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영토 답사기

 

제목 : 우리의 북방영토 고려문을 찾아서(4) 첨부파일 : 다운로드[1]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09-05-08 조회수 : 6174

 
 단동에서 심양으로 국도를 따라 130리를 가면 봉성시 조금 못 미쳐 고려문이 있던 변문진(변두리(邊)의 경계진영(鎭)을 표시한 문(門))이 나타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변문진 변문촌이다. 이 지역은 지명에서도 알수 있듯이 당시 조선의 국경도시로 한만 국경 출입을 위해 한국 관리가 파견된 별정소가 있던 곳으로 엄연한 우리 땅이다. 고려문(高麗門;Korean-Gate)은 책문(柵門)의 하나로 우리나라 국경 도시인 의주(義州)에서 약 48Km되는 곳에 있는 마을의 이름이다. 말하자면 고려문은 한국인이 중국에 들어가는 관문과 같으며, 이곳에는 출입국 관리하기 위한 우리나라 별정소(別定所)가 설치되어 있었고 의주부(義州府)의 집사(執事) 몇 사람이 항상 파견, 주둔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교역 시장이 열려 많은 한국인이 찾아와 교역하고 돌아가곤 하였다.
 



▲ 인공위성 영상에서 찾은 변문진 전경

1996년 9월 17일 길림성 봉산구(鳳山區)에서 세운 변문진 표지석 위치가 고려문이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변문진의 진(鎭)은 바닷가나 강변에 군대가 진주하고 있을 경우에 흔히 쓰는 강변 혹은 해변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중국쪽의 제일 변두리에 세워졌던 변문(邊問)을 의미한다. 지도와 위성영으로도 확인된다.그러나 지금은 고려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1966년 문을 없애고 그 자리에 1995년 5월에 높이 1미터70센티미터,넓이 50센티미터의 표지석을 세웠다. 붉은 글씨로 세겨진 변문진 글자 밑에 영어로 'Blarimen Zhen'을 새겼으며,뒷면에는 '1995年 5月'이란 글씨가 있다. 표지석은 일면산(一面山)역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며,철길 건널목 도로변에 자리잡고 있다. 아직도 주변에는 고려문을 헐었던 돌무더기가 보인다.  일면산역은 원래 고려문역이었다. 1962년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할 때 이곳을 지나가기 때문에 역 이름을 일면산역(一面山驛)으로 바꾸어버렸다. 이곳 변문에서 남쪽으로 조금 가면 '조선촌'이라는 곳이 있었다. 그 때 이곳도 김일성이가 지나가다가 조선땅이다고 할까봐 이름을 탕하(湯河)라고 바꾸어 버렸다. 심양에서 단동까지 철도를 놓았던 일본 건설회사의 기록을 보면(間組百年事 185쪽) "고려문역"이 분명히 있었다. 안동현(安東懸)-사하진(沙河鎭)-합마당(蛤마塘)-오룡배(五龍背)-탕산성(湯山城)-고려문(高麗門)-봉황성(鳳凰城) 그러나 현재의 역 이름을 보면 단동-사하진-합마당-오룡배-탕산성-일면산-봉황성으로 되어 있어 "고려문"만 "일면산역"으로 바뀌었다



 ▲ 20만분의 1 지도에 나타난 고려문, 봉황성 위치



 ▲ 인공위성 영상에서 확인한 변문진과 변문촌, 철길과 군부대, 고려문의 위치가 보인다.

 

변문진에서 북쪽은 한족(漢族) 마을이 있고, 그 건너편이 고려 마을이 있었다. 이 곳에 사는 어른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지역은 조선 땅이 맞다."  "당시 이 곳에 3000호에 달하는 한국인 가구가 있었다. 최근까지 살고 있었는데 북한에서 이 지역을 내 놓으라고 해서 지금은 인근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켜 한명도 없다."  증언은 계속 이어 졌다. "고려문의 위치는 군부대 안에 있었는데 현재는 없다. 오래전에 없어졌다."  설명을 듣는 동안 사진 몇장을 찍었다. 중국 정부는 고려문의 흔적을 감추기 위하여 군부대를 주둔시키고, 기차길도 막아 버렸다. 군부대를 따라 카메라를 설치하여 출입을 감시하고 있었다.  군부대 담장과 봉황산이 끝나는 지점 너머가 고려고성이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조선과 청 사이에는 국경이라는 것이 없었는데 정묘호란의 강화조약인 강도회맹에 의해 양국간에 서․북의 국경을 책정하였다. 1627년 3월 3일 체결한 강도회맹에 “조선 국왕은 금국과 더불어 맹약을 한다. 우리 두 나라가 이미 화친을 결정하였으니, 이후로는 서로 맹약을 준수하여 각각 자기 나라를 지키도록 한다.(朝鮮國與金國立誓 我兩國已講和好 今後兩國 各遵誓約 各守封疆)”는 내용으로 보아 양국간에 국경을 정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국경선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청 호부의 기록에 청의 태종이 1638년에 압록강 하류지점 남반에서 봉황성을 거쳐 감양변문(京興)을 지나 성창문(城廠門)과 왕청변문(旺晴邊門)에 이르는 150리 내지 200리 가량의 방압공사(防壓工事)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1670년(강희 9년)부터 개원(開原) 위원보(威遠堡)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전장 343.1km의 ‘유조변책(柳條邊柵)’을 1681년(강희 20년)까지 설치한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지금도 사평(四平)에서 이수(梨樹), 공주령(公主嶺), 이통(伊通), 장춘(長春), 구태(九台)를 거쳐 서란(舒蘭)까지 구불구불 이어진 유조변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사평시(四平市) 산문향(山門鄕)에는 포이도고소파이한변문아문(布爾圖庫蘇巴爾汗邊門衙門)의 병사(兵舍)가 남아 있다.
기록에 의하면 청나라는 봉황성으로부터 서쪽으로 산해관에 이르기까지 둘레 1,800여 리에 이르는 울타리를 쳤고, 그 중간에 총 17개의 문을 두었다. 그리고 각 문마다 지키는 관병을 두었고, 그 주위에 장정들을 선발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책문은 조선과 청나라의 실질적인 국경이었고, 그런만큼 일정한 통관 절차를 밟아야 했던 곳이었다. 연행사들은 역관을 보내 사신의 인적 사항와 인마(人馬)의 수 등을 적은 문서를 보냈고, 책문의 관리자인 봉성장(鳳城將)이 나와 인마를 점고하고 들여보냈다. 간혹 이 통관 절차를 엄격하게 할 때가 있어, 연행사들은 책문의 관리 책임자부터 말단의 호송 군조들에게까지 종이ㆍ부채ㆍ붓ㆍ담뱃대 등의 예물을 나누어 주었다.

봉성시(鳳城市)에는 봉황성과 남문, 동문, 서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봉황성은 조선 쪽의 국경을 책임지는 도시로, 봉황성장이 주관하였다. 명나라의 지리서 『일통지(一統志)』에 따르면 발해 때에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요나라 때에는 개주진국군(開州鎭國軍)이 설치되었고, 원나라 때에는 동녕로(東寧路)에 소속되었다. 명나라 때에 벽돌로 튼튼하게 성을 쌓았고, 청나라에 이르러서는 조선과의 국경 무역으로 번성하였다. 현지인들은 조선을 숭상하여 사행에 따라온 의주 사람을 이웃 친지처럼 대하였다. 

▲ 인공위성 영상에서 확인한 봉황성(월천답 조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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