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지역 영유권

 

제목 : 력사의 강, 두만강을 말한다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0-09-21 조회수 : 1156


 

 



두만강류역, “호시석노”의 산지



김 관 웅





1. “아버지산”-장백산, “어머니강”- 두만강



우리가 력사의 렌즈를 고색이 창연한 고대문명으로부터 중국 동북과 조선반도 동북면의 망망한 림해와 그가운데로 큰 강, 작은 강들이 종횡으로 흐르는 광활한 대지에로 돌리게 되면 부지중 대자연의 장쾌함에 경탄을 금할수 없게 된다.





동쪽의 높고낮은 산발들, 그중에서 장백산과 소흥안령 산맥이 남북으로 주맥을 이루며 줄기줄기 뻗어내렸고 서쪽에는 대흥안령이 동북쪽으로부터 서쪽을 향해 뻗어갔다. 이리하여 대흥안령, 소흥안령은 동남쪽의 장백산맥과 함께 동북지역의 륜곽을 보여주고있다. 망망한 림해에는 거세찬 력사의 파도가 산골짜기들 사이로 굽이굽이 흘러가는 강의 흐름으로 변하여 머나먼 력사의 기억이 밀림속의 솔바람소리와 산새소리로 변하여 들리는상 싶다.

그중에서도 “아버지산”-장백산과 “어머니강”-두만강은 수천, 수만년을 조용히 말없이 흘러도 무진장한 력사의 이야기들을 담고 지금도 유유히 흘러가고있다.





동북아시아의 많은 유구한 력사를 가진 민족들과 고대국가들은 바로 이 “아버지산”-장백산의 정기를 받고 “어머니강”-두만강의 피줄을 이어받아서 잉태되였고 태여나서 자라났고 개화, 발전하였던것이다.





그 력사의 유구함에 있어서 장백산과 두만강류역은 인류력사에서 가장 유구한 력사를 갖고있는 인류문명의 요람인 닐강류역이나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류역과는 비기지 못한다. 그러나 장백산과 두만강류역, 이 고장의 독특한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은 동북아시아의 력사무대에서 당당한 주역으로 등장했고 동북아시아의 력사에 큰획을 그어놓았던 많은 고대 민족들의 문명의 요람이였다는 점에서는 상술한 세계적인 강들과 그 본질을 같이하는것이라고 생각한다. 태고연한 옛적부터 장백산, 두만강이 낳은 자손들은 장백산의 줄기줄기를 주름잡으면서 산속에서 사냥도 하고 두만강과 그 많은 지류들에서 물고기를 잡고 펑퍼진 언덕과 들판에서 도경화종(刀耕火种)의 원시적인 농업을 영위하면서 살아왔다. 그 사회 규모가 커짐에 따라 당지 자연자원의 제한을 받게 될 경우에 그들은 흔히 밖으로 이동하였는데 그 이동의 방향은 환경의 제약을 받았던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흔히 동쪽이나 남쪽으로 이동하여 중국이나 조선 력사의 거창한 흐름에 합류하기도 하였었다.





이를테면 예맥계통의 여러 부족들은 장백산, 두만강류역에서 살다가 많이는 조선반도로 이동하여 반만년의 찬란한 문화와 력사를 가진 조선문화를 창조했다. 장백산과 두만강류역에서 살아왔던 많은 고대 민족들중에서 중국과 조선의 력사발전의 진전에 심대한 영향을 준것은 단연코 숙신 그리고 숙신의 후예인 말갈, 발해, 녀진, 만족들이였다. 숙신과 그의 후예인 말갈, 녀진은 장백산과 두만강을 비롯한 중국 동북의 깊은 산들과 강변에서 흩어져 살아왔던 동북아시아문명의 주변부에 처해있었던 사람들이였다. 그러나 특히 녀진인들은 중국의 력사상에서 두 번이나 깊은 밀림속에서 걸어나와 중국력사를 창조하는 주역으로 부상하였었으며 그들이 조선력사에도 강력한 영향을 끼쳤음은 주지하는바이다.

녀진은 “주리진(朱里真)”이라고 불렸었다. 그런데 이 족칭(族称)은 녀진의 서쪽에 살았던 동호계(东胡界) 민족들이 녀진에 대한 호칭이였는데, 즉 “동쪽의 사람들”이라는 뜻이였다. 만일 우리가 이 민족의 발자취를 따라 머나먼 서주(西周)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중국의 고대문헌들에서는 이네들을 “숙신(肃慎)” 혹은 “식신(息慎)”이라고 불렀었다는것을 알게 된다.



2. 숙신의 문화브랜드-“호시석노(楛矢石砮)”



기원전 1027년 2월 갑자일 목야(牧野)의 싸움에서 상(商)나라 군대를 격파한 주(周)나라는 중원의 주인으로 군림하게 되였다. 로심초사를 하던 끝에 저승으로 가게 될 주무왕(周武王)은 림종에 13살 나는 아들 송화(诵和)와 나라와 군대의 대권을 모두 동생인 주공단(周公旦, 周公이라고도 함)에게 맡겼다.





주공단은 나라를 고심참담하게 다스려서 국세가 점차 안정에로 나아가게 되자 성대한 축제-“성주대회(成周大会)”를 벌리게 되였다. 그것은 첫째로는 천하의 신하와 백성들 앞에서 권력을 주무왕의 아들인 송화에게 이양하는 절차를 밟으려는것이고, 둘째는 주나라 황실이 천하에 군림하고있는 름름한 국위를 과시하려는것이였다.





이것이 바로 중국의 력사발전의 진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성주대회(成周大会)”이다. 현대의 10주년, 20주년처럼 크게 잔치를 치르는 국경절이라고나 할가.





이 “성주대회”는 동도(东都) 락읍(洛邑, 지금의 하남성 락양시)에서 열리게 되였다. 주무왕은 상나라를 멸한 뒤 도성인 호경(镐京, 지금의 섬서성 서안)이 먼 서쪽에 있어 새로 정복한 동쪽의 광활한 지역을 통제하는데 불리하다는것을 판단하고는 중원의 복판에 자리잡은 락읍을 동방을 통제하는 거점으로 삼으려고 타산하였던것이다. 가석하게도 주무왕은 이 거창한 계획을 실현하지 못하고 타계하였던것이다. 주공은 무왕의 이 생각을 이어받아 드디여 동도 락읍을 금빛찬란하게 건설하였다. 성주대회는 동도 락읍에서 맞는 첫번째로 되는 성대한 축제였다.





주공은 천자의 명의로 조서를 발부하여 천하의 제후들과 동이(东夷), 북적(北狄), 남만(南蛮), 서강(西羌)의 두령들이 이 성대한 집회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사면팔방에 있는 각 부족들의 수령들이 불원천리하고 갖가지 기괴한 복장들을 입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지껄이면서 구름처럼 락읍으로 모여들었다.





락읍에서 소집된 성주대회는 사서(史书)에 가장 일찍 기재된, 각 부족이나 민족의 수령들이 참가한 전국성적인 회의로서 단지 동이(东夷)계에 속하는 부족의 대표만 하여도 10여명이나 참석하였다.





회의가 시작될 때 주변의 소수민족들은 자기 민족이 있는 지리적위치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이리하여 동이(东夷) 제 부족들중에서 회의에 참석한 숙신, 예인(濊人) 1)두령들은 자리에 앉을 때 단(坛)우 서쪽의 북방에 앉도록 배치되였고 고이(高夷)두령이 앉을 위치는 북방 단우 면바로 동쪽에 배치되였다…





"성주대회에 참가하러 온이들은 생업별로 각기 공물을 바치라"는 주천자의 요구에 좇아 후덕하고 호협한 동이 제 부족들이 자기가 진귀하게 여기는 방물(方物)을 갖고왔다. 그때 숙신인들이 바친것은 “호시석노(楛矢石砮)”였다.

호시(楛矢)는 추운 고장에서 나는 나무로 만든 화살대이고 석노(石砮)는 쇠보다 더 딱딱하고 예리한 흑요석(黑耀石)2)으로 만든 화살촉이였다.





이처럼 숙신과 함께 “호시석노(楛矢石砮)”는 그때로부터 몇천년 동안이나 중원사람들은 물론이고 전반 아시아사람들의 머리속에 깊게 각인되여있었다. 그리하여 시체말로 표현한다면 “호시석노(楛矢石砮)”는 세세대대로 숙신계통의 동북민족의 으뜸가는 문화브랜드로 되였던것이다. 



 



주지하다싶이 선진(先秦)시기의 숙신은 진한(秦汉)시기에는 읍루(邑娄), 위진남북조시기에는 물길(勿吉), 수당시기에는 말갈(靺鞨), 송(宋) 및 료금원(辽金元)시기에는 녀진(女真 또는 女直)이라고 불렸고 청왕조시기에는 만주(满洲)라고 불렸는데 이 만족(满族)은 중국 최후의 봉건왕조의 통치민족이였기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3. 숙신의 호시석노(楛矢石砮)를 환히 알고있었던 공자



중국의 고대문헌 《국어(国语)》에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기재되여있다.



춘추시기에 대사상가, 문학가, 교육가인 공자가 제자현인(弟子贤人)들을 데리고 렬국(列国)들을 돌아다니며 유세를 하던중에 진국(陈国)에 당도하였다. 하루는 송골매 한무리가 진나라 임금의 궁전 뜰안에 날아들었는데 그중 몸뚱이에 한자 길이가 넘는 화살이 꽂힌 송골매 한마리가 나무우로부터 떨어져내렸다. 진나라의 임금과 신하들은 누구도 이처럼 예리한 화살을 본적이 없는지라 수상쩍어하다가 갑자기 방금 이곳에 당도한 공자가 생각나 급히 사람을 보내여 송골매와 화살을 갖고 공자가 묵어있는 객관(客馆)으로 가서 가르침을 청하게 하였다.

다학박식한 공자는 그 화살을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 조리 있고도 자신감 있게 대답하였다.



이 송골매는 머나먼 북방에서 왔고 이런 화살을 호시석노(楛矢石砮)라고 합니다. 북방의 숙신인들이 만든것이지요. 이전에 주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웠을적에 그 세력이 머나먼 동북과 남방의 소수민족지구에까지 확대되였지요. 일찍 그들이 각기 본 고장의 이름난 특산물을 갖고 와서 조공을 바친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숙신사람들이 이런 1척 8촌에 달하는 호시석노(楛矢石砮)를 조공하였지요. …3)



공자의 말처럼 북국 오지의 풍토와 인정, 민속을 보여주고있는 호시석노(楛矢石砮)는 처음으로 주나라 조정에 출현하였고 중원사람들의 머리속에 깊이 각인되여 오래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던것이다.





후에 주공단은 자기가 먼곳의 변방 부족들을 복속시킨 풍부한 공적을 널리 선양하기 위하여 숙신의 호시석노(楛矢石砮)를 큰딸 대희(大姬)에게 주었다. 대희가 우호공(虞胡公)한테 시집간 뒤 주공은 진국을 자기의 사위 우호공에게 봉하여주었다. 이리하여 “호시석노”는 대희의 지참품이 되여 진나라에 전해지게 되였던것이다.





공자의 말을 들으면서 진나라사람들은 맘속으로 반신반의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의심이 생기였다. 이를 보고 공자는 더욱 자신감 있게 찍어 말했다.





“정 믿지 못 하시겠으면 창고에 가 찾아보십시오. 아마도 가능하게 이런 호시석노(楛矢石砮)를 찾아낼수 있을겁니다."

진나라사람들은 한바탕 궤와 상자들을 들추다가 궤속에서 정말로 몇백년이나 보관해둔, 모양이 꼭 같은 호시석노(楛矢石砮)를 찾아냈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때로부터 “호시석노(楛矢石砮)”는 중원사람들이 숙신이라는 이 밀림에 사는 부족을 변별해내는 주요한 방법으로 되였고, 또 우리로 하여금 숙신사람들은 당시에 주로는 수렵을 하여 살아가는 수렵족이였음을 짐작할수 있게 한다.



  4. 호시석노(楛矢石砮)의 산지는 어디인가?



예로부터 사람들은 공자도 환히 알고있었다는 호시석노에 대하여 많은 탐구를 하였다.



중국의 사서(史书)들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들을 남기고있다.



석노(石砮)와 피골(皮骨)로 만든 갑옷이 있는데, 단궁(檀弓)은 3척 5촌이요, 그 화살인 호시(楛矢)는 길이가 1척8촌이다. 5)



읍루(挹娄)는 그 화살의 길이가 4척이나 되니 그 힘이 노(弩)와 같으며 화살은 광대싸리(楛)나무를 사용하니 그 길이가 1척 8촌이며 청석(青石)으로 화살촉을 만든다. 옛날 숙신국은 활쏘기를 잘하여 사람을 쏘매 모두 맞고 화살촉에 독약을 발랐으므로 사람에게 맞으면 모두 죽는다. 그 인구는 적으나 살고있는 곳이 험한 산중인데다 이웃나라 사람들이 그 활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들을 정복하지 못한다.6)



호시(楛矢)는 광대싸리(楛)나무가 아니라 벗나무(桦木, 자작나무라고도 함)로 만든다고도 주장하고있다. 벗나무는 일종 추운 고장의 산에서 자라는 나무로서 장백산, 대흥안령, 소흥안령 지구에 아주 무성하지만 중원에는 드물다. 벗나무는 가볍고도 단단한데 줄곧 청왕조시기에 이르기까지 호시(楛矢)는 여전히 녕고탑(宁古塔)장군과 흑룡강장군이 해마다 조정에 조공하는 품목이였다.



어떤 사람들은 또 호시(楛矢)가 가시나무(荆)종류에 속하는 관목이라고도 인정하는데 당지 사람들은 목질이 단단하다고 하여 그것을 “거북뼈다귀(王八骨头)”라고도 불렀다.





석노(石砮)는 일종의 돌로 만든 화살촉인데 길이가 6센치메터이다. 어떤 책에서는 그것을 아주 신비하게 서술하고있는데 “송진이 물속에 들어가 천년이 지나 변한것으로서” “철보다 굳으며” 가히 “칼을 가는데 쓸수 있다”고 한다. 어떤이들은 일종 “흑요석촉(黑耀石簇)”으로서 옛 시호트산, 오호쯔크해의 섬에서 나며 비할바없이 굳고 현대의 강철보다도 강하다고 말하고있다. 혹자는 또 당지에서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옛 화살에 근거하여 호시석노와 보통화살은 별다른 점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7)





아무튼 공자까지 환히 알고있었다는 이 호시석노(楛矢石砮)의 재료와 산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설(异说)들이 분분한 상황이다.

조선조 중기의 학자 리익(李翼, 1681-1642)이 쓴 《성호사설(星湖僿说)》에서는 “숙신의 호노(楛砮)는 천하가 보배로 삼는다.”고 칭찬하고있다.





이것은 호시(楛矢)가 쇠를 뚫는 위력을 가졌기때문이며 그 비결이 후세에 전수되였기때문이라고 할수 있다.

호(楛)란 광대싸리나무를 말하며 그 주산지가 두만강하구의 서수라(西水罗)였으므로 일명 서수라목(西水罗木)이라고도 하였다. 서수라는 오래동안 숙신, 읍루, 물길, 말갈, 녀진인들이 살아왔던 고장으로서 조선조 초기 6진개척이후 지금의 함경북도 경흥군 노서면 서수라동 일대이다. 녀진인들과 대치하고있었던 조선조 초기에 서수라에는 진(镇)이 있어 국경을 수비하는 군대가 상주하고있었으며 그 주요한 무기는 활이였다.8)





활쏘기로 유명하였던 조선조의 태조 리성계도 이 호시(楛矢)를 사용하였던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점은 조선의 문헌기록들에서 알아볼수 있다.



태조께서 대초명적(大哨鸣箭)을 쏘기를 좋아하시여 대나무를 쓰지 아니하시고 광대싸리로 화살을 삼으셨다.



……

우리 태조께서 늘 대우전(大羽箭)을 쓰시여 화살을 삼았다. 9)



이로 미루어보아 숙신의 호시(楛矢)는 고구려를 거쳐서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져왔을뿐만아니라 녀진(女真)이 이를 계승하여 천하를 통일하는 무기로 삼았던것이다. 이 점 역시 조선측의 사서들에서 그 명확한 근거를 찾을수 있다.



현종 21년 여름 4월에 동녀진의 만투(曼斗) 등 60여명이 과선(戈船) 4척과 호시(楛矢) 11만 7600개를 내헌하였다. 5월에 동녀진의 봉국대장군(封国大将军) 소물개(苏勿盖) 등이 말 9필과 과선(戈船) 3척, 호시(楛矢) 5만 8600개를 내헌하였다.10)



여기서 말하는 동녀진은 두만강류역과 조선반도 동북면에 산재하고있었던 녀진부락들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다.



한편 화살촉으로 사용되였던 청석(青石)은 장백산에서 비롯되는 장백산맥에서 나는 특수한 돌이였다. 즉 중국의 고대사서들에서는 “청석(青石)으로 화살촉을 만든다.”11)고 하였고 “이 나라의 동북쪽에 산이 있어 돌이 나오니 그 특징이 쇠를 뚫으며 이 돌을 캘 때는 반드시 먼저 신에게 기도를 드린다.”12)고 하였다.





석노(石砮), 돌(黑曜石)로 만든 화살촉이 장백산에서 비롯되는 장백산맥에서 나온다는것은 많은 고고학적발굴에 의해 증명되고있다. 즉 오늘날 함경북도 경흥군의 서수라를 기점으로 하여 성진, 종성, 회령, 부령 등지에서 장백산에서 나는 흑요석(黑曜石)으로 만든 화살촉이 출토되고있으므로 청석(青石)이란 바로 흑요석을 말하는것이다. 청(青)은 바로 흑(黑)과 그 뜻이 통한다. 이와 같이 예리한 화살촉에 독약을 발랐는데 매년 7, 8월이 독약채취의 적정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독액조제의 원료가 무엇인지는 알려져있지 않다.



5. 숙신과 그 후예들의 후일의 모습에 대한 스케치



주지하다싶이 두만강류역의 오늘날 함경북도 경흥군(庆兴郡)의 서수라를 기점으로 하여 성진, 종성, 회령, 부령 등지는 지금 중국과 조선의 변경지역으로 되였지만 수차에 걸쳐 여러 부족과 민족 그리고 여러 나라에 귀속되였었다. 본래는 북부여의 령역에 속했었지만 숙신의 땅이 되였다가 기원전 108년에 한무제가 이곳에 현도군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뒤 옥저국의 령역이 되여 북옥저에 속했다. 고구려가 일어나자 고구려의 령역이 되였고 고구려가 멸망한뒤에는 발해의 령역이 되였다. 발해가 망하자 녀진이 점하였고 이어서 료금원의 령역이 되였었고 그 기본적인 주민은 녀진인이였으며 조선조의 제4대왕 세종이 6진개척을 추진하기전까지인 15세기 3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녀진족의 주요한 활동지역이였다.





중원의 사적(史籍)들에서 숙신과 그 후예들인 읍루, 물길, 말갈, 녀진을 거론하게 되면 우선 이들은 궁술에 뛰여나고 용맹하고 싸움을 잘한다고 평가를 하군 했다. 숙신 그 후예들인 읍루, 물길, 말갈, 녀진들에게 있어서 말 달리고 활 쏘는것은 거의 매일이다싶이 하는 생산활동이였으므로 이들은 일부러 군사훈련을 할 필요도 없이 일단 전쟁을 할 필요가 있으면 부락의 장정들은 모두 용감한 무사(武士)들로 변하게 되는것이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세기 중엽이후의 두만강류역의 녀진들을 평가하면서 “오랑캐 한사람이 우리 백 사람을 당한다”13)고 하였다. 바로 이런 까닭에 린근의 다른 부족들이나 민족들은 감히 경솔하게 그네들을 건드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단위면적내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산짐승을 사냥하거나 산나물을 채집하여 인구를 먹여살릴수 있는 능력이 제한되여있었기에 취락(聚落)공동체는 일반적으로 그 규모가 클수 없었으며 흔히는 많은 부락들이 깊은 산속에 흩어져 살아왔던것이다. 이런 상황은 15세기 중엽까지도 여전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북방에는 인적이 없는 땅들이 많다. 야인들은 산곡(山谷)간에 흩어져 살면서 늘 이곳저곳 옮겨다닌다. 14)



중국사서(史书)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각기 두령이 있기는 했지만 피차간에 예속관계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늘 서로간의 싸움에서 죽고 죽이는 살륙전이 끊이지를 않았다고 한다. 심산밀림에서 숙신 및 그 후예들은 세세대대로 이러한 삶을 영위해왔었다.





이처럼 이런 “주변부”의 숙신과 그 후예들은 밀림과 강하들이 얼기설기 교착되여있는 백산(白山), 흑수(黑水)사이에서 조용하게 몇천년을 살아왔다. 동호(东胡)나 예맥(濊貊) 같은 기타 부족들이나 민족들이 밖으로 흘러서 이동하고있을 때에도 그들은 의연히 자기 마음속의 세외도원-밀림과 강변들에 만족하면서 자기가 살고있는 다른 고장을 넘보지 않았다. 다만 기타 민족들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그들도 남쪽으로 서쪽으로 얼마간씩 이동하면서 점차 기타 민족들이 이동하면서 비워둔 공간을 채워나갔다.





이 원래 소문이 별로 나지 않았던 민족은 확장하는 과정에서 점차 취락간의 통합을 이루어나갔는데 이른바 “물길 7부(勿吉 7部)”, “말갈 7부(靺鞨 7部)”의 이름으로 차츰 중원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기원 7-9세기에 이르러서 흑룡강하류에 살고있었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이미 송화강류역에 이동하여 속말말갈(粟末靺鞨)이라고 불려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흑수말갈(黑水靺鞨)과 속말말갈(粟末靺鞨)은 모두 고구려에 복속하여 수백년 동안이나 고구려인들의 통치를 받아왔었다. 기원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속말말갈(粟末靺鞨)은 고구려의 유민들과 손을 잡고 발해국을 세웠다. 발해는 백년이상의 경략과 문화발전을 거쳐 바로 지금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두만강류역을 자기의 통치중심으로 하여 동아시아에서 당나라 버금으로 손꼽히는 “해동성국(海东盛国)”을 일떠세웠었다.

10세기초, 지금의 료서, 중부 내몽골지역에서 새로 흥기한 거란(契丹)에 의해 발해국이 멸망되자 발해인들은 두만강류역과 송화강류역으로부터 지금의 료동일대에로 옮겨오게 되였고 흑수말갈은 북방으로부터 남쪽으로 이동하여 북으로는 흑룡강, 남으로는 료동반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였다.





몇천년 동안의 장구한 세월속에서 숙신과 그 후예들의 삶의 공간은 원래의 장백산맥 이북으로부터 두만강류역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반도의 동북부에까지 확장되였고 원래의 흑룡강하류로부터 송화강 상류, 중류 류역에로까지 확장되였다.





바로 이 시기, 즉 기원 10세기로부터 11세기에 이르는 사이에 중국 동북과 조선반도 동북부를 차지하고있었던 말갈인들은 또 하나의 새로운 이름으로 두만강류역이라는 이 력사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하게 되는데 그 이름은 바로 녀진(女真)이다.





“녀진”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이 자그마했던 민족의 물줄기는  력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면서부터 이미 산골짜기의 가냘픈 계곡수로부터 동북아시아 력사라는 이 큰 강물에 합류하여 더는 동북아시아 력사공간에서의 “주변적존재”가 아니라 당당한 주역중의 하나로 화려하게 부상했던것이다.





1644년, 만족 팔기군의 철기(铁骑)가 산해관을 넘어 북경을 점령하고 전국을 휩쓸면서 한족을 위수로 하는 많은 사람들을 죽였기에 청왕조와 만족에 대한 한족을 비롯한 많은 기타 민족들의 감정속에는 많은 저주와 원한의 앙금이 켜켜이 쌓여있는것만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긍정해야 될 점은 다음과 같은것이다.

만족은 중국의 만족이고 청왕조의 력사는 중국력사의 일부분이다. 전부의 중국고대사를 볼 때 청왕조의 황제들은 총제적으로 비교적 나라를 잘 다스렸으며 그중에서 강희황제(1662-1722년) 같은분은 중국력사에서 가장 현명한 황제의 한분이였다.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이룩한 강희황제는 “정관지치(贞观之治)”를 이룩한 당태종 리세민(627-649년)과 마찬가지로 모든 중국인들의 긍지이고 자랑인것이다.





그리고 청나라말기에 와서 짜리로씨야에게 적잖은 령토를 빼앗기기는 했지만 960만평방킬로메터나 되는 오늘날의 중국의 광활한 국토는 청왕조시기에 다져진것이였다.

청왕조와 만족의 력사에 대한 평가가 보여주다싶이 우리 중국에서 많은 정서화된 력사평가의 규범들이 아주 정당한것 같고 그 전통이 오래되였지만 아주 큰 불공정성을 갖고있음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한다.



주해:



1)예(濊)는 동이(东夷)의 한 부족으로서 상주(商周)시대에는 주로 지금 중국 동북지역의 송눈평원에서 살고있었고 맥(貊)은 주로 중원 각국의 북부에 분포하여있었다. 춘추시기에 이르러 일부분의 맥족들이 지금의 료녕성 동부와 길림성 남부지구에 이동하여 예족과 맥족은 가까운 이웃으로 되였다. 전국시기에 이르러 예족은 맥족과 융합하기 시작하여 량한시기에는 하나로 통일되여 예맥족이라는 족칭으로 불리게 되였다. 부여, 고구려, 백제 등은 모두 이 예맥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2)흑요석은 흑요암(黑耀岩)이라고도 함. 천연적인 화산유리로 된 암석으로서 쪼개여 예리한 모서리를 만들기 쉬우므로 선사시대에 돌칼, 석촉 등으로 많이 리용되였다.



3)《国语· 鲁语下》



4)黄斌、黄瑞《走进东北古国》,远方出版社,2006年, 第38-39页。



5)《晋书 · 肃慎传》



6)《三国志 · 魏志 · 东夷传》



7)黄斌、黄瑞《走进东北古国》,远方出版社,2006年, 第38-39页。



8)《룡비어천가》 제27장.



9)李翼《星湖僿说》



10)《고려사 · 세가》 권5



11)《삼국지 · 위지· 읍루전》



12)《진서 · 숙신전》



13)吴含辑本《世宗大王实录二十一》,제235페지.



14)吴含辑本《世宗庄宪大王实录一》,제325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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