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지역 영유권

 

제목 : 오대징과 이크탕아 령토완정 수호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09-11-15 조회수 : 849
(2009-9-16 20:46:51)

청조 광서 12년(1886)년, 청정부는 북양사 대신 오대징과 훈춘 부도통 이크탕아를 파견하여 로씨야대표와 중-로 동단국계탐사일을 처리하게 했다. 5월 25일, 오대징과 이크탕아 일행은 로씨야국계탐사위원회 주석이며 빈해성 성장 겸 사령인 빠라노브 등 로씨야측 대표와 함께 짜리로씨야경내 암오하에서 첫 회의를 가지였다. 중국측은 치중하여 “토자비”를 다시 세우는것과 흑정자를 돌리는 문제를 해결할것을 요구했다. 1861년 “북경조약”의 보충조약에서 체결한 “중로동계탐측”조약에 따르면 “토자비”는 응당 두만강어구에서 10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세워야 한다. 하지만 로씨야측의 터무니없는 리유로 회의는 결과를 보지 못했다.
5월 29일, 쌍방은 제2차회의를 가지고 거듭 변론한 끝에 끝내 협의를 달성하고 “훈춘동계조약”과 “중로국계탐측6단도로조약”을 체결하고 흑정자를 중국에 돌리고 “토자비”를 두만강출해구에서 직선거리로 13.5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세우기로 했다. 이와 동시에 훈춘국계에 또 “사자비”와 “라자비” 등 국계비와 16개 국계 “표기”를 증설하여 기본상 “중로북경조약”에서 규정한 국경선을 회복했다.

오대징은 훈춘에 있는 기간에 국계비와 국계표기를 세우는외 또 장령자 중로국계선에 친필로 된 “나라를 대표하기에 옮기지 못한다”는 동기둥을 세워 침략을 배제하려는 굳은 결심을 나타냈다. 이크탕아와 오대징은 산골짜기와 하천을 넘나들면서 직접 국계를 탐사하고 국계비와 표기를 세우고 지도를 만들었다.

담판석상에서 두사람은 배합이 잘 맞았다. 그들은 짜리로씨야의 침략행위에 대해 불요불굴의 투쟁을 벌림으로써 짜리로씨야에 장기간 강점당했던 령토를 되찾아오고 담판이 원만한 성공을 거두게 했으며 조국의 동부변경을 수호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본지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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