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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주통신원, 고대사 논쟁에 뛰어들다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8-04-21 조회수 : 91

 주주통신원, 고대사 논쟁에 뛰어들다 :[시리즈2] 고조선은 어디에 있었나?한겨레주주통신원회 고대사연구TFTl승인2018.04.16l수정2018.04.17 17:00       




연구팀이 시작한 이번 고대사 연구의 핵심은 ‘고조선은 어디에 있었으며 낙랑군은 평양에 치소를 두고 있었는가?’라는 어찌 보면 단순 명료한 주제다. 그러나 ‘어디에 있었는가?’라는 사실을 판단할 문헌과 유물들이 불충분하고 모호한데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그에 대한 해석도 제각각이어서 역사학계는 그 실체 규명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일제 강점기 일본이 자행했던 유물의 위조와 역사 왜곡은 그 본질에 대한 접근을 더욱 어렵게 해오고 있다. 즉 우리의 고대사 연구가 조선침략을 위한 일본의 역사왜곡 의도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는 점은 해방 이후의 고대사 연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후 역사학계에서 고조선의 실체를 규명해가는 과정에도 자의든 타의든 역사를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를 드러내게 되었고, 이는 단순 명료함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오랜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1.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 어떻게 다른가?

역사란 선인들이 살아온 자취이자 사실(事實)들의 조각들이 모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사가들에 의해 재구성되고 재해석되는 과정을 거쳐 우리 앞에 재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역사연구가들과 독자들은 자신들의 이해득실이나 처한 상황에 따라 왜곡해서 보기도 하고 본의 아니게 자의적 해석을 하기도 한다.

고조선 영역에 관한 논란은 일제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첨예한 대립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역사적 실체를 갈망하는 일반인들에게 실체는 가려진 채 초입에서부터 복잡한 진영논리와 씨름해야 하는 슬픈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실체를 가로막고 있는 이런 프레임을 걷어내는 작업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주류 역사학계의 석연치 않은 학문적 자세와 이해되지 않는 주장들도 드러났다. 이러한 의문들은 주로 주류 역사학계에 대한 것들로, 역사학계를 지탱하고 있는 주축이 그들인 이상 적어도 이러한 의문에 대답할 책무는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논쟁이 정치적 투쟁과 파벌싸움의 양상을 띠게 되면서 이 고대사 논쟁의 쟁점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던 우리 연구팀은 논쟁의 중심으로 뛰어들어 의문점을 풀어보는 계기를 갖게 된 것이다.

(1) 국정화 교과서 관련

먼저 주류 역사학계는 재야사학에 대해 “1974년부터 활동을 개시했던 안호상 등 재야사학자들이 국정교과서 배포 직후부터 포문을 열었지만 초점은 국정화가 아니었다.”라면서 그들의 친일, 친독재 전력을 문제 삼으며 그 의도가 의심된다고 말하고 있다.

문제는 주류 고대사학계 스스로가 일각에서 공격을 받고 있는 부분도 친일 등 전력들이라는 것이다. 즉 친일의 이병도와 그 후학들은 물론, 국정화 교과서에 총대를 멘 학자들(김정배, 서영수, 신형식, 이기동 외) 모두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이었다는 반론이다. 진보사학계 역시 국정화 교과서에 총대를 멘 이들에 대해 유감표시 정도가 있었을 뿐 강력하게 비판한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김상태, ‘고조선 논쟁과 한국 민주주의’ 저자). 더구나 친일 전력의 사학자들 직계인 신진 고대사학자들조차 신문들에 종종 등장해 정부의 고대사 언급을 비판하면서도 이러한 전력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주류 고대사학계의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2) 진보사학계 최고의 역사잡지인 「역사비평」

또한 근현대사 논문을 주로 발표해 왔던 진보사학계『역사비평』(지금은 진보지라 평가하지 않는 경향이지만)이 동북아역사지도 사업 폐기 즈음 엄청난 분량의 고대사 관련 논문(근현대사 논문이 아닌)을 쏟아냈는데, 역시 그 의도가 의심스럽다고 주장한다(재야사학, 김상태). 즉 고대사 분야가 아닌 근현대사 논문을 주로 발표해왔던 『역사비평』에 어느 날 갑자기 주류 고대사학계의 일부 젊은 역사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상고사 문제와 관련한 논문들을 다수 발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서로 다른 학술적 주장을 균형 있게 다루어야 할 학술지가 주류 고대사학계의 일방적 주장만을 실었으며, 더구나 이런 행위가 동북아역사지도 사업 폐기 즈음에 벌어졌다는 점에서 그 의도와 행태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드러난 정황이 사실이라면 균형감을 잃지 않아야 할 학계의 역사잡지(역사비평)가 논란이 많았던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의 폐기 여부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이용된 것 아닌가 하는 점에서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3) 하버드대학 마크 바잉턴 교수의 연구 중단 관련

주류 고대사학계는 동북아역사지도 폐기 사건은 물론 동북아역사재단이 2007년부터 지원(고대 한국 프로젝트)하고 있었던 미국 하버드대학의 마크 바잉턴 교수에 대한 지원 중단도 재야사학이 국회의원 등과 연계하여 사업을 중단시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 주류 역사학계는 “낙랑군 재평양설이 전 세계의 역사학계에서 인정되고 있는 통설이며, 고대 한국 프로젝트팀 역시 그런 통설에 기반하여 연구서를 출간했을 뿐인데 세계적인 통설을 실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차별적 공격을 받고 급기야 사업이 중단되는 충격적 일이 벌어졌으며, 이는 한국 정부가 비이성적 쇼비니즘 단체에 휘둘리고 있음이 국제적으로 공인된 꼴이 되어 국격에도 큰 손상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사이비 역사학의 최근 활동과 주요 사건’, 한국고대사, 고고학 연구소, 기경량).

이에 대해 재야 사학자들은 정작 그들 주류 고대사학계가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의 역사지도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회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세상에 그렇게 한국을 알리고 싶었다면 윤내현의 대고조선론(고조선 위치를 한반도 밖이라 주장, 이하 ‘대고조선론’이라 칭함)도 함께 소개했어야 했으며, 고조선의 재평양설에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양쪽 논문을 모두 발표하고 외국 학자들이 판단하게 했어야 했다는 시각도 있다(김상태).

위 주류 역사학계 주장과 관련하여 연구팀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그들은 ‘낙랑군 재평양설이 전 세계의 역사학계에서 인정되고 있는 통설이고’, ‘세계적인 통설을 실었다는 이유만으로 사업이 중단되는 일이 발생했다.’며 마치 ‘낙랑군 재평양설’이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학설이라는 듯 세계적인 통설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관련된 역사적 사료는 물론 유물마다 주장(연구)들이 일치되지 않고 있는 고대사는 관련 자료나 유물의 부족, 불충분으로 여전히 역사학계의 뜨거운 관심 속에 논란이 진행 중이다. 이처럼 미묘한 사안에 대해 국내의 역사 논쟁을 잠재울 만큼의 권위 있는 세계의 역사학계란 어느 역사학계를 말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만일 국내 고대사에 대한 세계 역사학계의 학문적 결과들이 그렇게 권위가 있는 것이라면 대체 그동안 우리 역사학계는 무엇을 한 것이었다는 것인지 함께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더불어 김상태의 주장처럼 바잉턴 교수에 대한 연구지원이 학자로서 중립적 위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는지도 해명되어야 할 부분이다.

(4) 민족주의 관련

주류 역사학계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또 하나의 이슈는 일제 강점기를 경험한 우리에게도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민족주의’에 대해서이다.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민족주의 역사 서술은 국권 침탈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며, 신채호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국권 침탈로 더 이상 국가와 민족 역사를 동일하게 서술할 수 없게 되자…”라며 신채호의 역사인식이 민족주의에 치우쳐 비역사학적 관점에 머무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역사학자로서의 학문적 활동이 아니었던 대한매일신보(1909.5.28)에 게재한 칼럼 내용(그러한즉 이 제국주의를 저항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가로되 민족주의를 분발할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나라는 우리가 주장한다.)을 근거로 새로운 역사 주체로서의 민족을 강조하고, 그 정체성을 수립하는데 앞장섰다고 주장하고 있다(한국 고대사와 사이비역사학, 젊은 역사학자 모임).

주류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민족주의 역사학’이 어떤 문제를 내포하는 것인지는 논외로 하자. 아니 그 ‘민족주의 역사학’이 그들 주장처럼 문제가 있는 접근법이라고 치자. 그렇더라도 일제 강점기라는 당시 시대상황을 감안할 때, 더구나 역사학자로서가 아닌 개인적인 입장에서 민족 감정을 표현한 것까지 역사학자 자질논란으로 문제 삼아야 한다면 도대체 그 역사는 누구를 위한 역사이며 국사는 왜 필요한 것인지부터 물어야 할 것이다. 제국주의에 맞서야 했던 당시 상황에서 역사학자였다는 이유로 이런 저항의식들까지 포기했어야 했다는 것인지 오히려 젊은 역사학자들에게 되묻고 싶다. 그들은 시대 상황에서의 애국심과 학문을 위한 학자로서의 자세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들 주류 역사학자들 주장대로라면 ‘진정한 역사학자’는 당시와 같은 상황에서도 애국심을 가져서도, 독립운동을 해서도 안된다는 논리 아닌가. 민족주의(또는 그 어떤 공동체 의식)가 배제된 중립적 역사인식으로 일제에 맞설 방법이 있었다면 무엇이었는지 반문하고 싶다.

민족주의(연구팀은 민족주의에 대한 문제는 논외로 하였음) 역사학과 관련하여 윤내현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우리 역사 연구의 현주소를 가늠하게 한다. “해방 후 한국 사학계는 종래 정설 또는 통설이 된 한국 고대사 인식체계(주류 역사학계)와 그것과는 전혀 다른 민족사학자들의 한국고대사 인식체계가 병존했다. 그런데 그 후 민족사학자들의 한국고대사 인식체계는 그 가능성 여부도 검토된 바 없이 적어도 역사학을 전문직으로 하는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발전할 기회도 갖지 못하고 축출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 역사학도들은 한국 고대사의 체계에 관해 서로 다른 주장을 비교, 검토할 기회를 잃고 말았으며, 이런 현실은 역사학도들의 의식을 편견으로 치우치게 할 위험이 있다.”

그러면서 역사학도가 역사적 사실을 바르게 인식하려면 종래 학자들이 어떻게 인식해 왔는가보다는 직접적인 사료에 따라 그 사실을 규명, 확인하는 작업에 더 열심이어야 한다며 우리 나름의 역사 연구의 절실함을 주장한다. 즉 신채호와 같은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의 역사 인식체계를 무조건 민족주의로 몰아갈 것이 아니라, 하나의 학문적 견해로서 인정하고 실증적 비교, 검토 과정을 통해 수용할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5) 친일에 대한 규정이 이분법적 태도에 있다는 주장

한편 ‘젊은 역사학자들 모임’에 참여한 역사학자인 ‘고태우’는 이미 역사를 소재로 뭔가를 생산하는 일은 역사학자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지 오래며, 실증이 아닌 방식으로 오히려 더 적확하게 대중을 ‘과거’로 이끌기도 한다면서 역사학이 대중에게 다가가고자 한다면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전제한 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를 들어 역사 연구 혹은 해석의 틀에서 이분법적 태도에 대한 지적이 많이 제기되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거기에서 그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친일 문제를 생각해보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이들의 행적을 잘 보면 친일로만 규정지을 수 없는 부분도 많다. 우파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성격이었지만 나름대로 도시 발전이나 생활 개선과 관련해 많은 활동을 했던 사람도 있다. 큰일 날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사회운동가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다시 말해 한 사람에게도 여러 정체성이 있을 수 있다는 거다. 인물을 다각도로 해석하면서 인간 이해의 깊이를 더하고 시대상을 다채롭게 받아들이며, 여러 면으로 조각 내 다시 조립할 여지가 매우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 작업을 우리는 얼마만큼 치열하게 해왔을까?”

이 무슨 소린지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역사학에서의 이분법적 태도에 문제가 있다면서(아마도 친일 역사관에 대한 견제를 의미하는 듯) 은근히 친일 인사들의 행적에 대해서도 이분법적 판단은 문제가 있다며 양비론으로 희석하려는 인상이 짙다. 일제 강점 당시 누구를 이롭게 하려고 의도했는지는 상관없이 결과론적으로 후대에서 결과의 혜택을 받게 되면 좋은 것 아니냐며 오히려 사회운동가로 둔갑시키려는 듯한 심각한 문제의식이 발견된다.

우리 민족이 피 흘리며 일본에 유린, 강탈당했던 강점기였다. 일본에 부역했다고 생각하는 인물들도 들여다보면 좋은 일도 했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 사람에게도 여러 정체성이 있을 수 있다면서 본질을 흐리고 희석하려는 젊은 역사학자의 시각에 놀라움을 넘어 위험함이 감지되는 대목이다. 그렇게 따지면 히틀러인들 긍정적이고 인간적인 면모가 없었을까. 참으로 위험천만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외부에서 주류역사학에 대해 친일 식민사관에 젖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의도와 해석을 두고 말하는 것인데, 그들은 자꾸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식민사관의 의미를 들먹이며(정체성론, 타율론 등) 자신들은 그 일본인들과 달리 타율성론을 부정한다는 식으로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이들의 고대사 이론을 식민사학이라 비판하지만 그것은 본질을 잘못 짚은 것이다. 그들이 식민사학자라면 그들 이론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 때문이다.”라던 역사연구가 김상태의 주장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6) 재야사학에 대한 주류 역사학계의 비판

다음으로 주류 역사학계가 재야사학 등의 대고조선론에 대해 영토에 집착하는 비합리적 행위라고 비판하는 부분이다. 그들은 윤내현 등 다른 대고조선론자들에 대해서도 주장 근거에 대해 반론하기보다는 재야사학과 함께 뭉뚱그려 부정하는 방식에 그치고 있다. 아무리 재야 사학의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졌다 해도 엄연히 존재하는 학문적 파트너를 우선적으로 반론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 연후에 재야 사학자들의 행태를 비판해도 늦지 않을 텐데 마치 재야사학자들이 그들의 학문적 파트너이기라도 한 듯 그들의 비판은 늘 재야 사학자들을 향하고 있다는 점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학설에 대한 비판과 반론은 학설로서 대응하고 입증하는 것이 정석일 것이다. 재야사학자들의 주장과 주장하는 방식에는 분명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강단의 역사학자인 그들 역시 재야사학과 같은 방식(사실이 전제되지 않거나 논리의 비약 또는 서로 관련 없는 상황들을 묶어 감정적으로 접근)으로 상대를 비판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라 볼 수 없다.

2. 고조선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의 논쟁이 촉발되었던 한사군 중 하나인 낙랑군의 위치와 관련해서는(「한겨레 21」 길윤형 편집장의 ‘국뽕 3각 연대’) 최근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명확한 결론이 어려운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낙랑군 위치를 두고 강단 사학계와 재야사학계는 양쪽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양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왜 그렇게 고조선에 집착하는 것인지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우리는 왜 고조선에 집착하는가?

고조선은 국가의 기원과 형성에 있어 최초로서 부여, 동옥저, 삼한을 비롯해 삼국(혹은 사국설도 있음)에 이르기까지 문화가 계승되면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우리의 민족사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해서는 중국 요령성지역설, 평양지역설, 요하유역에서 평양지역 이동설이 있다. 반면 김한교 교수는 ‘滿洲’, ‘遼東’이라 불리는 현재 중국의 동북지방은 전통적으로 한국이나 중국의 일부가 아니었으며, 이 공간에서 명멸한 고구려도 이 요동이라는 제3의 영역에서 건립된 국가였다고 파악하기도 한다.[『요동사』(문학과지성사 2004.2.13)]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제 식민주의 사가들은 고조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한국에는 청동기 시대가 존재하지 않았고, 위만집단의 이주와 정복, 그리고 한사군의 설치로 한반도 금속기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 이전 시기는 석기시대로 국가 형태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한국사는 주변성, 종속성, 모방성, 당파성 등 고유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지정학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반도문화에서 기인한다고 왜곡해 왔다.

게다가 고구려사의 무대를 고대 중국의 역사영역으로 보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중국인이 조선 땅에 와서 건국한 나라였으며,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현도군에서 고구려가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영역이 고구려의 주요 영역이니 고구려의 건국과 발전은 중국사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이처럼 중국, 일본 등 주변국들의 이해관계와 일제 강점기부터 비롯된 일제 식민주의 사가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고조선의 위치에 대한 논쟁은 난타전 양상으로 번지는 모양새다. 더 다양한 학자와 학파들의 견해와 학술적인 측면을 다루어야 할 신문들조차 두 집단의 대결구도를 마치 고조선 문제의 본질인양 호도하는 양상이어서 합리적, 과학적인 접근을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일제 식민사학과 환빠나 국빠의 충돌로서만 이 현상을 바라보는 것은 언론의 올바른 자세라 보기 어렵다. 다행히 최근 고조선에 대해 새로운 근거에 의한 전문가들 주장들이 나오고 있어 연구의 영역을 넓히고 학문적 질도 높여가고 있는 추세다.

(2) 고조선은 어디에 있었는가?

고조선의 중심지와 영역 문제에 대한 견해를 검토해 보면 결국 고조선의 위치와 관련된 자료의 대부분이 중국과 접촉하고 있는 지명들에 관한 것으로, 이들 자료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가의 문제이다. 즉 중국 세력과의 관계에서 부각되는 전국(戰國)시대 연(燕)과 고조선의 관계, 연의 요동군 위치, 진장성(秦長城)의 위치, 만번한(滿番汗), 패수(浿水)의 위치, 왕험성(王險城)의 위치, 한(漢)에 의해 설치된 한사군(특히 낙랑군의 위치) 등에 논의가 집중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문제는 한쪽 사료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방식으로 각각의 주장을 전개해 왔을 뿐 그 이상의 진전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인식의 문제점은 낙랑과 왕험성을 동일지역이라고 보는지에 따라 결론이 달리 나타나기도 하고, 낙랑군 설치시점과 왕험성 함락시점이 같은가에 따라 왕험성의 위치가 달라지기도 한다. 고조선의 중심지는 왕험성 근처일 가능성과 현도군 지역과 연결된 지역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이들 두 지역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검토도 요청된다. 특히 현재 평양지역의 유적들을 낙랑군의 유물로 보느냐 아니면 토착세력이 중원문화를 수용했느냐에 따라서도 왕험성의 위치가 달라질 수 있다.

3. 고조선의 실체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진행중

고조선의 실체를 연구함에 있어서 ‘문헌’과 ‘역사유물’은 상보의 관계이면서 상호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고조선과 관련된 문헌의 연구는 상당히 오래되었지만 문헌자료의 부족과 모호성으로 ‘고조선 재평양설’을 중심으로 양 진영이 서로 자신들의 주장만을 고집해 왔던 측면이 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유적의 발굴과 연구에 비교적 많은 진전이 있었고 동북아 역사재단에 참여하는 학자들과 강단 사학자들은 낙랑의 치소가 평양이라는 주장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윤내현과 복기대 등 몇몇 학자들은 재평양설을 부정하고 유물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관점에 있어서도 이들과는 다른 것이 사실이다.

(1) 낙랑 유물의 발굴 상황

평양에서 처음으로 유적의 발굴 조사를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 일본인들에 의해서다. 1909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대동강면 석암리에서 전실묘(塼室墓)를 발굴하고 고구려고분이라고 발표한다. 그리고 평양과 그 주변에 집중 분포되어 있는 유적을 낙랑군과 연관시킨 것은 도리이류조(鳥居龍蔵)다.

1911년에는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태봉리(현재 북한의 구령리)에 대방태수라고 쓰여진 장무이묘(張撫夷墓)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발굴되는데, 묘의 부장 유물들은 이미 도굴되어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작은 철편 2점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고분축조에 사용된 벽돌 중에 양각된 문자가 있는 벽돌들의 발견은 중요한 사료이며, 이 벽돌들에는 ‘使君帶方太守張撫夷塼(사군대방태수장무이전)’, ‘張使君(장사군)’, ‘大歲在戊漁陽張撫夷塼(태세재무어양장무이전)’, ‘大歲申漁陽張撫夷塼(태세신어양장무이전)’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명문에 의해 무덤의 주인공은 중국 하북성(河北省) 계주(薊州) 출신 대방태수 장무이로 알려졌다. 또한 무덤의 축조는 무신년, 즉 서진(西晋) 무제(武帝) 태강9년(太康九年, 288)에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했다.

1913년에는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야쓰이 세이치(谷井濟)가 토성리 토성을 발굴하면서 낙랑예관이라는 와당과 낙랑관련 봉니들이 채집되었다고 알려지면서 서북한 지역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리고 선교리에서 발견된 영광(永光) 3년명 효문묘 동종(銅鐘)도 중요한 고고학적 증거로 삼았다.

1925년에는 동경대학 문학부가 주도하여 205호묘의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 묘에서 오관연왕우인(五官掾王旴印), 왕우인신(王旴印信)이 새겨진 목제양면인(木製兩面印)과 사엽좌내행화문경(四葉座內行花文鏡), 세선식수대경(細線式獸帶鏡), 영평십이년(永平十二年, 서기 69)이라는 1세기 후반의 기년명(紀年銘)을 가진 칠기(漆器)와 입큰항아리[廣口短頸壺]를 출토하였다.

1932년에는 정백리 127호 고분을 조사하던 중 왕광동인(王光銅印)이 출토되면서 낙랑고분의 피장자 중에 왕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다고 추론하였다. 유적 발굴 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은 1935년과 1937년도에 이루어진 낙랑토성의 발굴이다. 그 이유는 발굴조사에서 거의 유일한 생활유적인 동시에 이 토성에서 ‘낙랑예관’銘의 와당 파편과 약간의 봉니 그리고 발량전 거푸집 파편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고고학에서의 낙랑군 연구, PP.10-17, 정인성, 『낙랑고고학 개론』, 진인진, 중앙문화재연구원엮음)

1993년에는 평양 통일거리 건설공사 도중에 정백동 364호 나무곽무덤에서 초원4년의 기년이 적힌 목독과 논어의 구절이 적힌 죽간이 책서로 발굴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윤용구에 의해서 2009년 공개된다. 정백동 364호 무덤은 내외 2중곽 안에 남성 1인을 묻은 단장(單葬)의 나무곽무덤으로 낙랑군부 속리의 무덤으로 추정되었다. 이 무덤에서는 상위계층의 무덤에서 출토된 인장과 벼루, 서도용(書刀用) 환두도자(環頭刀子) 등이 발견되었으며 강단사학자의 대부분은 평양이 낙랑군의 치소임을 밝히는 가장 주요한 자료로 삼고 있고, 일부의 학자들은 이 자료를 중심으로 낙랑군 자체의 인구와 행정조직 등을 통한 낙랑의 형태를 연구하고 있다.(『낙랑군 호구부연구』, 권오중, 윤재석, 김경호, 윤용구, 이성재 동북아역사재단, 2010)

이처럼 평양에서 낙랑에 관계된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와당, 봉니, 장무이묘, 점제현 신사비, ‘낙랑군 초원(初元)4년(기원전 45년) 현별호구부’ 등이 낙랑재평양설의 중심에 있으니 이 유물들을 중심으로 평양을 낙랑의 치소로 볼 수 있는지 살펴보자.

(2) 낙랑유물에 대한 해석

① 와당

유창종 와당박물관 관장은『(와당으로 본) 한국 고대사의 쟁점들』이라는 책에서 와당을 바탕으로 재야 사학계의 낙랑군 요서·요동설을 논박하였다. 평양 토성리에서 출토된 '낙랑예관'(樂浪禮官), '낙랑부귀'(樂浪富貴), '대진원강'(大晉元康) 명문 와당을 그 근거로 들면서, “낙랑이라는 글자가 있는 와당은 이곳(평양)에 낙랑과 관련이 있는 관서가 존재했다는 명백한 증거”라며 “대진원강 와당은 중국 서진의 혜제가 ‘원강’이라는 연호를 쓰던 기간인 291-299년에도 관서가 계속 설치돼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나온 낙랑군 와당을 다량으로 대동강 주변에 옮겨 놓았다거나 와당을 위조했다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라고 비판한다.(유창종, 경인문화사, 2016)

그러나 주홍규는 ‘낙랑기와와 고구려집안기 기와’라는 글에서, 낙랑기와에 관한 연구의 축적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다수의 선행연구에서 낙랑의 유적, 특히 평양지역에 있는 건축지에서 출토된 기와를 전부 낙랑의 것으로 볼 수 있는가에 관한 기초적인 검토가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낙랑기와 중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는 수막새의 분류법과 사용연대에 관해서도 충분한 논의가 진행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P310-311, 낙랑기와와 고구려 집안기 기와, 주홍규,『낙랑고고학 개론』중앙문화재 연구원, 진인지, 2014)

또한 낙랑기와의 연대는 유적의 연대와 결부시켜 결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며. 낙랑의 기와가 발견되는 고분의 경우에는 추가장(追加葬)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으므로 기와의 사용 시기를 단정 짓기는 어렵고, 낙랑토성 출토의 경우도 조영기(造營期)와 수리기(修理期)에 사용된 기와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해서 와당의 명문만을 가지고 시기를 측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하기도 한다.(P322. 낙랑기와와 고구려 집안기 기와, 주홍규,『낙랑고고학 개론』중앙문화재 연구원, 진인지, 2014.8) 정인성도 ‘한반도 서북한 지역의 토성’이라는 논문에서 고구려시기의 건축에서도 낙랑, 대방시기의 와전을 사용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주장하고 있다.(P.79, 정인성,『낙랑고고학 개론』중앙문화재 연구원, 진인지, 2014)

② 봉니

낙랑군 유적에서 출토된 봉니는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수집품으로 현재 국립 중앙박물관에 소장된 99건 197점, 1935년 낙랑토성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후 도쿄대학에 남겨진 15점, 그리고 1937년과 1938년 두 차례에 걸쳐 도쿄 국립박물관에서 구입한 9점이 전해진다. 낙랑 봉니는 1919년 최초 확인되었는데,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정식 발굴품이 아니라 식민사학의 불순한 의도 하에 조선총독부 박물관 주도로 수집되었기 때문에 진위에 대한 의심이 끊이지 않았다. 이후 계속적으로 확인된 봉니들도 대다수가 발견품으로 신고되어 입수되었거나 고미술상을 통해 구입된 발견품이어서 진위 논란은 계속되었다. 이런 연유로 1930년대 위당 정인보는 '낙랑 봉니 위조설'을 제기하였고, 해방 이후 고조선의 재요녕성설에 입각한 북한 학계에서도 '낙랑 봉니 위조설'을 다시 주장하게 된다.

오영찬은 ‘낙랑군 출토 봉니의 진위에 대한 기초적 검토’에서, 다수의 낙랑 봉니들이 진품으로 밝혀졌으며, 일부 진위가 의심스러운 봉니들도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정인보와 북한학계의 주장처럼 낙랑 봉니가 전부 위조품은 아니지만 藤田亮策의 주장대로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구입한 낙랑 봉니에 대해 진위를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따라서 낙랑 봉니 전체에 대한 일방적인 진위 주장을 근거로 낙랑군의 실재나 군현 지배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봉니의 경우에는 개별 유물에 대한 진위 검증을 먼저 하고 역사 자료로 활용해야 한다고도 말한다.(오영찬,『한국상고사학보』88권, 88호, 한국상고사학회, 2015년)

북한 학자 김교경, 정강철은 ‘물성분석을 통하여 본 점제비와 봉니의 진면모’ 라는 글에서 이 지역에서 발견된 봉니의 성분을 분석하기 위해 인근 온천군 성현리 토성 토양 및 락랑토성 토양과 비교하였다. 그 결과 봉니의 주성분 원소 및 Cr, Ce, V 함량이 락랑토성의 토양 성분과 유사한 것으로 나타나 락랑토성 부근의 토양으로 만들어졌다고 추정하였으며 최근 락랑구역의 토성 발굴 당시 봉니가 전혀 발굴되지 않아 이 지역 봉니는 일제의 위조물로 판단된다고 주장한다.(『조선 고고연구 해제집』, PP. 19-23, 김교경, 정강철, 1995년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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