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지역 영유권

 

제목 : 두만강과 도문강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0-09-21 조회수 : 1267




 

 > 2009-9-16 10:33:00 조회 : 120 

두만강과 도문강(1)  

사이섬 단상

                                  

김 관 웅

2007년 6월 10일, 오전 우리 일행 다섯은 선구촌 두만강에 있는 사이섬을 돌아보려 승용차를 타고 나갔다. 

사이섬, 우리 중국조선족에게는 얼마나 눈물겹고 또 얼마나 유정한 이름인가.

중국과 조선의 국경인 두만강 복판에 있어서 두 나라 사이에 있는 섬이라고 해서 사이섬이라는 이름이 붙혀졌다고 한다.

19세기 중반이후 두만강 동안(東岸)에 살고있던 농토가 부족한 가난한 조선 농민들은 두만강 복판에 있는 사이섬 농사로 모자라는 식량을 보충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점차 담이 커져서 월강죄(越江罪)를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너와 중국 땅에서 숨어서 여름에는 가만가만 도적농사를 하고 가을에는 타작을 해서 곡식마대를 소잔등에 싣고는 다시 처자식들이 있는 조선으로 건너갔다가 한다. 그러다가 발각이 되거나 밀고를 당하게 되면 이네들은 자기들은 월경을 한 것이 아니라 두만강의 사이섬에서 농사를 했다고 우겨댔다고 한다. 이리하여 “사이섬” 또는 “사이섬 농사”는 두만강 동안(東岸)의 조선의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수십년간 아주 입에 오른 말로 되었다. 그 후 청나라정부의 허락으로 수많은 조선농민들이 합법적으로 중국 땅에 건너와 정착하여 살게 된 후에 사이섬이라는 이 말은 아예 조선족이주민들이 살고 있는  고장 전체를 지칭하는 지명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간도이다. 사이섬을 한어로 번역하면 간도(間島)가 되기 때문이다. 

중국과 조선 의 국경선인 두만강 사이에 끼여 있는 사이섬, 어쩌면 사이섬은 중국조선족의 정체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정판룡 선생이 중국조선족문화의 성격을 이중성격으로 해석한바 있는데, 그것은 중국조선족이 중국문화와 조선반도문화의 요소들을 겸비하고 있다는 뜻이다.

개산툰 선구촌 두만강 강가에서 사이섬을 둘러보면서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생각이 착잡하고 복잡한 것처럼 두만강도 무척이나 흐리고 혼탁했다. 무산철광 선광장에서 흘러나오는 공업오폐수로 두만강이 몹시 오염되여 있었기 때문이였다.

사이섬은 또한 조선의 기민들에게는 또한 희망의 땅으로  넘어가는 발판이기도 하였고 사이섬 넘어 중국 땅은 죽은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생명의 땅이기도 했다.  선구(船口)라는 이 지명도  나루터라는 뜻이다. 중국조선족의 조상들은 조선에서 이 선구의 나루터를 거쳐 중국에 첫발자국을 내디뎠을 것이다.

이 선구의 사이섬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조선의 이민들은 중국 국민으로 되는 첫 발자국을 떼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몇 년 전에 중국 쪽 선구 두만강 변에  세워졌던 사이섬 기념비는 자라나는 중국조선족의 젊은이들에게 민족정체성의 교육을 받게 하고 중국국민으로서의 자각성을 높이게 하는 좋은 교육장소로 활용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1993년 나는 미국 방문 시에 영국계 이민이 북아메리카대륙에 첫 발을 딛게 된 등륙지점을 참관한 적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보스턴의 해변가의 메이플라워호란 배가 닻을 내린 지점을 훌륭한 관관명소로 활용하고 있었다. 

개산툰 선구의 두만강가의 사이섬도 이처럼 활용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2007년 6월 11일 연길에서   

두만강과 도문강(2)  

두만강 상류 류역은 청나라 황실의 발상지

                                  

김 관 웅

 

두만강 중상류 류역은 흥룡지지(興龍之地), 즉 청나라 황실의 발상지역이다.

청태조 누르하치의 조상은 바로 알타리(斡朶里) 부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알타리부락은 지금의 조선 회령을 중심으로 하는 두만강 중, 상류 량안에 있었으므로 연변의 룡정시, 화룡시의 두만강 류역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두만강 류역은 고구려시기에는 고구려의 판도에 속했고, 발해시기에는 발해의 중심지역이였고, 금나라시기에는 금나라의 판도에 속했으며, 명나라가 서자 두만강 류역의 오도리(斡朶里)부락은 명나라에 의해 건주위로 설치되였고, 는 건주위도지휘사로 책봉 받았다. 이해가 바로 1406년이였다.

오도리부락의 추장인 맹가테무르(猛哥帖木兒)의 성(姓)은 동(童, 또는 佟 )씨이므로 동맹가테무르(童哥帖木兒)였고 그의 부친은 동휘후(童揮厚), 아들은 동창(童倉)이라고 했다. 명나라시기에도 누르하치(努兒哈赤)를  동누르하치(佟努兒哈赤)라고 불렀으며 명나라 말기에는 동노(佟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이로부터 청나라 황실의 성은 동(童, 또는 佟 )씨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동(童, 또는 佟 )씨들의 본거지는 바로 두만강 동안(東岸) 함북의 알목하(斡木河), 즉 지금의 조선 함북 회령지방이였고 이들의 부락의 이름은 오도리(斡朶里)부락이였다. 

그러나 알타리 부락은 동시에 조선왕조와도 관계를 맺고 조선왕조로부터 만호, 부만호, 사직호군 등 벼슬에 책봉되기도 했다. 당시 힘이 약했던 여진인들은 명나라와 조선조에 다 빌붙으려고 했다. 두만강 류역의 오도리 등 여진부락을 두고 명나라와 조선조는 여러 번 협상을 했고 어떤 문제는 해결됐지만 어떤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이러는 와중에서 오도리부락은 많은 타격을 받게 되었고 나중에는 세종시기의 조선의 육진개척으로 말미암아 파저강(波猪江)일대로 이동해갔다. 파저강으로 옮겨간 오도리부락의 주력은 후일의 건주위 누르하치부로 탈바꿈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두만강 류역의 조선족과 여진족들은 오래동안 싸움도하였지만 서로 통혼도 하였고 또 그래서 조선 함북사람들의 피 속에는 여진인들의 피도 많이 섞이게 되었다. 바로 이런 까닭에 함북의 경원, 경흥, 종성, 회령 등 여러 군들에서는 오래전부터 알타리부락 및 청태조와 관련된 많은 전설이나 민담이 류전되여 있는 것이다. 

 2007년 6월 12일 연길에서 

두만강과 도문강(3)  

“두만강” 考

                                  

김 관 웅

 

두만강은 조선에서는 두만강(豆滿江)이라고 표기하고 중국에서는 도문(圖們江)이라고 표기한다.

여기에서 문제시 되는 것은 강(江)이라는 낱말이  아니라 강(江)을 수식하는 두만(豆滿)이나 도문(圖們)이라는 낱말이다. 

그럼 이 두만(豆滿)이나 도문(圖們)이란 이 낱말은 어디에서 왔는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낱말은 만주어에서 왔다.

조선왕조의 건국서사시인 《룡비어천가(龍飛御天歌)》卷七 제5장의 주석에는 “女直은 바로 斡朶里豆漫夾溫猛哥帖木兒, 火兒阿豆漫古論阿哈出, 托溫豆漫高卜兒閼이다”라는 말이 있다. 두만(豆漫)이란 만주어로서 한어로는 만호(萬戶)라는 뜻인데, 녀진부락의 추장들을 녀진사람들은 두만이라고 일컬었고 조선왕조 때에서 조선사람들도 두만강연안의 녀진부락의 추장들을 두만(豆漫)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두만강(豆滿江)은 녀진인 부락의 만호(萬戶), 추장 또는 왕들이 살고 있는 강이라는 뜻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2007년 6월 13일 연길에서

두만강과 도문강(4)  

두만강 하류와  리성계의 전설

김 관 웅

 

두만강 하구의 동안(東岸)인 경흥, 경원은 리성계의 조상이 살던 곳이다. 때문에 이 고장에는 두만강과 리성계를 빙자한 이야기가 수백년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적지(赤池)》전설이다.

옛날에 리성계가 경흥(慶興)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늘 이곳에 있는 큰 못에 나가서 낚시질을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낚시질을 하다가 졸음이 와서 깜박 졸고 있는데 비몽사몽간에 어떤 백발이 성성한 하얀 늙은이가 나타나서 “나는 이 못에 사는  주인이요. 요새 어떤 나쁜 놈이 나타나서 내가 살고 있는 이 못을 빼앗으려 해서 날마다 싸우고 있는데 내 혼자 힘으로 이길 수 없으니 당신이 좀 도와서 그 나쁜 놈을 물리쳐 주오. 당신의 관상을 보니 나라를 얻을 관상이요. 나를 도와서 그 몹쓸 놈을 몰아내 주면 나도 당신을 도와 나라를 얻게 해주겠소”하고 말했다.

리성계가 깨여보니 꿈이였는데, 꿈치고는 이상한 꿈도 있구나 하고 별로 마음에 두지 안했다.

다음날 리성계가 전과 같이 그 못으로 낚시질하러 갔다. 한참 낚시질을 하고 있는데 별안간 못의 물이 뒤끓고 출렁거리고 야단법석하더니 황룡과 흑룡이 뒤감겨 물우로 불쑥 솟아올랐다. 리성계는 이것을 보고 너무나 끔찍해서 아무 짓도 못하고 보고만 있었다. 그러더니 못은 잠잠해졌다.

그날밤 그 백발 로인이 꿈에 나타나서 “어째서 내가 부탁한 대로 나를 도와주지 안 했는가?”하고 힐난하듯이 말했다. 리성계는 “누가 누구인지 알아야 도울것 아니요. 그러고 내가 돕늗다면 어떤 수로 돕는거요?”하고 말했다. 노인은 “황룡은 나이고 흑룡은 내 못을 뺏으려 하는 놈이요. 당신은 활을 잘 쏘니 흑룡이 물우로 솟아오르면  그놈을 향해서 한 대 쏘시오”하고 말했다.

다음날 리성계는 활을 가지고 그 못으로 갔다. 이윽고 못 물이 뒤끓고 출렁이며 야단법석하더니 황룡과 흑룡이 뒤감겨서 물우로 솟구쳐 올라왔다.  리성계는 활시위에 화살을 먹여가지고 흑룡을 겨냥하고 한 대 쏘았다. 그랬더니 흑룡은 화살을 맞고 몸둥이를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꿈틀거리면서 빨간 피를 많이 흘리면서 달아났다. 이 흑룡의 몽에서 흘러나온 피가 이 못의 물을 빨갛게 물들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못을 《적지(赤池)》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화살은 맞은 흑룡은 견딜수가 없어서 몸을 비틀거리면서 바다 쪽으로 갔다는데 룡이 몸을 비틀거린 자리는 땅이 깊이 패여서 강물이 흘러가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두만강의 하류 쪽에는 이란 구비진 데가 있는데 그것은 흑룡이 도망가면서 패여져서 된것이라고 한다.

이 구비진 구비는 아흔 아홉 구비인데 만일에 이 구비가 백구비였다면 경흥이 서울이 되고 리성계는 더 큰 나라를 차지하게 됐을 텐데 이흔 아홉 구비밖에 되지 안해서 경흥은 서울이 되지 못하고 리성계도 조그마한 조선 땅만 차지하게 됐다고 한다. 

전설은 전부 허구인 것은 아니다. 전설 속에는  일정한 정도의 력사적 사실이 들어있게 마련이며 그 력사적 사실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데서의 핵심으로 되는 것이다. 조선조 초기의 학자 정린지가 지은 리성계의 건국송가인 《룡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는 리성계의 가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 목조(穆祖)가 전주(全州)에 살았다. 관가의 기생일로 지주(知州)와 틈이 생겼다. 지주가 모해를 하여 목조는 강원도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겨가 살았다. 백성 가운데 따라서 옮기려고 한 집이 1백70여 가구가 되었다. 후에 새로 안련사(按廉使)가 왔는데 목조와 오래된 혐의가 있었다. 목조는 장차 그가 온다는 말을 듣고 가족을 끌고 바다로 해서 함길도 덕원부(德源府)에 이르러 살았다. 1백70여 가구가 모두 따라갔다. 이미 천하가 원(元)나라에 돌아갔다. 알동(斡東, 오동)지방으로 옮겨갔다. 원나라는 목조를 5천호의 다루가치(達魯花赤)으로 삼았다. 동북지방 사람들이 모두 마음속으로부터 붙좇았다. 왕업이 일어난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였다.” (《룡비어천가(龍飛御天歌)》제3장)

알동(斡東, 오동)지방은 지금의 조선 함북도 경원군 경내에 있다. 바로 양수진, 훈춘 두만강 건너편로서 정린지의 말을 빈다면 조선왕조 500년의 왕업은  “이로부터 시작되였다.” 리성계의 조상인 목조와 익조는 오래 동안 오랑캐와 같은 곳에 살았다. 두만강 중하류, 즉 알동에 살았던  오랑캐는 바로 올량합(兀良哈, 오랑캐), 올적합(兀狄哈, 우디거), 알타리(斡朶里, 오도리) 이 세 녀진족 부락을 가리키는 것이다. 리성계의 조상들이 “오랑캐와 같은 곳에서 살았다”는 기록도 아주 상세하다.

“목조가 알동에 살 때 녀진(女眞)의 여러 천호(千戶)들이 사는 곳에 가면 저들은 언제나 소와 말을 잡아 며칠씩 향연을 베풀었다. 여러 천호들이 알동에 오면 목조도 역시 그와 같이 대접하여 드디여 자주 서로 연회를 열었다. 익조(翼祖)도 이것을 이어받아 그대로 했다. 후에 익조의 위엄과 덕이 점점 커지자 여러 천호의 아랫사람들이 모두 익조에게 마음으로 붙좇았다.” (《룡비어천가(龍飛御天歌)》제4장)

그러나 수렵과 어렵을 주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녀진족들간의 내부분쟁 역시 심했다. 녀진 부락들중에서의 익조의 위상이 높아지자 이를 시기하여 모해하려고 한다.

“여러 천호가 이를 싫어 하여 모해하려고 다음과 같이 속여 말했다.

‘우리가 북쪽에 사냥을 갔다 올테니 청컨대 모임을 20일 동안은 하지 맙시다.’

익조가 응낙하였다. 그러나 기일이 지나도 오지 않으므로 익조가 몸소 해관성(奚關城, 훤잣, 해관성의 동쪽으로 7리 떨어진 곳에 훈춘강이 있고, 서쪽 5리에 두만강이 있음)으로 갔다. 길에서 머리에 물통을 이고 손에 밥그릇 하나를 들고 오는 한 로파를 만났는데, 익조가 갈증이 나서 물을 마시려 하자, 로파가 그릇을 닦아 물을 담아 올렸다. 그러면서

‘공(公)께서는 모르고 계십니까? 이곳 사람들이 사실은 군대를 부르러 간 것입니다. 당신의 위엄과 덕이 아깝기 때문에 내가 애기하지 않을 수 없군요.’

라고 말했다. 익조가 황급히 돌아와 집안 식구들에게 배를 타고 두만강을 좇아 내려가 적도(赤島, 불근섬)에 모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손부인과 함께 경흥 뒤언덕에서 알동의 들판을 바라보았더니 적병이 들판에 가득하고  선봉 3백여인은 이미 가까이 왔다. 익조와 부인은 말을 달려 바다가 언덕에 이르렀다. 해안으로부터 적도까지는 6백보쯤 되었다. 본래 여기는 밀물, 썰물이 없고, 깊으므로 건널 수가 없는 곳이다. 그러나 약속한 배는 아직 오지 않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물이 빠져 1백여 보 정도만 물이 남아 있었다. 익조와 부인이 백마 한필을 같이 타고 건넜다. 따르는 사람들이 다 건너자 물이다시 크게 일어 적이 왔으나 건너지 못하고 돌아갔다. 북방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하늘이 한 일이지 사람의 힘으로 된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익조는 드디어 움집을 만들어 살았는데 그 터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알동 사람들은 익조가 적도에 있다는 말을 듣고 모두 붙좇아 왔다. 후에 익조가 덕원부로 돌아가 살 때 경흥 사람으로 따라온 사람이 시장에 오는 것 같이 많았다.”( (《룡비어천가(龍飛御天歌)》제4장)

여기서 덕원군은 함경남도 덕원군을 가리킨다. 덕원군으로 올 때도 수많은 녀진사람들이 익조를 따라왔음을 보여준다. 후일 리성계가 왜구를 소탕하는 가운데서 많은 건공을 세운 데는 퉁두란(후일의 리지란) 같은 녀진족장병들에 의지했기 때문이며 위화도 회군 때에도  녀진족장병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2007년 2007년 6월13일 연길에서

두만강과 도문강(5)  

“滿族始祖神話”考

                                  

김 관 웅

만족은 장백산 동북쪽에 있는 부쿠리산(布庫里山) 아래의 부러후리(布勒瑚里)라고 하는 못가에서 기원되였다고 한다.

어느날 하늘에서 세 선녀가 날아내려 이 못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는데 맞이는 은쿠룬(恩庫倫), 둘째는 정쿠룬(正庫倫), 셋째는 부쿠룬(佛庫倫)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목욕을 마치고 못가의 뭍에 오르자 신령스러운 까치가 붉은 색 나는 열매를 물고 날아서 지나가다가 부쿠룬(佛庫倫)의 옷우에 떨궈 놓았다고 한다. 그 색깔이 맑고 아름다운지라 부쿠룬은 심히 소중히 여기면서 거지고 놀다가 그만 입안에 넣었다고 한다. 옷을 입으려고 하다가 그 열매가 그만 배속으로 삼키게 되어 즉시에 감응을 받고 임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부쿠룬은 두 언니들을 보고 “나는 배가 무거우워져서 언니들과 같이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지 못한데 이를 어쩌면 좋아요?” 라고 말하자 두 언니는 “우리들은 령단묘약을 먹어 죽을 리는 없다. 이건 아마도 하늘의 뜻이다. 네가 몸이 가벼워지기를 기다려서 하늘에 날아올라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하고는 부쿠룬을 내버려두고 하늘로 날아올라 갔다. 부쿠룬은 후일에 사내애를 낳았는데, 낳자마자 말을 하고 신속하게 장성하여 갔다. 그 애의 이름은 부쿠리옹순(布庫里雍順)이라고 지었다. 그 어미는 아들을 보고 “하늘이 너를 낳은 것은 다름이 나니라 너로 하여금 어지러워진 나라를 평정하게 하기 위해서였느니라. 너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하면서 태여난 그 연유에 대해 일일이 알려 주었다. 그리고는 배 한척을 주면서 물을 따라 내려가면 바로 그 땅에 이르게 되는데 선녀는 말을 마치자 별안간 사라져 버렸다. 그 아들은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내려가다가 인가가 있는 곳에 닿았다. 강기슭에 오르자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서 의자를 엮어 만들고 홀로 그 우에 앉아있었다. 이 때 장백산 동남쪽의 어머후이(鄂漠輝, 지명임)에 있는 오도리(鄂多里, 성곽이나 부락의 이름)부락 내부에는 세 성이 있었는데 서로 제가 우두머리노릇을 하겠다고 종일 서로 살상을 하면서 싸우고 있었다. 마침 한 사람이 물을 길으려고 강가에 나왔다가 부쿠리옹순을 보고는 그 행동거지가 범상치 않음을 보고는 부락에 돌아가서 여러 사람들을 보고 “자네들을 다투지 말게. 내가 물 길으러 갔다가 범상치 않은 남자를 보았는데, 아마도 하늘이 이 사람을 낸 것이 틀림없네. 모두 가서 그 분을 배알하도록 합세”라고 말했다. 세 성을 가진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는 싸움을 멈추고 같이 가서 그 사람을 배알했다. 확실히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 이상하서 물었더니 그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부쿠룬님이 낳은 사람이고 성은 애신(愛新, 한어로는 金이다) 죠로(覺羅, 성임)이고 이름은 부쿠리옹순(布庫里雍順)이라고 부르네. 하늘은 나를 내려 보내여 너희들의 내란을 평정하라고 했는니라.”라고 말했다. 이렇게 어머니가 부탁한 대로 말했더니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면서 “이 분은 걸어서 가시게 해서는 안되오”라고 하면서 서로 손과 팔을 결어서 가마를 만들어서는 옹위하여 마을로 돌아왔다. 세 성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싸움을 중지하고 부쿠리옹순을 상전으로 모시고 백리네 가문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했고 그 호를 만주라고 정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만주의 시조이다.

이 신화는 아주 청소한 신화로서 신화발생의 그 지명도 완전히 고증할 수 있다. 어머후이(鄂漠輝, 지명임)에 있는 오도리(鄂多里, 성곽이나 부락의 이름)부락은 바로 지금의 회령을 중심으로 하고 웅거하고 있었던 동맹가테무르가 추장을 하였던 오도리부락을 가리킨다. 어머후이(鄂漠輝)는 만족어로서 조선왕조 초기에는 오음회(五音會, 지명임)라고 기록하였다. 어머후이(鄂漠輝, 지명임)와 오음회(五音會, 지명임) 는 중국과 조선에서의 동일한 만족 지명에 대한 부동한 음역이다. 후에 세종대왕이 두만상변에 륙진을 설치하고 나서는 오음회(五音會)를 회령(會寧)이라고 고쳤는데, 오음회(五音會)라는 이 지방이 안녕해지라는 뜻을 담은 것이다.  

그리고 두만강 류역의 세가지 성을 가진 사람들이란 “올량합(兀良哈, 오랑캐), 올적합(兀狄哈, 우디거), 알타리(斡朶里, 오도리) 이 세 녀진족 부락”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밖에도 “장백산 동북쪽에 있는 부쿠리산(布庫里山) 아래의 부러후리(布勒瑚里)라고 하는 못이 있다”고 했는데 “장백산 동남쪽”이라고 해야 맞다고 본다. 왜냐하면  장백산 동남쪽에 있는 삼지연은 가장 큰 못으로서 선녀가 내릴만한 곳이고 또 그래야만이 부쿠리옹순(布庫里雍順) 거기서 배를 타고 두만강을 따라 내려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일언이폐지하면 “만족시조신화”의 발생 현장은  바로 두만강의 상류, 중류지역이다.

2007년 6월 14일연길에서  

두만강과 도문강(6)  

녀진족과 풍산개 그리고 오랑캐설화 

                                  

김 관 웅

녀진족 그리고 그 후손인 만족은 오래 동안 수렵생활을 해온 민족이기에 사냥개는 말과 함께 만족의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생산도구였다. 이런 까닭에 만주족은  개를 아주 소중하게 여겼고 따라서 개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왔다. 의견구주(義犬救主)형의 민담들이 만족설화에서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조선 함남지방의 풍산개는 바로 오래세월동안 녀진족에 의해 사육되고 길들여진 유명한 사냥개로 사료된다. 풍산은 고구려 때에는 고구려의 판도에 속했고 발해 때에는 발해의 판도로 되었으며 고려에 들어와서도 이 지역에는 오래 동안 녀진족이 거주하였다. 원나라시절에는 이곳에 원의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여 리성계의 아버지 리자춘이 제1일자로 활약했다고 하는데 실은 이 지역의 녀진족 사무를 관장하였다. 고려 말 조선조 초의 리성계와 의형제를 맺고 리성계를 도와 남전북전하면서 조선조의 건국을 위해 불후의 공헌을 세웠던 유명한 녀진족출신의 장군 퉁두란(즉 이지란)이도 비로 지역출신이다. 풍산, 북청을 비롯한 이 지역의 녀진족들은 1945년 8.15광복 후까지 계속 명맥을 이어왔었다.

바로 이런 까닭에 함북과 함남지방에는 만족과 개를 련계시켜 많은 설활들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오랑캐 설화”이다.

조선북부의 녀진족의 시조가 본래 개와 사람 사이에서 태여나서 그 후손을 오랑캐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담을 이른바  “오랑캐 설화”라고 한다.

옛날 중국의 황제가 아들은 많으나 딸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또한 절세의 미인이라 몹시 사랑했다고 한다. 황제는 높은 곳에 북을 매달아 놓고 그 북을 소리를 내는 사람은 사위로 삼겠다고 했으나 누구도 북을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하루는 맹호 같은 황둥개가 찾아와서 자기가 북을 소리를 내겠다고 했다. 황제가 제깐놈이 어쩌겠는가 생각하고 그래보라고 했더니 수백길이나 되는 긴 장대 앞으로 비호같이 달려가서 껑충 뛰여 하늘로 높이 솟아올라 꼬리로 북을 타앙 쳤더니 천지가 진동하는 요란한 북소리가 났다.

황제는 일구이언을 할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그 황둥개를 딸과 혼인시켰다. 황둥개 서방은 밤마다 동침할 때 자기는 좋다고 하는 짓이 그 딸을 핥고 물고 할켜서 황제의 딸은 괴로움을 참다못해 황둥개의 네발과 입에 각기 주머니를 씌웠다고 한다. 그래서 이 황둥개는 “오낭(五囊)”을 낀 개(狗), 즉   “오낭구(五囊狗)”가 되고 말았다.

이 황둥개와 황제의 딸은 자식을 낳자 북쪽으로 쫓겨나 후손을 퍼뜨렸다. 그 뒤  “오낭구(五囊狗)”가 오랑캐로 변하여 북쪽에 사는 녀진족을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설화이다.

또는 두만강 연안의 녀진족 부락의 하나인 올량합(兀良哈, 오랑캐)의 명칭을 오랑캐라고 부르다가 이런 설화를 만들어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올량합(兀良哈, 오랑캐)은 원래 조선 경흥, 경원, 온성, 종성 등지에 살았는데 세종의 육진개척 후에는 두만강 건너 쪽으로  옮겨와 살거나 료녕성 신빈 일대로 이동하여 갔다.

오랑캐는 사실 만주족을 지칭하는 낱말이였으나 후에는 그것이 조선민족을 제외한 많은 이민족을 폄하해 부르는 낱말로 변하기도 했다.

사실 어느 민족이나 자기와 가장 가까웠던 민족과 싸우고 질시하여 왔던 것이다. 조선민족은 수 백 년에 걸치면서 녀진족과 피를 섞으며 살아오면서도 녀진족을 몹시 두려워하고 질시하여 왔다. 특히는 17세기 초반에 두 번에 걸친 호란(胡亂), 즉 녀진족들에 의한 대규모의 침략과 유린을 당하면서 녀진족에 대한 감정이 크게 나빠졌던 것이다.

녀진족에 대한 질시 속에는 공포의 정서가 끼여 있기 마련이였고 또 적지 않은 설화에서는 녀진족에 대한 긍정도 다분히 포함되여 있다. 즉 녀진족에 대해 조선민족은 오래 동안 일종의 질시(嫉視)와 경외(敬畏)라는 량가감정을 갖고 있었다.

2007년 6월15일 연길에서 

두만강과 도문강(7)  

두만강 연안은 天子와 王이 나온 明堂  

                                  

김 관 웅

두만강 류역은 청나라 황실의 발상지이다. 하기에 조선 함북 지역에는 설화에도 두만강과 결부되여 청태조(淸太祖)-누르하치의 탄생담이 수백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특히 회령에서는 그 이야기가 더욱 무성하였다고 한다.

《한국구전설화 ․ 함경북도 편》에 실려 있는 “청태조” 전설을 그대로 옮긴다.

내가 열두서너살 때 會寧서 보통학교로 다녔는데 그때 들은 이야긴데 會寧 西村 - 西村이란 데는  會寧城이 있는데, 西門 밖으로 나가면 거시 斡木河(알목하)라고 하는 강이 있어요. 이거 女眞族으 말인가 봐요. 斡木河를 모르는 사람들은 알목하라고 하지 않고 간목하라고 하지요. 옛날에는 이 斡木河를 中心으로 하여 女眞族들으 세력을 폈던 모양이요.

西村에서 한 삼사립리 가면 五國山城이 나타나요. 이 五國山城 맞은 便에 는 汗城子라는 높은 산이 있어요. 이 汗城子에서 淸太祖 愛新角羅이가 났대요. 어떻게 여기서  愛新角羅가 났던지 거기 대한 이야기를 해보지요.

西村으 건너편 豆滿江 어느 마을에 李座首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에게 過年한 딸이 있었는데 가만히 보니까 임신을 하고 있었어요. 명문 집안의 규수가 출가 전에 애를 뱄으니 리좌수는 대노하여 문초하는 거요. 이거 어떻게 된거냐고. 딸이 사실은 이러합니다. 몇 달전부터 밤이면 문고리를 걸고 자는데도 한 밤중 되면 웬 이상하게 생긴 놈이 와서 문을 확 잡아 당겨 열고 들어와서 강간을 하고 날이 새면 가고가고 하는데 이 일을 부모님한테 말하고 싶으나 너무나 끔찍하고 부끄러워서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했어요.

그래 그 놈이 어떻게 생겼더냐 하니까 그 놈은 시커멓게 생긴 놈인데 털두 꺼멓게 나구 했던데, 사람 모양을 하고 있어도 사람 같지도 않고 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데, 그 냄새는 사람냄새가 아니고 물짐승 같은 냄새가 나더라고 하드래요. 딸의 말을 다 듣고 리좌수는 그 괴물이 뭣이고 어디서 오는 놈인지 알고 싶어서 딸보고 머리맡에 명주실꾸리를 놔두고 명주실 끝에 바늘로 꾀여 두었다가 그놈의 옷자락에 바늘을 꼽아 놓으라고 했어요. 밤이 돼서 그놈이 와서 딸이 아버지 하라는 대로 명주실로 그놈의 옷자락에 꽂아 놨더니 그놈이가는 족족 실이 줄줄줄 풀려서 나갔는데, 명주실이 세 개나 다 풀어진 다음에 멈추드래요.

다음날 리좌수는 동네사람 수백명을 동원하여 명주실을 따라서 가보니까 실은 두만강을 건너서 거기 산이 있는데, 산에는 옛날에 쌓은 성(城)이 있는데, 그 성안의 못으로 명주실이 들어가 있어요. 장정들을 시켜서 못의 물을 다 퍼냈더니 못 밑에 넙죽한 바위 위에 수달이란 놈 한 놈이 명주실이 바늘에 꽂혀서 엎드려 있어요. 리좌수는 이것을 보고 이런 못된 놈이 아무것도 아닌 놈이 남의 딸을 침범했구나 하고 대노하여 당장 뚜드려 죽이고 그 시체를 거기다 버리고 돌아왔어요. 그러고 난 후에 그 괴상한 놈이 오지 안 했는데, 딸이 애기를 낳았거던. 사내를 낳았어요. 애를 나서 키우는데, 리좌수 딸이 이 애가 커서 저의 아버지를 물으면 아버지 묻은 자리라도 가르쳐 주어야겠다고 하고 수달의 송장을 갖다가 어느 바위 틈새에 넣어두었대요.

이아이가 크는데 이 아이 놈이 좀 특이하드래요. 키는 크지 않고 자그마한데 머리가 발그스럼하고 눈알은 누르슴하고 피부색도 발그스름하고 누르스름하고 하드래요. 그래서 사람들이 누르하치라고 부르드래요. 노오랗다고 누르하치라고 하는 거죠. 이 놈이 두만강에 가서 늘 노는데 헤엄을 썩 잘 쳐요. 잠수질도 썩 잘하고. 그래서 물속에서 십리고 이십리고 헤엄쳐서 가고 물속에 들어가서 하고 몇시간이라도 있다가 나오고 하는데, 어느날 風水가 하나 찾아와서 이 아이가 헤엄도 잘 치고 잠수질도 잘 하는 것을 보고 말했어요.

“야, 저어 동해 바다 멀리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 갈라면 물살도 세고 험해서 사람들이 가지 못하는데, 그 바위가 여간만 큰 明堂이  아니다. 너 거기까지 갈 수 있느냐?”고 물었어요. 갈 수 있다 하니까, “그 바위에는 뿔이 둘이 있는데, 왼쪽에 무덤을 쓰면 天子가 나고 오른쪽에 쓰면 王이 난다. 내 우리 부모 송장을 너 줄테니 가서 우리 부모 송장을 왼쪽 뿔에다 걸어놓고 오너라 ”고 말했어요. 사실은 오른쪽 뿔에다 무덤을 쓰면 天子가 나오고 왼쪽 뿔에다 쓰면 王이 나는 것인데, 사실대로 말하면 이놈이 바꿔 걸을 것 같아서 그렇게 반대로 말한 거죠. 그래서 누르하치는 풍수 부모의 시체하고 저의 아버지 뼈하고 짊어지고 그 바위까지 가서 풍수가 하라는 대로 왼쪽 바위 뿔에 풍수 부모 송장을 걸고, 오른쪽 바위 뿔에는 저의 아버지 뼈를 걸고 나왔어요. 나오니까 풍수가 어떻게 했냐 해서 “풍수어르신네가 하라신 대로 왼쪽에 풍수어른신네 시체를 걸고, 오른쪽에는 우리 아버지 뼈를 걸어놓고 나왔습니다”고 말하거든. 풍수는 이 말을 듣고 “이거 다 天命이다. 할 수 없다” 하고서 어디론가 가버렸단 거죠…

두만강 륙진의 어떤 지방의 이야기들에서는 풍수쟁이가 바로 리성계의 조상으로 되어있기도 하다. 그래서 누르하치의 자손은 천자가 되었지만 리성계는 왕밖에는 못 되였다는 것이다. 

리성계의 조상이 누르하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것 없다. 원(元)나라가 두만강 류역을 지배하고있을 무렵에 조선왕조의 태조 리성계의 고조(高祖)인 리안사(李安社, 穆祖로 추존했음)는 원나라에 출사하여 두만강 하구인 알동(斡東)지방의 가루다치가 되여 녀진의 두령으로 있었다고하며, 그 아들인 행리(行里, 翼祖로 추존했음)도 이곳의 천호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므로 리성계의 조상들은 오래동안 녀진족들과 함께 살아왔던 것이다. 리성계를 도와 조선왕조를 세운 공신들가운데도 리지란(李之蘭, 1331-1402) 같은 무장은 바로 녀진사람이였다. 리지란(李之蘭)의 원래의 성은 퉁(佟)씨로서 청나라 황실의 성과 같으며 이름은 쿠른투란티무르(古論豆蘭帖木兒)이다.고려말기에 조선 해안선에서  늘 침노하는 왜구를 정벌하는 싸움에서 리지란 같은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녀진족출신의 장병들은 불후의 공훈을 세우기도 했다.     

두만강 상류인 회령에서는 누르하치 같은 天子의 조상들이 살았었고, 두만강 하류인 경원군(慶源郡), 경흥군(慶興郡)은 리성계 같은 王의 조상들이 살았던 땅이니 칠백리 두만강 연안은 그야말로 明堂자리가 분명한 것이다.

2007년 6월 13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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