 개간하니 그 철퇴를 요구하였다. 청은 연강 각처를 토렵하여 초방 65처, 유민 28명, 벌목인 220명을 체포하였다.’
   
   
    7. 백두산정계비는 이러한 무인공광정책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었다. 1627년 강도회맹에 의하여 설정된 무인공광정책으로 이 지역에 천연 특산물이 넘쳐나게 된다.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된 험준한 지역이니 의당 그러했을 것이다. 특히 당시 비싼 값에 거래되던 인삼이 많아 화근이 되었는데 결국 큰 사건이 터지고 만다. 1710년 이만지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일자 순으로 살펴본다.
   
   ‘위원의 백성 이만지 외 8인이 밤을 틈타 경계를 넘어 삼을 캐기 위해 설치한 장막 가운데 들어가 청인 5명을 살해하고 삼화를 약탈하였는데 청인 1인이 우연히 벗어나 달아났다가 그 동료 20여명과 더불어 위원 북문 밖에 이르러 큰소리로 말하기를 “대국 사람 5명이 위원 사람 이만지 등에게 살해당하였다”고 하며 범인들을 인도하라며 무려 9일 동안이나 소리치며 난동을 부리다가 순라장 고여강을 납치하여 인질로 삼았다.
   
   군수 이후열은 늙고 겁이 많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처음에는 성문을 닫아걸고 거절하다가 뒤에는 날마다 술을 준비해 놓고 맞이하여 먹이고는 겸하여 은과 소와 쌀 등을 뇌물로 주었다.
   
   때마침 고여강은 저들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몰래 돌아왔는데 청인들은 이미 뇌물을 얻었고 고여강을 놓쳤으므로 비로소 물러갔다.
   
   이후열이 이를 숨긴 채 간특하게 미봉하고자 하여 즉시 감사에게 보고하지 않았는데 이후 일이 점차 드러나니 관찰사 이제가 급히 이만지 등 5명을 가두게 하고 사유를 갖추어 문초하여 이후열을 죄 주도록 청하였으므로 이후열을 체포하여 심문하였다.
   
   1710년 조선의 백성들이 경계를 넘어 인삼을 약탈하고 그 과정에 청의 백성들을 살해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위원의 지방관 이후열은 이 일을 감추고 중앙 정부에 알리지 않았지만 일은 점차 커져 양국 간 국경 문제로 확대되고 만다.
   
   좌의정 서종태, 우의정 김창집, 병조판서 민진후가 뵙기를 청하여 위원 사람들이 범월한 일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들이 혹 조사하는 사신을 보내어 오는 일이 있을까 지극히 염려스럽다”고 하였다. 서종태가 말하기를 “장계 가운데 각 사람들의 처음 진술을 보건대 살해하였다는 것은 거짓이 아닌 듯합니다. 만약 저들이 먼저 조사한다면 일이 장차 순조롭지 못할 것입니다. 갑신년에도 공문을 보낸 것으로 무사하였으니 이번에도 먼저 공문을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러 대신들의 뜻도 모두 이와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얼마 있다가 이선의가 탈옥하여 먼저 도망하였고 나머지 넷은 위원에서 강계로 이송하여 조사하려 하였는데 그 족속들이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포를 쏘아 인솔하던 장리를 쫓고 도주시켰다. 이 일을 보고하자 임금이 크게 놀라 반드시 잡아내라고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으므로 대신이 먼저 저들에게 고할 것을 청한 것이었다.
   
   범월했다가 도망했던 위원의 죄인 2명을 잇달아 체포하였음을 관찰사 권성이 보고하였다. 역관 김홍지를 보내어 범월인으로 지칭되는 자들을 체포하였는데 그 가운데 둘은 체포하였으나 범행을 인정하지 않았고 나머지 셋은 여전히 도망 중이라 상금을 걸어 잡으려고 하는 상황이라는 취지의 공문을 청나라에 보내게 하였다.
   
   국경을 범해 넘은 죄인을 조사하여 처리한 일을 청나라에 알리고 처리 방법에 대하여 의견을 묻는 공문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이만지 외 4인은 목을 베었고 한 명은 병에 걸려 사망했습니다. 범인들의 처자는 종으로 삼고 가산은 몰수하였는데, 이만건은 대국의 뜻에 따라 남겨 부모를 봉양하게 하였습니다. 위원의 전·현직 군수와 관찰사, 절도사는 모두 파직하였습니다. 파수장은 장 일백에 변방으로 정배하였고, 파수군은 장 일백에 직을 박탈하였고, 나머지는 죄에 따라 가두어 두었으니 처리방법에 대한 지침을 받고자 합니다’고 하였다.’
   
   
   8. 이 사건을 계기로 청의 강희제는 근본적인 해결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1710년 강희제의 유지이다.
   
   ‘혼동강(송화강)은 장백산 뒤에서 유출하여 선장 길림에서 동북쪽으로 흘러 흑룡강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모두 중국 땅이다.
   
   압록강은 장백산 동남쪽에서 흘러나와 서남쪽으로 흐르고 봉황성과 조선국의 의주 사이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압록강 서북쪽은 중국 땅이고 강의 동남쪽은 조선 땅이며 강으로 경계한다.
   
   토문강은 장백산 동쪽 기슭에서 흘러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토문강의 서남쪽은 조선 땅이고 강의 동북쪽은 중국 땅이다. 이것도 강으로서 경계한다. 이것은 명백하다.
   
   단지 압록과 토문, 두 강 사이의 지방은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이에 부원 두 사람을 봉황성으로 보내 이만지 사건을 회심케 하고 또 타성 오라총관 목극등을 파견한다.’
   
   여기의 토문은 두만강을 의미한다. 강희제는 압록강과 두만강 상류지역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 범월 사건이 일어난다고 보고, 그 경계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목극등을 파견하였다. 이것이 바로 백두산정계비가 설치된 배경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백두산정계비는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한 지역의 경계를 확정한 것일 뿐 조선의 국경 전체를 확정한 것이 아니게 된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조선의 국경선은 ‘압록강~백두산정계비~두만강’이 된다.
   
   
   9. 청의 국경선은 1627년경에는 구계, 1638년경에는 신계였다. 아직 베이징을 점령하기 전이다. 청은 1644년 베이징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강도회맹에 위반하여 무인국경지대를 조금씩 잠식해 들어온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먼저 청은 1644년 개간황지조례, 1653년 요동초민개간수관례, 1656년 요동초민개간조례를 만들어 한족을 변방으로 이주시킨다. 이는 청의 판도를 확장하기 위한 변방이주정책이다.
   
   이어 동쪽으로 국경선을 확장하니 1661년에 완성된 성경변장(盛京邊墻)이 바로 그것이다. 성경변장은 산해관에서 동북으로 개원의 위원보에 이르러 다시 동남쪽의 흥경을 거쳐 서남으로 봉황성의 남해안까지 총 길이 975㎞, 16개의 변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변문은 국경검문소로서 청의 영토로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이 변문을 거쳐야 했다.
   
   이후 1670년부터 1681년까지 길림유조변장(吉林柳條邊墻)이 새로 구축된다. 이것은 법특동량자산의 법특합 변문을 지나 송화강에 이르는 봉금선으로 총 길이 345㎞, 4개의 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10. 청의 국경에 대해 알 수 있는 또 다른 자료는 당시 제작된 지도들이다. 청의 전성기를 구가한 강희제는 1708년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청국지도를 만들어 달라고 의뢰하였다. 프랑스의 선교사 조아생 부베가 총 편찬을 맡고, 선교사 레지가 삼각측량법을 이용하여 중국 전역을 측량하였다. 이들은 측량 결과를 집대성하여 1717년 강희제에게 황여전람도를 헌상하였다. 황여전람도에 나타난 국경선을 레지선(Regis Line)이라 한다.
   
   황여전람도는 현존하지 않지만, 황여전람도의 제작에 관여한 사람들이 제작한 다른 지도나 책자가 전해지고 있어 당시 청의 국경 상황을 알 수 있다. 1736년 뒤 알드의 ‘중국통사(Description de la Chine)’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봉황성의 동방에는 조선국의 서방 국경이 있다. 만주가 중원을 침공함에 앞서 조선과 싸워 이를 정복하였는데 그때에 장책과 조선과의 국경 사이에 무인지대를 설정하였다. 이 국경은 도상 점선으로 표시한 그것이다.’
   
   1737년 당빌(D’Anville)이 만든 신청국지도(Nouvel Atias de la Chine)에는 청의 국경선이 표시되어 있다. 압록강 이북의 봉황성 부근에서부터 북쪽으로 ‘엽혁참(葉赫站)’, 서쪽 한 지점에서 동쪽으로 송화강과 역둔하(易屯河), 낙니강(諾泥江)이 만나는 부근까지 울타리가 표시되어 있으니 이것이 중국의 국경선이다. 특히 주목할 부분이 있으니, 청의 국경선 아래 압록강 이북지역에 핑안(PING AN), 두만강 이북 지역에 힌깅(HIEN KING)이라는 표시이다. 평안과 함경의 중국식 발음이다.
   
   
   11. 이상 조선과 청의 국경제도에 대해 살펴보았다. 조선의 국경선은 압록강~두만강, 청의 국경선은 구계~신계~성경변장~길림유조변장이었고, 그 사이에 무인공광지대가 설정되어 있었다. 무인공광지대로의 출입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고 조선과 청은 월경자들을 엄벌에 처하였다.
   
   조선과 청의 국경선 사이에 사람이 살지 않는 섬과 같은 지역, 그것이 바로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간도(間島)이다. 이 지역은 원래 조선의 영토였으나 정묘호란에서 패한 대가로 조선의 영토에서 할양되어 무인공광지대로 설정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간도영유권과 관련하여 중국에 매우 불리한 내용이다. 과연 중국은 뭐라고 반박해 올까. 이 시점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동북공정일 것이다. 다음호에는 동북공정과 간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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