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지역 영유권

 

제목 : 사이섬의 유래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0-09-21 조회수 : 1072


 





 



림선옥



 



백두에서 흘러내리는 천리두만강은 제방뚝이란 무언지도 거의 모르고 산곡간을 누비며 출렁이다가 룡정시 개산툰구간 천평벌에 이르러서는 중조 두나라 제방뚝사이로 천천히 흐른다. 이곳 천평별 하단에 개산툰진 선구촌 제6촌민소조가 자리잡고있는데 나이지긋한 당지 사람들은 지금도 이 마을을 꼬리섬으로 외운다. 꼬리섬이란 그제날 “간도”의 유래가 담긴 사이섬을 말한다.

사이섬, 사이섬은 그 유래가 청나라 시기로 거슬러 오르는데 여기에는 눈물겨운 우리 조선족의 이주전설이 깃들어있다.

1644년에 청나라 주력군이 파죽지세로 관내에 쳐들어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북경에 도읍을 정한후 청조통치자들은 장백산을 저들 조상의 발상지—룡흥지지(龍興之地)로 간주하고 강희년간(1669~1681)에 흥경(오늘의 료녕성 신빈)이동, 이통주이남, 두만강이북의 광활한 지역을 봉금(封禁)하고 타민족이 봉금지내에서 사는것을 엄금하였다. 1712년에 청조에서 장백산에 정계비를 세운후 봉금정책은 보다 강화되였다. 한데서 이 지구에는 청나라 조정이나 여러 왕부에서 파견한 장정들이 사냥하고 인삼을 캐고 진주를 채집한 외 돈화, 훈춘 두현에 만족이 일부 거주하고 있을 뿐이였다.

그러던 18세기 중엽부터 산동, 하북 등지의 관내한족들이 봉금정책에 눌리지 않고 료동, 길림지방을 거쳐 연변땅에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조선북부의 빈고농민들도 리조조선의 엄격한 국경봉쇄를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너 날농사에 나섰다. 날농사란 말그대로 아침에 왔다가 저녁에 돌아가는 농사를 말한다.

그 시기 조선 무산으로부터 하류의 두만강가운데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섬들이 있었다. 이런 섬 가운데서 제일 큰 섬을 사이섬이라고 불렀는데 이 사이섬이 바로 오늘의 선구구간 사이섬을 가리킨다. 조선 6진(六镇—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의 농민들은 두만강을 넘나들다가 관리나 변방순찰병들에게 발각되면 사이섬에 갔다온다고 변명하였다. 두만강을 건너 날농사에 나선 사람은 거의 집집마다 한사람씩은 있었다고 한다.

헌데 “동삼성정략”(东三省政略)이나 “연길변무보고”(延吉边务报告)에 의하면 사이섬은 워낙 섬이 아니였다고 한다.

해당자료에 다르면 지금의 룡정지 개산툰진의 선구와 광소, 조선 종성구간 두만강에는 중국측 강안에 길이 약 10리, 너비 1리가 되는 2000여무의 “복새험”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복새험은 그때 행정구역인 광제욕에 잇대여있는 륙지였는데 어느때부터 개간되였는지는 딱히 알지 못한다. 아무튼 1881년 연변지구의 봉금제가 사실상 페지되자 두만강 이남의 조선사람들이 월경하여 광제욕 앞을 개간하며 물길을 빼게 되면서 복새험이 사방이 강물에 둘러싸인 “섬”으로 된것만은 사실이다.

그 어려운 나날에 두만강이북에 건너와 날농사를 하는 조선사람들은 복새험을 사이섬으로 불렀다. 이 사이섬이 번지여 두만강북안은 북간도로, 압록강북안은 서간도로 불리였다. 두만강이북에 깊숙히 들어온 조선이주민들은 두만강연안을 “역섬”이라고 불렀다. 이에 청조의 통치자들은 1848년부터 해마다 변방순찰병들을 파견, 순회시켜 조선 도강자들의 집과 밭을 조사하고 파괴하고 쫓아냈지만 늘어만가는 도강자들을 어찌할수 없었다.

1861년과 1863년, 1866년에 대수재가 조선북부지구를 휩쓸었다. 1869년과 1870년에 련속 대한재가 덮치였다. 생사의 기막힌 현실앞에서 조선북부의 많은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고향땅을 등지고 눈물을 뿌리며 남부녀대하고 강을 건너섰다. 두만강 이북에로의 력사적인 대이주는 이렇게 시작되였다. 청나라의 봉금제도, 리조정부의 월강죄 다스립도 목숨을 내건 도강자들의 흐름을 막아 낼수 없었다. 한데서 사이섬을 두고 이런 전설이 전해지고있다.

19세기 60년대 두만강이남의 조선 종성 하삼봉에는 리영수형제가 살고있었다. 하삼봉은 오늘의 종성과 삼봉사이에 있는 큰 농장마을을 말하는데 행정구역은 함북도 온성군 하삼봉리이다. 그 시절엔 날농사를 짓던 시절이라 리영수형제는 넓은 떼목을 타고 넓은 두만강을 건너와서 밭을 뚜지고 농사를 지었다. 그때만 해도 종성사람들은 사이섬 농사를 지을 때이고 월강죄를 다스리던 때여서 리영수형제는 누가 물을라치면 사이섬에 가서 농사를 짓는다고 얼렁뚱당 넘기군하였다.

1883년에 조선 리조정부에서는 서북경락사 어윤중(西北经略使 鱼允中)을 파견하여 두만강이남의 북관 6진을 순시하게 하였다. 때는 두만강이북에로의 력사적인 대이주가 이미 시작된 후이라 말 그대로 목숨을 내건 도강자들이 줄을 이었다. 이런 현실을 친히 목격한 어윤중은 조정에 올린 보고에서 “월강하는 죄인을 다 죽일수 없다. (越江罪人不可尽杀)”고 지적하였다. 이 소식이 민간에 전해지자 조선사람들은 시름을 놓고 월강농사를 했다. 이런 판국에 리영수형제는 두만강이북에로 아주 이주하고 말았다. 그뒤를 이어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차츰 강 량안에 나루터가 생기고 배가 오가면서 나루터가 한자로 번지여 선구(船口)라는 이름을 이루었다.

광복전에 두만강건너 종성에는 세관이 서고 선구라 불리우는 북안의 나루터마을에도 세관이 있었다. 그에 따라 선구에 세무소, 파출소, 학교, 상점, 료리집들이 흥기한데서 제법 흥성흥성한 동네를 이루었다.

그제날 나루터를 불라치면 이 일대 섬을 이루며 흐르던 두줄기 강물이 이곳 나루터에서 합수되면서 강폭이 아주 넓은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50년대까지만 해도 그런 상태였다. 두만강이 선구촌 구간에서 두곬으로 흐르다가 합수되면서 길이가 꽤나 되는 섬을 이루었다는 말이 된다. 어찌하든 선구촌의 1~5촌민소조 구역이 머리섬으로 불리우고 천평벌 말단의 6촌민소조구역이 꼬리섬으로 불리였다.

그러던 지난 50년대부터 두만강 이북의 우리측에서 강을 한곬으로 몰아넣으며 제방뚝을 쌓기 시작하자 강뚝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사이섬의 옛 모습을 다시는 찾을수 없게 되였다. 나루터도 뚝 안쪽으로 밀려나 원 모양을 잃고말았다. 지금은 늪가 논밭머리 쑥대속에 옛날의 자그마한 콩크리트땜이 박히여 그제날 나루터였음을 환기시켜줄 뿐이다.

흥미로운것은 두만강이남 조선측의 나루터는 옛모습 그대로 재현되여 있다는 점이다. 재현된 원인은 1931년과1933년에 왕청현 소왕청항일근거지에서 활동했던 김일성장군이 수하인원들을 거느리고 선후 두번이나 사이섬 나루터를 경유하여 조선 종성일대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이런고로 조선측 나루터와 그 부근은 혁명사적지로 잘 꾸려져 나루터도 원 모양대로 복구될수 있었다.

지금 조선측 사이섬 나루터구간은 혁명사적지로 훌륭히 구려졌다지만 그제날의 모습을 나타나는 늪들이 여러개에 걸쳐 대면적으로 펼쳐져 거기가 두만강 사이섬 나루터였음을 시사해준다.

실로 눈물에 젖은 사이섬, 사이섬이라 하겠다. 오늘도 사이섬 량안에 가면 사이섬에 깃든 전설과 그 이야기가 그대로 전해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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