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지역 영유권

 

제목 : 연변의 토지개혁운동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0-10-23 조회수 : 960


http://yanbian.moyiza.com/181243

2010.June.09.수12:17



일제위만시기 연변지구의 토지는 일본경제독점기구와 소수 지주들 손에 집중되여있었으며 대부분 농민들은 토지가 없어 고농 혹은 소작농으로 전락되였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공산당은 농민군중을 지도하여 주구청산, 감조감식투쟁과 결합하여 “공유지”분배군중운동을 전개하도록 함으로써 토지가 없거나 토지가 적은 농민들의 토지문제를 초보적으로 해결했지만 근본적으로 봉건착취제도와 봉건제도계급을 뒤엎지 못했다. 길림성당위는 “군중을 발동하여 주구를 청산하고 토지개혁을 진행하여 동만근거지를 공고히 하자”는 결정을 내리고 전 연변에서 1년 10개월 동안의 토지개혁운동을 벌렸으며 1948년 4월 승리를 거두었다.



연변지구의 토지개혁은 대체로 3개 단계를 거쳤다. 첫 단계는 1946년 7월부터 12월까지로서 주요임무는 군중을 발동하여 구주를 청산하고 감조감식을 실시하고 농회를 건립하는것이다. 당시 길림성당위, 길동분성당위, 각 현당위의 800명 사업소조는 농촌에 내려가 개혁운동을 지도했다. 이 단계에 농민군중들은 농회를 건립하고 “공유지”를 분배했으며 감조감식을 실시하여 농민들의 량식곤난을 해결했다.



둘째단계는 1946년 12월부터 1947년 6월까지로서 중요 임무는 진일보 군중을 발동하여 주구와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빈곤농민에게 나누어주고 봉건세력을 타파하는것이다. 토지개혁사업소조는 “견결히 빈고농에 근거하여 중농을 단결하며 지주를 타격하자”는 투쟁방침으로 빈고농을 핵심으로 한 빈고농단을 조직하여 지주를 투쟁하여 토지를 분배하는 투쟁을 벌렸다.



제3단계는 1947년 7월부터 1948년 4월까지로서 중요임무는 둘째단계에 존재하는 문제를 재검열하고 진일보 군중을 발동하여 봉건세력을 철저히 타파하며 농민의 토지요구를 만족시키는것이다. 이 단계에는 회억대비의 방법으로 낡은 장부를 따져 농민의 계급각오를 진일보 제고했으며 반동지주들의 “검은 토지”와 숨겨둔 총, 식량, 재산을 몰수했다.



1947년 10월 10일, “토지법대강”이 공포된후 길림성당위는 토지회의를 소집하고 각지에서 당조직과 대오를 정돈하여 성분을 갈랐으며 1948년 3월 토지평균분배에 착수했다. 연변지구의 11만 6681세대, 55만 167명 농민이 도합 18만 2064헥타르의 토지를 분배받았는바 토지총면적의 81.72%에 달하고 농촌인구는 인당 4.5헥타르 내지 7.5헥타르의 토지를 분배받은셈이다. 빈고농은 또 집, 가축, 농기구, 량식, 가구와 옷 등 물품을 분배받았으며 1948년 4월 연변지구의 토지개혁운동은 승리적으로 결속되였다.



연변지구의 토지개혁운동은 근본적으로 반식민지, 반봉건의 토지제도를  개변하여 “땅을 부치는자가 땅을 소유하는”것을 실현했으며 농민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 되게 하여 인민정권을 건설하는데 량호한 군중기초를 마련했다.



[연변일보 201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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