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지역 영유권

 

제목 : 조선령, 대한제국령 간도 독도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0-04-06 조회수 : 767


 

























 


 




 



 


충청신문/, dailycc@paran.com




등록일: 2010-03-15 오후 7:18:38



 


















 

중국과는 임진왜란에 명의 원군이 큰 도움이 됐고 조선은 명과 청의 전쟁에 5만 명의 원군을 파병했다. 하정사(賀正使)·성절사(聖節使)·천추사(千秋使)·동지사(冬至使)의 정기 사절이 있고, 무역도 이루어져 말·인삼·화문석·모피·모시를 수출하고 약재·서적·견직물·도자기를 수입했다.



여진족에는 회유와 강경책을 병행했는데 복속한 여진족의 추장에게는 관작을 주고 무역을 하기도 했으며 세종에서 성종까지 4군 6진을 확보하고 수차례 정벌했다. 후금에 대한 배금정책의 결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조선은 청에 항복하고 말았으나 효종은 북벌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명과의 사대관계를 계승해 청과의 관계에서도 사대관계가 유지됐으며 무역도 증가했는데, 사신에게는 사무역이 허용됐으며 17세기 이후 사신을 통해 서양 문물과 천주교가 수입됐다. 국경에는 시장이 개설됐고 조선 후기에 국내 상업이 발달하자 밀무역인 후시(後市)도 성행했다.



한국인들이 땅이 기름지고 산림이 무성하며 자원이 풍부한 간도를 개척해 농경지를 만들었고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해 간도를 직접 관할했으며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은 1909년 9월 4일 간도협약을 맺고 간도의 영유권을 청에 불법 양도했다.



일본과는 1419년 대마도를 정벌하고 회유책으로 1443년 계해약조를 맺어 3포를 개항하고 왜관을 설치했고 미곡·대장경·서적·면포 등을 수출하고 동(銅)·석(錫)·후추·약재를 수입했다. 1510년 삼포왜란으로 외교 단절된 후 1512년 재개됐으나 세견선(歲遣船), 교역 물자를 반으로 제한했다.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발생했는데, 7년 간의 전쟁 끝에 조선은 일본을 물리쳤으나 큰 피해를 남겼고,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문화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1609년 일본과 외교를 재개해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했으며 1876년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일본제국주의가 침략했다.



1869년 조선에 파견됐던 일본 외무성 관리 3명이 돌아와 일본 정부에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를 제출했다. 이 내탐서에는 울릉도(鬱陵島)와 독도(Dokdo)가 조선 영토가 된 시말(始末)에 대해 조사하고 울릉도와 독도(獨島)는 조선령이라고 결론지은 내용이 나와 있다.



1877년 일본 최고 권력기관 태정관(太政官)은 태정관 지령문(太政官指令文)을 통해 울릉도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했다.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Daehan Empire) 정부는 칙령 41호를 공포해 울릉도를 강원도의 군으로 승격하고, 독도(Dokdo)를 관할 구역으로 해 관보를 통해 공포했다.



김민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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