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지역 영유권

 

제목 : '간도의 대통령' 김약연 첨부파일 : 다운로드[1]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0-03-13 조회수 : 2110


 






 













1909. 8. 29.~1910. 8. 29.



1914년 5월 28일자 신한민보에 다음 두 기사가 나란히 실렸다.



"간도에 있는 명동예수교학교는 설립한 지 4년에 교무가 날로 진흥하며 학생 수가 더욱 증가하여 150여 명에 달하였으므로 장차 학교를 크게 건축하고 교육을 더욱 확장하고자 하는 중이라 하더라."



"해외 한인의 단체로 작년 봄에 중국 정부의 관허를 얻고 동포를 자치하던 북간도 간민회(墾民會)는 지난 3월 14일 해산을 당하였다더라. 간민회는 창립한 후로 연길·화룡·왕청 등 각 고을에 많은 지회를 설립하고 여러 가지 사업이 날로 발달됨으로 원수는 백방으로 꾀하여 그 회를 깨고자 하였지만 어찌하지 못하더니,…중국 정부의 명령으로 해산시키매 하릴없이 그 이름이 없어졌는데,…중국 원세개(袁世凱)의 전제로 지방자치를 혁파하는 까닭이 아니면 원수의 방해라 하였더라."






명동학교와 간민회는 규암 김약연(金躍淵·1868~1942)이 설립하였다. 함북 회령 출신인 김약연은 김하규·문병규·남종구와 함께 1899년 2월 일가친척 142명을 이끌고 살을 에는 찬바람을 맞으며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화룡현(현 용정)의 불굴라재로 이주한다. 김약연은 중국인으로부터 임야 수백 정보를 사들여 개간해 한인 집단거주지를 조성하고 지명을 명동(明東)으로 바꾼 뒤 삶의 터전을 가꾸었다.



맨 먼저 시작한 일은 교육사업이었다. 김약연은 1901년 명동 장재 마을에 규암재라는 서당을 설립한다. 규암재는 1908년 명동서숙으로 발전하고 1909년에 명동학교로 이름을 바꾸며 명동촌 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북간도만이 아니라 연해주와 회령 등지에서도 학생이 모여들어 그 수는 날로 증가하였다. 외조카인 윤동주를 비롯하여 라운규·문익환 등이 명동학교 출신이다.



규암은 또한 간민교육회를 확대 개편하여 1913년 북간도 최초의 한인 자치기구인 간민회를 결성한다. 간민회는 본부를 연길(延吉) 국자가(局子街)에 두고 각지에 지회를 만들어 한인의 구심체 역할을 하면서 한인 촌락을 하나 둘 조직하였다. 규암은 1918년 말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서명하였으며, 간민회는 3·1운동 소식을 듣고 용정의 3·13 만세시위를 이끌면서 북간도지역 독립운동단체의 뿌리가 되었다.



명동학교 교감으로 부임한 정재면의 영향으로 김약연은 기독교 신자가 된다. 유학의 대가인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정신을 개혁하지 않고서는 민족을 살릴 수 없다'는 민족 지도자로서의 결단이었다. 자신의 8칸 집의 방을 터 설립한 명동교회 (중국 길림성 용정 소재. 지금은 '명동역사전시관'으로 사용)는 북간도 지역 한인교회의 구심체로 성장한다. 규암은 1920년대 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명동교회 목사로 있으면서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한다.



김약연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이념과 사상을 초월해 협력하고 도왔다. 이런 포용력으로 그는 '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리기도 했다. 솔선수범하는 삶, 높은 인격, 기독교적 사랑이 어우러진 김약연의 지도력이 빛을 발한 명동으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국내에서 피신해 온 애국지사들은 강단에서 수많은 독립지사를 길러냈고 이들은 후에 조국의 내일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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