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되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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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6-10-04 조회수 : 219


김중위

“우리나라가 ~~오랫동안 남의 아래에 있어~~그 문을 이름 하여 영은(迎恩)이라 하고 그 관을 이름 하여 모화(慕華)라 함은 무슨 까닭이오.~~천운이 돌아 옛날의 굴욕을 이제 벗어 대조선국이 독립국이 되어 세계만방으로 어깨를 겨누니 이는~~우리 조선국의 유사이래의 광명이오, 우리 동포 형제 2천만인구의 행복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기념할 실적이 없으므로 이에 공공의 의견으로 독립협회를 발기하여 전(前) 영은문 유지(遺址)에 독립문을 새로이 세우고 전 모화관을 새로 고쳐 독립관이라 하여 옛날의 치욕을 씻고 후인의 표준을 만들고자 함이오~~이에 알리니 밝게 헤아려 보조금을 다소간에 따라 보내고 본회 회원에 참입할 뜻이 있으면 그를 나타내 주기 바란다.” (김태웅)

이 글은 1896년 11월 30일자로 발행한 <대 조선독립협회보>1호에 실린 글이다. 옛 영은문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고 옛 모화관 자리에 독립관을 세우고자 모금에 협조해 달라는 광고문이다. 이로부터 만1년만인 1897년 11월 20일에 지금의 독립문이 완공되었다. 황태자의 거금이 큰 몫을 차지했다고 한다.

이 글을 보는 우리의 심정은 청나라가 얼마나 가혹하게 우리나라를 압박하고 속국시하였으면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까지 건립할 생각을 했을까하는 안타까움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 과정을 꼼꼼이 따져 보면 어디인가 석연치 않고 불안한 기미가 엿보인다.

1896년이라면 을미사변(1895년 10월8일의 명성황후 시해))이 일어나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있는 기간이었다.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아관파천을 하였다가 1년후인 1897년 2월 20일에 러시아 공사관에서 나와 경복궁이나 창덕궁이 아닌 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바로 그 기간중인 1896년 7월 2일에 독립협회가 조직되었다.

회장에는 안경수, 위원장에는 이완용이 선임되고 서재필은 미국국적이라는 이유로 고문에 취임하였다. 서재필은 1884년의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1895년 12월 정부요청으로 귀국하여 1896년 1월 중추원 고문으로 취임한 것이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나와 덕수궁으로 간 것은 그동안 보호받고 있던 러시아공사관과 가까이 있고 싶은 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본에 대한 경계심이나 적개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고종이 나라 이름을 조선에서 <대한>으로 바꾸고 환구단에 올라 황제즉위식을 가진 것은 같은 해인 1897년 10월2일이었다. 독립협회가 “대 군주폐하”를 외친 해가 1896년 11월 20일인 것을 보면 독립협회는 고종의 황제즉위식보다 1년이나 먼저 황제선포를 한 셈이다. 아울러 이 시점은 1894년의 청일전쟁으로 청나라가 패배하고 나서 1895년 시모노세기 조약이 체결(4월17일)된 해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1882년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하는 조·청무역협정이 실효된지 한참이나 지난 시점이라는 얘기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몇 가지 의문을 갖는다. 첫번째는 독립협회가 천명한 독립은 어느 나라로부터의 독립을 말하는가 하는 것이다. 내용상으로 보면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말하는 것 같은데 위에서 본 것과 같이 1896년에는 이미 청(淸)이라는 나라는 그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일본의 마수만이 어른거리는 시점이었다.

조선이 청나라의 속방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일본이 조선 침략을 위해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가장 예민한 선결과제였다. 운양호 사건을 일으킨 이후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 까지 일본은 청국에 대해 조선이 청나라의 속방이냐 아니냐를 물으면서 속방일 수 없다는 논리를 수도 없이 내세웠다.

반면에 중국에서는 속방이 아니라고 했을 때에는 일본이 조선침략에 이어 곧바로 중국으로 달려 올 것이 뻔한 일이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속방이라고 우겨 일본의 칼날을 피해 보려고 했다. 말하자면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청일간의 힘의 논리에 의해 우리나라는 자주국이 되기도 했다가 청국의 속방이 되기도 하는 모욕을 감수해야 했다. 독립협회가 독립을 천명하기 20년전인 1876년 2월 26일 한·일수교조약(강화도 조약)에서는 일본이 조선을 자주국이라 천명함으로써 청의 조선 간섭을 배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을 평정한 청국이 조선과 맺은 “조·청수륙무역장정”에서는 청의 종주권을 명시하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간섭을 배제하려고 시도하였다.

조선을 둘러싼 청일간의 이러한 각축도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설계 축조하려는 1896년에는 부질없게 되었는데도 왜 하필이면 일본이 바라마지 않는 독립문을 청나라를 향해 세우려고 생각했을까하는 점이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다.

청나라는 힘이 없어 물러 난 뒤이고 일본에 대한 반일감정은 하늘을 찌르고 있을 때였다. 항일운동은 을미의병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조선 침략을 위해 필요한 것은 조선이 어떤 외국의 간섭도 허용되지 않는 완벽한 독립국으로 존재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러한 시기에 독립문을 세운 것이 여간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어느 학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독립협회의 배후에는 일본제국주의가 도사리고 있고” “서재필은 일본의 주선을 받아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독립문을 세우게 된 것”이라는 주장(<알기쉬운 독립운동사> 박성수 국가보훈처 발행. 1995)은 과연 사실인가 하는 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독립협회는 일본의 간계에 넘어가 일본의 앞잡이가 된 것이나 다름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또 독립문자체도 조선에 대한 일본 침략의 문을 열어놓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밖에 없지 않나 싶다.

특히 1898년 8월 일본수상을 지낸 이등박문이 정탐차 조선에 왔을 때 당시 독립협회 회장으로 있는 윤치호가 독립문을 그린 은다경(銀茶鏡)을 주면서 환대하였다(한영우)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독립문도 일본의 사주를 받아 세운 것이라는 주장이 사실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1898년 10월에 있었던 만민공동회 역시 독립협회 지도부의 일부 친일 인사들을 부추겨 반정부 투쟁을 하도록 유도한 것도 일본이라는 사실에 이르러서는 독립문의 축조의미를 심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 더하여 독립문의 앞뒤로 쓰여 진 글씨조차도 이완용이라고 한다. 비록 그 글씨를 쓴 시점은 이완용이가 친일로 돌아서기 전 독립협회 초기라고 하지만 여간 씁쓸한 기분이 드는것이 아니다.

그러나 개화운동의 중심인물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킬 때부터 일본의 침략 의도를 알지 못한 채 일본의 지원을 통해 일을 성사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보면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매국노 친일파와는 그 개념이 사뭇 다른 존재였다고도 할 것이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청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나 자주적 독립국가로 나아갈 것인가에만 골몰해 있었기에 일본을 우방으로 믿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박은식은 그의 <한국통사>에서 “일본이 이들을 이용하여 청으로 부터의 독립을 권하고 원조까지 약속한 것”을 믿고 “일류 수재들이 일본인에게 이용당해 크나큰 착오를 저질렀으니 애석한 일”이라 말하고 있다. 이를 종합해 보면 독립문의 역사도 어쩌면 부끄러운 역사의 한 단막극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어제의 일이라고 지나쳐 볼일만은 아닌 것같다.

김중위 전 환경부장관

농암 김중위/시인.수필가.前 사상계편집장.4선의원. 환경부장관.UN환경계획 한국부총재.

헌정회 영토문제 특별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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