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지역 영유권

 

제목 : 통일을 위한 숙제 간도 수복론 vs 회의론 국론 통일해야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4-06-19 조회수 : 592


통일을 위한 숙제 간도 수복론 vs 회의론 국론 통일해야



 



 



 





① 통일을 위한 숙제 간도 수복론 vs 회의론 국론 통일해야간도 영유권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5년 국회에서 ‘간도영유권관계발췌문서’라는 제목의 간도자료집이 발간되었다. ‘간도영유권관계발췌문서’는 1867년부터 1945년 사이에 작성된 일제의 기밀문서 가운데 간도영유권 관련 문서들의 번역본과 영인본을 수록한 자료집이다. 자료집 뒤에는 분량 때문에 미처 싣지 못한 기밀문서 목록이 첨부되어 있고 ‘일본 외무성 및 육해군성 문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에는 일제강점기 간도 관련 핵심 자료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당시 자료집이 발간된 것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으로 통일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서 통일 후 당장 중국과의 국경 문제가 대두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자료집 서문에 이러한 취지가 드러나 있다.



 



‘우리의 당면 과업은 조국의 통일이지만 통일이 성취되는 즉시 국경 문제가 중대한 외교 문제로 등장할 것이 명약관화하다. 따라서 간도 문제에 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고 철저히 연구하는 것은 국가적 중대사로서….’



 



자료집 편찬사업은 당시 국회도서관장이던 강주진 박사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일제의 기밀문서 복사본이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미국 국회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음을 알게 된 강 박사는 미국의 협조를 얻어 필름을 입수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당시 정일권 국회의장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정 의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해 예산을 배정받고 발간사업을 추진한 것이다. 마이크로필름은 모두 51책 분량이었다. 할당된 예산으로는 전체를 책으로 엮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발췌 작업을 하게 된 것이고 이러한 연유로 ‘발췌문서’라는 제목이 사용된 것이다.



 



발췌 작업은 당시 통일원 기획관리실장이자 간도 연구가인 노계현 박사가 맡았다. 그는 모든 자료에 제목을 달고 선별하였는데 자료 입수부터 발췌까지 2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정 의장은 자료집 서문에서 자료집 발간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 예산을 배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김용태 국회운영위원장도 정부 예비비에서 예산이 할애되었다고 적었다. 국가가 예산을 지원하고 국회도서관이 발간 주체였다는 사실은 이 사업이 국책사업으로 추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40년 뒤인 2014년 1월 4일 박근혜 대통령은 통일대박론을 주창하며 통일을 국영운영 핵심과제로 제시하였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올해 국정 운영에 있어 또 하나의 핵심과제는 한반도 통일시대의 기반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지금 남북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엄중한 상황입니다. 작년에 북한은 3차 핵실험을 감행하고 전쟁 위협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개성공단을 폐쇄 상태로까지 몰고 갔고, 어렵게 마련된 이산가족 상봉을 일방적으로 무산시켰습니다. 그리고 최근 장성택 처형 등으로 더욱 예측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내년이면 분단된 지 70년이 됩니다. 이제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적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남북한의 대립과 전쟁 위협, 핵 위협에서 벗어나 한반도 통일시대를 열어가야만 하고 그것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대박론 주창 이후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관심이 최고로 고조되었고 많은 분야의 전문가들이 통일을 준비하고 있다. 통일과 관련하여 간도 영유권 문제 또한 피해갈 수 없는 영역이다. 4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제 우리도 간도에 관심을 가지고 국론을 정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필자는 ‘간도반환청구소송’이라는 주제하에 간도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을 살펴보며 대한민국이 간도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현재 간도 영유권에 대해서는 적극론과 회의론이 대립되어 있다. 적극론은 간도가 한민족의 영토가 분명하기 때문에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는 입장이고, 회의론은 과거 간도가 한민족의 영토였는지 몰라도 지금 이를 되찾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되레 중국과의 외교관계만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차제에 문제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1992년 한·중수교 당시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 정부가 중국에 간도 문제를 언급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이는 정부가 회의론적 입장에 입각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반면 민간은 정부가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고 국회의원들도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1983년 9월 김영광 의원 외 55명이 ‘백두산영유권 확인에 관한 결의안’을 제출한 바 있으며, 2004년 2월 7일 김원웅 의원 외 18인, 2004년 9월 3일 김원웅 의원 외 58인, 2009년 8월 28일 이명수 의원 외 49인이 ‘간도협약의 원천적 무효확인에 관한 결의안’을 발의한 바 있다. 하지만 이들 결의안은 채택되지 못했다.



 



통일을 앞두고 우리는 간도에 대한 국론을 결정해야만 한다. 일본은 2001년 러시아와 문제가 되고 있는 쿠릴열도 4개 섬에 대한 국론을 결정한 바 있다. 러시아가 4개 섬 중 하보마이군도와 시코탄섬을 반환하겠다는 의중을 밝히자, 일본은 러시아의 제안에 따라 2개 섬만이라도 일단 반환받을 것인지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결론은 ‘북방영토 4개 섬 일괄 수복’이었다. 러시아는 일본이 4개 섬 일괄 수복 정책을 채택하자 그나마 2개 섬도 돌려줄 수 없다는 입장으로 선회하였다.



 



지금 시기에 우리가 간도 영유권을 주장한다면 최대 교역국가인 중국과 경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중국이 통일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국익에 심각한 손해가 초래될 수도 있다. 반대로 이러한 것들을 우려하여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다가 영영 간도를 잃어버린다면 후손들로부터 무능한 조상이라는 냉혹한 역사적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이기에 우리는 간도 영유권 문제에 대해 더욱 깊이 조사하고 연구하여 국론을 결정해야만 한다.



 



그럼 먼저 간도에 대해 이러한 조사와 연구를 수행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살펴보자. 1963년 6월 28일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조선과학원대표단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한 말이다.



 





 



▲ 영국의 지도제작자 던(Dunn)이 1794년에 제작한 지도. 서간도는 고려(조선)의 평안도, 동간도는 함경도에 속하는 것으로 그렸다. photo 경희대 혜정문화연구소



 



 



“이러한 시기에 한족(漢族) 또한 일부가 동북지역으로 옮겨 거주하게 되었다. 만주족 통치자는 당신들을 계속 동쪽으로 밀어냈고 결국 압록강, 도문강 동쪽까지 밀리게 되었다. … 다만 이러한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이다. 이런 사정은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일이다. 당연히 이런 현상을 인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붙여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중국의 이런 대국 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 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고,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의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마오쩌둥(毛澤東)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1958년 11월 25일 김일성의 인솔하에 베이징을 방문한 북한정부대표단과의 담화에서 한 말이다.



 



“역사상 중국은 조선에 대해 좋지 않았다. 우리 조상은 당신들 조상에게 빚을 졌다. 중국인들은 과거에 당신들을 침략했고 베트남도 침략했다. … 당신들 선조는 당신들의 영토가 요하를 경계로 한다고 말했으며, 당신들은 현재 당신들이 압록강변까지 밀려서 쫓겨왔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침략은 수양제의 조선 정벌인데 실패했다. 당태종도 실패했으나 그의 아들 고종과 측천무후대에 이르러 조선을 정벌하였다. 당시 조선은 신라, 백제, 고구려로 3분 되어 있었고 그들 내부에서 모순이 발생하여 연개소문의 부하도 그를 반대했기 때문에 정복할 수 있었다.



 



당신들이 역사를 기술할 때 이것을 써 넣어야 한다. 이것이 역사인데 그것은 봉건제국 시대이고 우리 인민정부가 아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지 채 10년이 지나지 않은 상황이다. 중국의 최고지도자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모두 요하 이동 지역이 원래 조선의 영토였음을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만주국에 의해 통치되고 있던 간도 지역 역시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 광복 직후 간도가 어떻게 취급되었을까.



 



1947년 3월 조선 공산당 대표들과 해룡, 혼춘, 왕청, 연길 등 간도 4개 현 대표들이 중국 공산당 동북국에 이들 네 개 현의 할양을 요구한 기록이 있다. 1948년에는 수풍댐이 홍수로 파손되자 북한이 중국과의 협의 없이 임의로 보수한 일이 있었다. 이로 인해 중국과 분쟁이 일어났고 소련의 중재로 해결되었다. 북한이 수풍댐을 자력으로 보수했다는 것은 이 댐을 북한의 소유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해 소련과 북한이 평양에서 협정을 체결하였는데, 간도를 북한에 귀속시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중화민국(대만) 국방부 제2청이 1948년 7월 10일 중화민국 외교부에 보낸 공문에 나타나 있다. 공문에 첨부된 자료에는 해당 지역이 북한의 자치구로 표시되어 있다.



 



‘소련 대표가 우리나라(중국) 길림성의 연길, 목단강, 목릉 등 부근을 북한의 영토로 획분하려고 한다. … 이 지역에는 북한 정규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고 지방 행정도 조선인이 주관하고 있어 실제 북한에 합병된 것과 같다. … 1948년 2월 소련은 북한과 평양협정을 체결한 것에 따라 동북 일부 지역, 즉 간도, 안동, 길림 세 지역을 조선인의 자치구로 획정해 주었다.’



 



1947년 여름 국공내전에서 패한 중화민국은 대만으로 패주하였고, 본토 회복을 노리며 중국 공산당의 활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만큼 신빙성이 높은 기록이다. 이상의 역사적 사실들은 간도가 한민족의 영토임을 보여주고 있다. 간도 문제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간도와 관련해서는 1992년 한·중수교 당시 간도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1962년 북한과 중국 사이에 체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조·중변계조약 당시 간도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1909년 간도협약, 1904년 조·중변계선후장정, 1885년 을유감계회담과 1887년 정해감계회담, 1712년 백두산정계비, 1627년 강도회맹 등에 관해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간도반환청구소송이 제기되었다는 가정하에 간도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그 답을 찾아보도록 하자.[End_m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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