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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간도를 찾아서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5-06-05 조회수 : 853

 간도를 찾아서 
2010.04.25.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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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전도<대한전도> 1899년(광무 3)

1899년(광무 3)에 학부편집국에서 간행한 조선전도이다.
1896년 개편된 13도의 도별지도와 전도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 지도제작기법과 서양의 근대적 기법이 혼재된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 지도이다. 지도에는 경위선이 그려져 있는데 경선은 중국북경을 기준으로 한 偏東度數를 기초로 하였다.

(출처 :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108169037&qb=6rCE64+E&enc=utf8§ion=kin&rank=6&sort=0&spq=0)
 

간도를 찾아서

(1) 간도란 지명과 그 역사적인 유래

최근 우리 국민을 격분하게 만든 소위 중국의 동북공정이란 괴물의 정체를 벗기고 보면, 동북공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토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으로서, 역사적으로 보아도 명백히 우리 땅이었던 간도를 저들이 영구히 차지겠다는 음모의 국책사업인 것이다.

제대로 된 국사 교육을 받지 못한 일반 국민들에게는 간도라 하면, 이 땅이 무슨 섬이라고 착각할 사람부터 생기게 될 것이다. 평소에 국사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한테는 간도란 생소한 말로 들릴 것이다.

이 간도 땅은 현재는 중국이 점령하고 있지만, 압록강 두만강 이북에 위치하는 땅으로서, 불과 얼마 전까지의 우리 땅이다. 우리가 흔히 만주로 인식하고 있는 이곳은 민족의 발원지로서, 조상 대대로 우리 땅이었으며, 일제 식민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가 차지하고 있던 땅이었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을사년(乙巳年 : 1905년)에 우리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가, 그로부터 4년 후인 1909년에 청나라와 소위 간도협약이란 사기조약을 맺었었다. 이 협잡조약에 의해, 청으로부터 만주철도부설권과 광산채굴권 등의 각종 이권(利權)을 챙기는 조건으로, 간도 땅을 제멋대로 청나라에 넘겨주게 되었다. 이로 인해 오늘날까지 불법적으로 중국이 그 영유권을 행사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문제의 이 간도 땅은 그 지명의 유래가 어떻게 되는가? 본래 두만강 중간의 종성과 온성 사이에 있는 삼각주가 매우 비옥하였다. 이 비옥한 땅에 1860~1870년 무렵부터 인근의 주민들이 이곳을 개간하면서부터, 이곳을 간도(間島)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에, 무산과 온성 사이의 주민들이 도강(渡江)하여 백두산 동쪽 기슭의 기름진 토지를 개간하고는, 이곳을 통칭하여 간도(間島)라 부르게 되었는데, 조선 민족이 개간하였다 하여 개간할 간(墾)자를 써서 간도(墾島)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간도는 결코 먼 옛날의 우리 땅이었던 것이 아니라, 조선조 말기까지도 청나라와의 영유권 분쟁이 있기는 하였으나, 실질적 영유권을 행사한 우리의 영토였다.

이곳은 원래 배달국, 고조선, 삼한시대, 고구려, 발해 등의 우리 옛 땅이었다. 고구려와 발해 때까지는 말할 것도 없고, 발해 멸망 이후에도 고구려의 후예인 여진족이나 혹은 거란족의 지배하에 들어가 있었다. 여기서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거란이니 여진이니 하는 족속의 이름은 시대에 따라 그 이름을 달리 불렀을 뿐이지 다 같은 족속인 것이다.

이들은 요 나라와 금나라를 세웠는데, 모두가 배달겨레의 한 갈래였던 것이다. 요 나라는 고려와 서로 고구려의 뒤를 이은 적통이라고 다투었던 것으로 보아도 우리 겨레의 한 갈래임이 분명하고, 금나라 역시 금실록(金實錄) 첫 장에 금(金)은 고려인 함보가 세웠다고 기록해 놓고 있으니, 금도 바로 우리 역사의 일부가 아닌가 말이다.

그리고 고려 초기에는 북방정책을 펴면서, ‘윤관 장군으로 하여금, 두만강 건너 700 리의 선춘령(先春嶺)에 9성을 쌓고, 그곳에 고려지경(高麗之境)이란 비석을 세웠다’는 고려사의 기록도 있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간도와 연해주 지방이 일시적으로 고려의 세력권 아래 편입되었고, 원나라 부마국 시절에는 요동과 만주 지방을 다스리기 위해서 고려인을 심양왕에 봉했으며, 또 현지의 주민들도 고려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공민왕 때는 최영과 이성계 장군의 활약으로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일시 수복하기도 하였던 곳이다.

원나라 당시에는 원의 위임을 받아 고려에서 통치했던 지역이었고, 후에 당연히 고려에 귀속되었던 땅이다. 이 무렵에 명나라가 건국되고, 명나라에서 북원을 견제하기 위하여 만주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키기 시작하면서 영토분쟁이 일어났다. 이때 하필이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고려는 심양과 철령 지역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조선에 들어 와서는 간도 지역이 완충지대로 남게 되었다. 명나라에서는 너무 먼 지역이 되어 군대를 파견하기에는 실익이 없었던 곳이었다. 그렇게 되자 조선과는 국경조약을 통하여 압록강을 경계로 하고 그 북쪽으로는 철령에 이르는 선을 그어 명나라와 조선의 영토를 확정하였는데, 조선에서는 이 지역이 여진족이 사는 땅이어서, 이들을 통제할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나머지 포기하는 땅이 되어, 이 지역은 또다시 주인 없는 땅이 되고 말았다.

하여간 발해가 망한 뒤에는 여진족이 살게 되었고, 조선이 건국될 당시에도 여진족들이 간도 지방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 지방에는 조선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진족은 조선 초기까지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들이 강대해지자 후에 청나라를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본시 배달민족의 한 갈래였던 이들이 세웠던 청나라가 들어서자 이곳은 또다시 비게 되었다. 그러자 조선의 이주민이 들어가서 이 땅을 개간하기 시작하였다.

청나라에서는 처음 이곳에 주민의 거주를 금하였으나, 산동 지방으로부터 이주민이 몰래 들어가게 되자, 조선 이주민들과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조선과 청(淸)은 1712년(숙종 38년)에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경계를 정하게 되었으며, 이때도 간도 지방이 우리 땅임을 재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관한 역사적 과정을 좀 더 살펴보면, 1712년에 청나라 강희제는 조선과 청의 국경선 획정(劃定)을 위해 사신 목극등(穆克登)에게 ‘백두산 특명’을 하달하여 파견시켰다. 이에 오라(烏刺) 지방 총관인 목극등은 조선인의 안내를 받아 백두산으로 가는 길에 짐꾼과 사냥꾼 등과 합세하여 백두산 천지에 이르게 되자, 백두산의 웅장한 산세에 감복하여 탄성을 내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때 그들은 주변을 정탐한 끝에 조(朝)․청(淸) 간의 국경이라고 인정되는 압록강과 토문강의 분수령에 높이 70㎝와 폭 55㎝의 돌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이때, 청의 사신 목극등은 백 리가 넘는 산길을 노인이 가기 어렵다는 핑계로, 조선 대표인 박권(접반사로 임명하여 파견된 인물)을 따돌린 채, 군관 이의복 등 조선의 하급관리만을 동행하여 일방적으로 정계비를 세웠다고 한다.

비문의 내용에는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 : 서쪽은 압록을, 동쪽은 토문을 경계로 한다]”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조(朝)․청(淸) 간의 국경 말뚝인 소위 말하는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라는 것을 세웠으니, 그때가 1712년 5월 15일이었다.

이로써, 서간도 1만 9천여㎢의 영토 전체는 청나라 땅인 양 되어버리고, 토문강 이동 북간도 지역은 조선의 땅으로 획정된 것이다. 그러다가 1882년(고종 19)에 와서 청나라는 느닷없이 간도 지역에 사는 조선인의 철수를 요구해 왔다.

이는 조선인들의 이주민이 늘어나게 되고, 그곳에서 새로운 생활 터전을 꾸리게 되자, 청나라는 간도 개간사업을 벌인다는 구실로 우리 조선에 조선 이주민들의 철수를 요구하면서 간도 귀속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중하를 보내어, 백두산정계비의 비문에 경계로 되어 있는 토문강은 송화강 상류이므로, 간도가 우리 영토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어윤중을 서북 경략사로 삼아 이에 대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토문강을 두만강이라고 우기게 되고, 회담을 결렬시키면서 간도의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그 뒤 러시아가 간도를 점령하자, 조정에서는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보내어, 간도를 함경도의 행정 구역으로 포함시켜 관리하게 하였다. 한편, 포병을 기르고 조세를 받아 간도가 우리 영토임을 재확인하였다.

이 무렵 조선인은 함경도 관찰사로부터 땅 소유권의 문서를 발급 받고, 지 적부에 등기한 후 세금까지 내고 있었다. 세금을 거두고 있었다는 것은 곧 주권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청나라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간도 거주민들에게 주권을 행사하기시작하자 이로 인하여 10여 차례나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렇게 분쟁이 계속되다가 러․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자, 그 분쟁은 잠시 중단 상태에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905년의 을사조약으로 인해, 우리의 외교권을 일제가 걸머쥐게 되자, 만주를 통째로 삼키기 위한 목적으로 1909년에 간도협약이란 사기조약을 맺어 청나라가 간도를 차지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영토로 편입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 땅이었던 이 간도는, 1905년에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처음에는 간도를 우리 땅으로 인정하여, 자기들이 관리한다며 파출소까지 두고 하더니, 1909년에 소위 간도협약을 통해 저들 마음대로 청나라에 넘겨주었던 땅이다.

당시 대륙 침략에 혈안이 되어 있던 일본 제국의 침략주의자들은, 만주의 안동~봉천 간의 철도부설권과 광산채굴권을 비롯한 각종 이권(利權)을 챙길 수 있는 조건을 전제로 하여, 청(淸)으로부터 얻어내는 그 대가로 청나라에 넘겨주고만 통한의 땅이다.

간도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해 보면, 중국 동북(東北)의 지린성[길림성(吉林省)],랴오닝성[요녕성(遼寧省)],헤이룽장성[흑룡강성(黑龍江省)] 일대를 부르는 통칭으로, 압록강 상류 북안 지역을 시젠다오[서간도(西間島)], 두만강 북쪽지역을 베이젠다오[북간도(北間島)]라 세분하지만, 이 두 지역을 합해 간도라 부른다.

초기철기 국가의 부여(扶餘)와 고대 중앙집권국가인 고구려(高句麗), 발해(渤海), 고려(高麗) 등이 차지하였으며, 조선 후기 이후 조선인의 이주가 한인(漢人)보다 빨라 간토(墾土:艮土)라고 하는 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아 이 간도 땅은 마땅히 우리가 차지해야 할 명백한 우리의 영토인 것이다.


(2) 간도는 반드시 되찾아야 하는 우리 땅이다

앞에서 수차례에 걸쳐 간도는 우리 땅이라고 말해 왔으나, 여기에는 중대한 고민을 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간도에 대한 정확한 면적이 나와 있는 자료를 접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서간도의 위치와 넓이, 혹은 동간도와 북간도의 크기와 넓이가 정확하게 이것이다”라고 나와 있는 문헌적인 자료나 지도를 구할 수가 없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우리가 간도는 우리 땅이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 간도 영유권 문제에서 서간도는 제외할 수 있는 곳이다. 왜냐하면, 서간도는 영유권을 주장할 만큼 역사적 근거가 미약하며 청과 조선의 국경분쟁 지역이 일어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청의 국경분쟁 지역은 백두산을 기점으로 북동쪽 지역으로 비정 되는 북간도와 동간도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간도와 북간도의 경계와 면적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통일된 자료도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 백산학회에서 간도 관련 고지도를 전시한 적이 있었다. 50여 점이 전시되었는데…… 간도를 비정 하는 크기는 모두 달랐다고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간도의 크기가 아니라 백두산정계비의 위치와 주변 지형만을 나타내는 지도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간도에 대해서 그 경계를 나타내는 지도나 별도의 설명이 되어 있는 자료를 쉽게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부득이 그 지도와 문헌(숙종실록 등) 등을 연구하여 간도 크기를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정계비를 나타내는 여러 고지도들은 간도의 크기를 나타내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지도가 아니라, 백두산정계비 지역의 주변지형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만, 그 지도를 보면서 정계비문의 내용을 적용해 보면서 대충 그 크기를 짐작해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놀란 것은, 영토와 관련된 문제는 국가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연구나 자료가 없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간도 문제에 대해서 정확한 크기나 면적, 위치와 경계선 등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조사를 해 보았으나, 이에 대해 접할 때마다 어느 것 하나 통일되어 있거나, 바로 이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자료를 보지 못했다. 심지어 우리가 되찾아할 영토의 면적은 2만 1천 ㎢부터 최고 157만 ㎢에 이르기까지 하도 다양하여 종잡을 수가 없다. 다만, 간도는 약 21만 ㎢라는 자료가 많이 보이는데, 그렇다면 현재 남북한의 면적이 약 22만 ㎢이니, 그 면적의 대강을 짐작해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걱정스러운 문제는 1962년 ‘조․중 변계조약(朝中 邊界條約)’을 통해, 양국 간의 경계는 ‘압록강-백두산 천지-두만강 홍토수’ 에 이르는 선(線)으로 비밀리에 확정했다는데 있다.

그러나 이 통상 비밀조약은 분단 상황에서 북한과 중국 사이에는 유효하겠지만, 장차 남북통일이 될 경우에는 북한의 국경조약을 당연히 승계해야 한다는 국제법의 규약이 없으므로, 통일 한국이 주변국과 국경문제를 다시 협상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 학자들의 분석이다.

 

그리고 ‘조․중 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에 의해, 백두산과 천지를 양분하고, 간도는 중국의 관할로 넘기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이 조약은 현재까지도 유엔에 등록하지 않은 상태다.

그러나 또 한편의 전문가들은 어떤 조약이 원천 무효가 되려면, 이해 당사국이 무효를 주장해야 하며, 국제 법에서는 통상 그 기간을 조약 체결 이후 100년 정도로 보고 있기 때문에 간도협약의 경우 2009년까지가 그 시효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간도이고, 우리가 되찾아야 하는 땅은 어디 어디이고, 그 땅을 찾아야 하는 정당성과 논리는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자신 있게 내어놓은 자료들을 도대체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어찌 한 나라의 주권 국가에서 자기 나라 영토문제와 관련하여 이렇게 무관심․무방비․무체계․무연구․무정책으로 방치할 수 있었는가? 참으로 답답할 뿐이다. 이러고도 어떻게 국가에서 국민들로 하여금 애국을 하라고 권유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아무런 대책 없이 이대로 그냥 있을 수만은 없으니, 아쉬운 대로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한․중 양국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제삼자의 입장에서 만든, 지난날의 지도를 참고하여 보는 것이 그래도 국제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객관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고, 더욱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당시의 청나라 당국에서 나온 지도는 어느 누구한테서도 그 객관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또한, 일본이나 서양에서 만들었던 지도 등은 누가 봐도 그 신뢰성에서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니, 그러한 지도를 참고하여 좀 더 과학적․논리적인 연구로써 보다 설득력이 있는 객관성을 확보하여, 국가적 차원에서의 정책을 수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 땅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의 근거를 알아보는데 참고가 될 자료로서 그간 한국 측에서 간도 영유권을 주장한 간단한 일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869~1870년 : 함경도 지역에 큰 흉작이 들자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가 농경지를 개간하는 조선인들이 급증하게 되었다.

∙1882년 : 청나라가 간도 주민들을 자국인으로 편입하겠다는 방침을 고시. 이에 간도의 조선인들은 조선 정부에“청의 시도를 막아 달라”며 청원.

∙1887년 : 관찰사 조재우(趙在愚)가 조정의 지시에 따라 백두산 부근의 산 과 하천을 둘러보고 을유․정해․감계에 대한 의견서인 담판오조(談判五條)를 보고. 토문이 조선과 청의 경계임을 확인.

∙1897년 : 조선 서상무(徐相懋)를 서변계(西邊界) 감리사로 임명해 압록강 대안인 서간도 지역의 한인을 보호하도록 함.

∙1898년 : 내부대신 이건하(李乾夏)가 함북관찰사 이종관(李鍾觀)에게국계 (國界) 답사를 지시. 경원군수 박일현 등은“흑룡강 하류 동쪽이 조선 땅인데, 청 나라가 러시아에 할양한 것은 용인할 수 없으니, 3국이 회담해야 한다”고 보고.

∙1900년 경 : 평북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압록강 대안 지역을 각 군에 배 속하고 충의사(忠義社)를 조직해 이주민을 보호.

∙1901년 : 변계경무서를 회령에 설치하고 교계관(交界官) 2명을 임명. 무산 과 종성에 분서를 둬 간도 한인을 보호 관할하고 사법행정위생을 담당해 고시문을 내고 일지를 기록.

∙1902년 : 이범윤(李範允)을 간도시찰사로 임명. 간도 지역에서 민의 판적 (版籍)에 든 자가 2만 7400여 호. 남녀 10여만 명으로 조사 됨.

∙1907년 : 김현묵(金賢黙) 외 13명, 주범중(朱範中) 외 13명 등 북간도민들 이“수십만의 생명을 보호해 달라”며 대한제국 내각에 청원문 제출.

∙1983년 : 김영광(金永光) 의원 등 국회의원 55명이〈백두산 영유권 확인 에 관한 결의안〉국회에 제출.

∙1992년 : 한․중 수교에서 간도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특히 수교 조항에 현재의 영토를 존중한다는 내용이 있어 입지를 스스로 좁히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995년 : 김원웅(金元雄) 의원, 국회에서“간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

∙2004년 9월 3일 : 현재 국회 상임위(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국회의원 59인 이 서명하여‘간도협약 원천무효 결의안’이 상정된 상태이다.

이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간도는 역사적으로 명백한 우리 땅이다. 그래서 앞에서 나온 지도를 바라보노라면, 보면 볼수록 옛 선조들을 대하기가 부끄럽지 않는가? 저 광활한 만주 땅을 모두 다 온전히 지키지는 못할망정, 그 일부마저도 못 지키고서 스스로 반도라는 좁은 모서리 땅만을 내 땅으로 알고 있는 우리 스스로가 부끄럽구나!

더 더욱이나 소중한 국토를 사기 당하고도 잃어버린 줄도, 찾을 생각도 않고 있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못난 후손들인가를 각자 생각해 보면서,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함께, 어떻게 하면 우리 땅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하는 과제를 놓고, 온 국민이 머리를 맞대어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쳐서 반드시 이 문제를 풀어내어야만 한다.

이제 우리 국민은 ‘포기하는 자는 포기만이 있을 뿐이다’는 말을 명심해야 한다. 유태인들은 2천여 년 전에 잃었던 땅도 되찾아 나라를 세워 당당하게 세계 속의 이스라엘로 만들어 놓은 사례를 보고도, 우리는 매양 남의 일로만 여기고서 구경만 하고 있을 것인가?

거기에 비하면 고구려의 멸망은 1300 여 년 밖에 되지 않으며, 더구나 발해(699~926)는 멸망한 지 불과 1천여 년 밖에 되지 않는다. 고구려․발해 멸망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우리의 영토는 예전만큼의 광활한 면적은 못되어도, 앞의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계속해서 만주지역의 상당한 면적을 차지해 왔다.

여기서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울 당시의 청나라 오라지방 총관인 목극등(穆克登 : 강희제의 명을 받은 청나라 대표)이 작성한 지도만 보더라도, 당시 조선의 강역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조(朝)․청(淸) 간에 영토 문제로 분쟁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아래의 지도는 청나라의 입장에서 저들에게 최대한 유리한 쪽으로 작성되었다는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옛 땅을 모두 다 되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현실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면, 최소한도로 1909년에 사기 당했던 간도협약 이전까지의 고토(古土)만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되찾아야만 할 것이다.

만주를 우리 영역으로 그린 지도는 여러 가지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국보 248호인 ‘조선방역도’이다. 이와 같이 간도가 왜 우리 땅인가 하는 증거는 우리가 노력하여 찾으면 찾을수록 계속 나올 것이다.

우리는 간도가 우리 땅이란 주장을 할 수 있는 명분과, 역사적인 명백한 사실을 증명할 근거는 얼마든지 있다. 다만, 이를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찾아내느냐 하는 과제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과 지혜를 동원하는 국민총력만이 우리의 운명을 가름할 것이다.


(3) 간도를 되찾으려면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서는 중국의 동북공정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정확히 인식하고 파악하여, 이에 온 국민의 지혜를 모아 나가야 한다. 최근에 방한한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아시아 담당 부부장은, 고구려사 왜곡을 항의하는 외교통상부에 오히려 ‘중국 동북지역의 국경과 영토에 대한 중국의 우려를 해소해 줄 것과, 정계(政界)의 간도회복 주장을 저지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한 바 있다.

이는, 특히 국제법적으로 무효일 수밖에 없는 간도협약에 의거하여, 간도지역을 불법 점유하고 있는 중국이 남북의 화해 분위기가 점차 익어가자 한국의 통일을 염려한 나머지, 조만간 간도 지역에 대한 영유권 분쟁이 다시 제기될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이 지역에 대한 역사적 연고를 확보하고자 하여, 본격적으로 역사 왜곡에 나선 것이다.

동북공정의 주요 연구대상으로 1차 통과된 27개 과제 중, 13개가 동북변경인 간도문제와 관련이 있으며, 6개 과제가 고구려, 발해와 관련이 있으며, 4개의 과제가 간도지역의 족원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동북공정의 목적은 무효일 수밖에 없는 1909년의 간도협약에 의거하여, 불법적으로 점거하고 있는 이 지역의 영유권 고착화에 있음이 명백해진다. 그러나 이미 법(法) 이론상으로 볼 때는 다 무효가 될 수밖에 없다.

일제가 조선의 외교권을 강압적으로 빼앗은 을사조약에 근거하여, 조선을 대신하여 청나라와 맺어진 간도협약은 이미 국제적으로 무효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한일회담 당시, 한일 간에 1910년 8월 22일과, 그 이전의 모든 조약이 무효라고 확인되었다.

그리고 중․일 간에 1941년 이전의 모든 조약이 무효라고 선언되었다. 이에 따라 과거 제국주의 시기의 모든 조약과 협약이 무효가 되었는데, 오직 간도협약만이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유엔에서 인정하고 있는 국제법상으로는 어떠한 나라도 강권에 의한 모든 조약은 무효라고 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로써, 최근 오사카대 경제법과대학 오만 교수는, 당시 조선 총독 사이토 미노루가 외무대신이 주인 히코키치에게 보낸 ‘관비 제 71호’라는 문서를 제시하면서, “간도협약은 1910년 일본이 강제로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것과, 1915년에 맺었던 남몽동몽조약에 의해 조약자체가 무효화됐다”고 말하였다.

이 말을 자세히 새겨보면, 아직까지는 한국이 간도를 되찾을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문제는 역대 위정자들이 그러했듯이 정치인들이 우리 영토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일반 국민들도 우리 국사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보니까, 우리 영토 문제에 관한 상식이 너무나 빈약한 것도 문제라면 문제로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국민정신으로야 어찌 잃었던 땅을 되찾을 수 있겠는가?

아직까지 국제법상으로 잃었던 땅을 되찾은 선례를 보지 못했다. 이렇게 실지(失地) 회복은 쉬운 것이 아니다. 온 국민의 총력전으로 나가도 찾기가 어렵거늘, 관심조차 없다면 아무 것도 될 일이 없을 것이다.

정부는 정부대로 중장기의 정책으로, 전문 학자는 학자대로 학술적인 근거를 찾아내야 하고, 국민 각자마다 정부와 학자들이 하는 일에 호응․협조하는 것만이, 우리 영토 회복에 대한 희망이 될 것이다.

특히, 전문 학자들은 아래에 나오는 지도자료 등을 토대로 하여, 우리가 찾아야 할 영토의 영역이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역사적 근거를 찾아내는 과학적․논리적인 이론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718년 청나라에서 1718년에 제작된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의 유럽판 지도원본 인 듀알드(Du Halde. 1740년), 보곤디(R. de Vaugondy. 1750년), 윌킨슨 (Wilkinson. 1794년)의 지도가 공개되어 있다.

∙18~19세기에 서양에서 제작된 고(古) 지도의 대부분이 간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시하여 놓았다. 프랑스 당빌(DAnville 1737년)의 조선왕국지도, 독일 하세(Hase 1730년), 영국 키친(Kitchin 1745년), 이탈리아(Santini 1778년), 오스트리아 몰로(Mollo 1820년) 등 당대의 유명인이 만든 지도는 두만강 이북 동간도 지역 뿐 아니라, 압록강 서북쪽도 조선의 영역으로 그려 놓았다.

∙1907년~1909년 사이에 일제(日帝)가 제작한 지도에도 간도는 한국 땅으로 그려 진 것이 잇달아 공개되고 있다.



∙18세기 후반 이후 조선에서 그린‘여지도(輿地圖)와 함경도도(咸鏡道圖) 등의 여 러 지도가 나와 있다.

∙프랑스인 De Halde의 지도 중 레지의 비망록에는“봉황성의 동방에는 조선국의 국경선이 있다…”고 하였다.

∙만주가 우리 땅이란 의식은『동국여지승람』전문에 잘 나와 있다. 양성지, 노사 신 등의 학자는‘우리 국토가 (삼천리가 아니라) 만리(萬里)’라 했고, 서거정은 고려 영토에 관해‘동북방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고구려 지역을 넘었다’고 기 록하고 있다

∙규장각에는‘조선정계비구역약도(15504)’와‘백두산정계비도(26676)’및로마 교황청의 조선말의 조선지도(1924년 제작)가 있다.

∙조선 조정에서 1900년과 1903년에 동서북 간도를 행정적으로 평안북도와 함경도 에 편입시켰으며, 주민에게서 세금을 징수하여 행정과 군사훈련비로 충당하였다. 또한, 이 지역에 대한 치안 및 경비를 수행했고, 조선 관병들이 중국의 유민 침투 도 저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여러 기록에 나타난 근거나 수많은 지도에 나타난 증거 자료를 토대로 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실지 회복을 위한 중장기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민간의 사설 연구소 등에서도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선 간도협약 무효를 정부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중국 당국에 통고해야 한다. 먼저 청․일 간에 불법적으로 맺어진 간도협약을 무효화시키고, 협약 이전의 영유권분쟁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에 현재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제출된 간도협약무효결의안이 상임위를 거쳐 국회본회의를 반드시 통과시켜야만 한다. 국회통과는 정치적 의미도 크지만, 실제 국제적으로 간도를 분쟁지역화 하기 위해서는, 외교통상부에서 정식으로 간도협약 무효를 중국 측에 반드시 통고해야 한다.

특히, 국가 간 영유권에 관한 분쟁에서 100년의 시효가 묵시적으로 통용되고 있으므로, 간도협약 100년이 되는 2009년 이전에 시급히 조치를 취하도록 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島嶼)로 한정한 헌법의 내용을 북방 영토를 포함한 내용으로 수정해야 하며, 동시에 교과서와 역사서, 각종 지리부도와 사전 등의 내용에 간도 지역이 포함되도록 해야만 한다.

그리고 국민적 홍보를 통해서 간도에 대한 관심과 영토의식을 기지고 우리의 지혜와 힘을 모으는 일이 중요하다. 본원고(本原稿)에서는 동북공정에 한하였으나, 러시아에게 잃어버린 연해주와 대마도 등 찾아야 할 땅이 너무 많다.

중국에서 찾아야 할 땅만 하더라도 최고치로 잡을 경우, 현재의 남북한의 7배 이상이라는데, 어찌 지금처럼 무관심․무정책․무대책으로 언제까지 팔짱만 끼고 앉아 있기만 할 것인가? 배달민족이여! 대오각성(大悟覺醒)하여 분발하자! 준비하고 힘을 길러 잃었던 내 나라 내 땅을 찾아야 할 것이 아닌가?


5. 진정한 국사 광복을 위하여

우리는 조국 광복 반세기 넘게 허송세월을 보내면서 무엇을 했던가? 아직도 사대와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부끄럽게도 아직도 일제가 가르쳐준 대로 졸졸 따라 외우다시피 하고 있으니, 우리는 언제까지 그 일제의 앵무새 노릇을 계속하고 있을 것인가?

금년은 광복 쉰아홉 번째가 되는 해이다. 조만 간에 회갑의 나이가 되는 긴 세월이 흘러갔지만,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아직까지도 일본 제국주의의 그림자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국사 분야의 식민지적 사관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어 아직도 진정한 광복을 맞이하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 아날 사학의 개창자인 마크 블로흐는, 역사학을 “시간 속의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외형적으로 볼 때는, 비록 조각난 흉물이지만 국토광복은 되었건만, 아직도 우리들의 사고(思考)와 역사만은 일제의 그늘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광복 후 새나라 건설과 동시에, 청산했어야 할 친일 청산은커녕, 광복된 지 반세기가 넘도록 오히려 친일 세력이 우리 사회의 주역이 되어 그들의 세상이 되어 왔고, 지금 이 시간에도 이들은 처벌이 아닌 과거사(식민시대) 진상 규명을 하자는 데도, 얼마나 많은 무리들이 방해책동을 조직적으로 하고 있는지는 온 국민이 다 알고 있는 바다. 이러고도 어찌 우리가 광복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랴!

한 나라의 가장 보편적이고도 기본적인 상식은, 제일 먼저 교과서를 통해 배우게 되는 지식으로부터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 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핵이 되는 교과서의 내용을 보라! 교과서의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교과서에 사용된 용어마저 아직도 일제 용어가 판을 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국사 교과서를 보면, 보면 볼수록 억장이 무너질 지경이다. 저 간악한 일제가 식민지배의 논리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배달민족의 위대하고도 유구한 역사를 잘라내고 깎아내고 하여, 짧게 작게 축소하여 놓았다.

그것도 모자라서 왜곡․날조하여 배달민족사의 형체를 알아보지 못하게 조작해 놓고서, 조선민족의 단점이나 약점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침소봉대(針小棒大)하는 세뇌교육을 통해, 이 나라 백성들에게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게 하는 앵무새를 만들어 놓고 말았다.

이와 같이 일제가 잘 조련시켜 놓았던 앵무새 무리들은, 아직도 이 나라 지식사회의 구석구석에서 잘도 날면서 일제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들이 만든 교과서가! 이들이 가르치는 지식이! 이들이 하는 교육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얻어 이 나라의 장래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어디 교과서뿐이랴! 각종 사전에서 국사와 관련된 내용들을 보라! 조금만 눈을 뜨고 보면, 어느 나라 사람이 만든 것인지 의아스러울 것이다. 여기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으나 나라의 근본과 관련된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당시 지능적인 일제가 고도의 의도성을 갖고서, 역사상 듣도 보도 못한 한반도란 신조어를 날조해 내었다. 배달민족은 오랫동안에 걸쳐 중원(中原)의 주인공이었고, 광활한 만주의 주인공이었던 우리가 어찌 반도란 이름을 가져야 하는가?

일제가 교묘하게 우리 영역을 한정해 준 한반도란 이름을 참으로 여기고 있는 이 땅의 앵무새 지식인들은, 일상의 생활용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교과서나 사전을 만들 때마다 잊지 않는 습관으로 한반도란 이름을 빠뜨리지 않고 즐겨 쓰고 있다.

그래서, 수십 수억 년 전의 지질․지층문제를 이야기할 때도 ‘한반도’, 구석기 시대를 말할 때도 ‘한반도’, 역사의 시원(始原)을 거론할 때도 ‘한반도’란다. 그렇게 말하자면, 우리는 태곳적부터 한반도와 숙명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태생적으로 한반도에서만 살아야 하는 숙명을 타고 났더란 말이냐?

그렇다면, 과거에 만주로 나아간 것도 이민족(異民族)에게 침략을 한 것이 되고, 중원을 차지했던 것도 불법적인 것이 되고, 동시에 간도 땅을 들먹이는 것도 억지 논리가 되고 말 것이니, 과거나 현재나 한반도란 울타리만이 우리 땅이니까 앞으로도 천 년이고 만 년이고 ‘한반도’에서만 살아야 정직한 민족이 되는 것인가?

그러니까, 우리는 만 년 전에도, 앞으로 만 년 후에도 ‘한반도’ 만이 우리 땅인 것이다. 그리하여, 아시안 게임 때도, 올림픽 때도 이 땅의 머리 좋은 사람들이 선동하여 한반도기를 자랑(?)스럽게 들고 들어가서, 경기 때마다 신나게 흔들기도 하고, 때로는 만세를 부를 때도 한반도기를 손에서 놓지 않게 되어버렸다. 이제는 아주 당당하게 한반도기가 태극기를 대신하여 배달민족의 상징 심벌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러고 보면, ‘한반도’란 이름이 참으로 무서운 괴력(怪力)을 발휘하고 있다. 정말로 부끄럽다! 창피하다! 일제가 뱉어 놓은 헛소리를 두고서 광복 반세기가 훨씬 지나도록 아직도 한반도 한반도라니, 어찌 그렇게도 일제의 말을 충실하게 잘 듣고 순종을 잘하는 부끄러운 족속이 되겠다는 것인가?
 
언젠가는 우리가 남북통일이 되어 중국에게, ‘간도는 우리 땅이니 내어 놓아라’고 했을 때, 중국에서 만약에 “무슨 소리냐? 너희는 태생적으로 한반도가 너희 땅이지 어떻게 간도가 너희 땅이더냐? 헛소리하지 말고 당신들 헌법 조문부터 읽어보아라.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당신들의 헌법은 당신들이 만들었지. 우리가 만들었느냐? 괜히 생트집으로 남에게 쓸데없는 시비 걸지 말고, 당신들 스스로 만든 당신네 나라 헌법이나 지키면서, 한반도나 잘 간직하도록 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답변해야 할까? 간도를 내어 달라고 하는 우리들의 입이 쑥스럽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자, 이렇게 일제가 남겨 놓은 용어 하나만 해도 식민사관의 해독(害毒)이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그러면 식민사관만 무서운 것이냐 하면, 중화사대사관의 해악(害惡) 역시 식민사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조금도 덜할 것이 없다. 오히려 수천 년 동안 왜곡․조작하였으니, 우리 동이족의 역사를 더욱 더 질식시켜 놓았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대저, 역사란 무엇인가? 인간 사회가 거쳐 온 변천(變遷)의 모습, 즉 인물과 조직 따위의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자취. 또는 그 기록을 두고 역사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인간 사회가 변천해 온 자취를 기록한 것이 역사다.

그렇다면, 지나간 삶의 흔적을 남긴 기록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중국이 자랑하는 과거의 역사가 과연 누구의 역사였던가를, 중국인들 스스로가 만든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 사전에 의하면,

“단군조선(檀君朝鮮)․하(夏)․은(殷)․주(周)․진(秦)․한(漢)․위(魏)․조(趙)․촉(蜀)․오(吳)․진(晉)․송(宋)․제(齊)․양(梁)․진(陳)․수(隋)․당(唐)․숙신(肅愼)․거란(契丹)․요(遼)․금(金)․몽고(蒙古)․원(元)․명(明)․청(淸)은 모두 조대명(朝代名)이다”라고 나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조대명(朝代名)이란 무슨 뜻의 말인가 하면, 조선(朝鮮)의 대명사(代名詞)란 것이다. 즉 조선을 대신하는 이름이란 말이다. 그래서 이 모두의 나라들은 고조선(古朝鮮)이며 그 후예들이다.

그 외도 위만(衛滿 또는 魏滿)은 물론, 연(燕)나라도 조선(朝鮮)이었다. 그러기에 하조선(夏朝鮮)․은조선(殷朝鮮)․주조선(周朝鮮)․진조선(秦朝鮮)․연조선(燕朝鮮)․한조선(韓朝鮮 또는 漢朝鮮)․수조선(隋朝鮮)․당조선(唐朝鮮)․송조선(宋朝鮮)이라 부른다.

그 중에 위서(僞書)에 의한 자료를 근거로 하여 만들어진 교과서를 통해 들어본 나라 이름들은, 기껏해야 기자조선(箕子朝鮮)․위만조선(衛滿朝鮮)․번조선(番朝鮮 : 弁韓)․막조선(莫朝鮮 : 馬韓)․진조선(眞朝鮮 : 辰韓 또는 秦韓, 晉韓임) 등이다.

이렇게 보면, 한족(漢族)의 역사가 어디에 있는가? 저들이 만든 사전에서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 마음이 바뀌어 느닷없이 동북공정을 들고 나오니 우리로서는 참으로 황당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는 우리는 이웃을 잘못 만난 탓에 중국과 일본에 의해, 우리 역사가 얼마나 많이 왜곡․날조되어, 그들의 의도대로 그들의 조작을 참으로 여겨 오면서, 오랜 세월 동안 기만당해 왔는가를 생각하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치기만 한다.

저들의 조작에 의해, 우리 배달 민족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하였던 바, 우리는 스스로 중화독(中華毒)과 왜독(倭毒)에 취한 줄도 모르고서, 저들이 지어낸 말과 기록만을 믿은 탓에, 우리 역사는 저들보다 짧고 작은 것으로 알았고, 또 저들에게 속아 우리는 항상 그들한테서 모든 제도나 문물을 배우면서 살아 왔던 것처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실제 알고 보면, 우리가 저들한테서 문화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살아온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우리는 조상과 문화문물을 저들에게 빼앗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역사를 통째로 죄다 빼앗겼다 것을 알아야만 한다.

어찌 보면 고구려 멸망 이후, 힘이 있는 쪽에 빌붙어서 사대(事大)를 생명처럼 소중히 해 왔던, 역대 위정자와 지식인들이 보여주었던 그 업보에 의한 결과이니, 우리 스스로가 자초한 이 결과를 두고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할 것이며, 어디에 가서 하소연을 할 것인가?

이제 지난 일에만 얽매여 통탄만 하고 있어서도 아니 된다. 비록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서 맹목적인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에서 벗어나기 위한 국사광복운동을 펼쳐 나가야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만열 국사편찬위원장에 의하면,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복원하기 위해서 국사학의 학문체계를 견고히 하기 위해, 국사편찬위원회는 1998년부터 중국문헌 76종 8968권에 나타난 한국고대사 관련 사료를 집대성하는 작업(고대 사료 집성)을 진행하여, 2004년 말에 완성하여 2005년에 일반에 공개할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을 믿고 싶고 또 기대되는 바도 크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아니 된다. 범국민적 운동차원에서 국사회복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한두 가지의 어떤 정책이나 방법만 가지고는 안 될 것이다. 전 국민의 국사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과 호응도 있어야 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전문 인력을 양성하여 그들을 배려하고 예우하는 풍토조성도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외국인을 상대하는 직업 군에 있는 사람들을 연수시켜 훈련된 홍보요원을 양성할 필요도 있으며, 그 외도 국사 교육 강화의 일환책으로 국가공무원 채용고시를 비롯한, 각종 시험에서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채택할 것과, 각 대학에 영토지리학과를 신설할 수 있도록 적극 권장․장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무엇보다도 국가적 차원에서 현재의 정신문화원과 같은 격의 국사원(그 이름이야 어찌 되든 간에)을 신설하여 우리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와 함께, 그 산하에 영토 연구소를 두어 영토에 관한 보다 과학적이고도 체계적인 연구와, 영토회복을 위한 중․장기적인 계획과 정책을 개발해 내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사대(事大)와 식민사관과 그리고 민족분열주의 사관과 반도(半島) 사관을 완전히 청산하고, 새로운 민족 주체적인 사관을 확립하여 자손만대에 부끄럽지 않는 당당한 역사를 물려주어야 한다. 우리의 진정한 국사광복은 잃어버린 역사와 국토 모두를 회복하는 그 날이 될 것이다.

배달겨레여! 분발하자! 준비하자! 힘을 기르자! 지금의 중국이 무너진 소련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그와 같은 호기가 우리에게도 찾아와주기를 기대하자. 준비하는 자에게는 언제라도 기회는 찾아오는 법이다.

그때를 대비하여 우선 남과 북이 통일되어야 한다. 하나 된 통일의 그 힘으로 민족의 역량을 배가하면서, 위대한 배달민족의 전도(前途)를 우리 당대에 우리 손으로 개척해 나가자! 우리도 저 넓디넓은 광활한 국토를 회복하여 민족의 강성을 꿈꾸면서 나아가자. 저 넓은 만주와 연해주를 되찾는 그 날이 오기까지 웅비하자! 위대한 배달민족이여!


월간『문예사조』《잃어버린 배달 민족사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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