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영토 답사기

 

제목 : 우리의 기상 광개토대왕비(2) 첨부파일 : 다운로드[1]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09-05-08 조회수 : 2454

 

  이틀째, 고구려 유적지 집안으로 출발하였다. 집안시는 길림성 최남단 위치하고 있다. 집안시의 인구는 21만명으로 1만 5백여명이 재중동포가 살고 있다. 압록강 건너편에는 험준한 산악 사이로 비좁게 촘촘이 들어앉은 북한 자강도 만포시가 위치하고 있다. 집안과 만포 사이로 흘러가는 압록강 물살이 만고의 역사를 안고 유유히 흐르고 있다.

  고구려의 장수왕이 서기 414년 부왕의 공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광개토대왕비부터 답사했다. 광개토대왕비에 새김글씨는 당시 고구려 역사이자 주변 동아시아역사를 말해 준다. 정확한 명칭은 왕의 묘호인「국강상광개통경평안호태왕」으로 마지막 세 글자를 따서 호태왕비로 부르고 있다.비석의 높이는. 6.39m로 어른 세사람의 키를 포갠 것보다 더 높다

먼 발치에서 유리벽 속의 광개토태왕비를 보니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기상, 광개토대왕의 숨소리가 멈쳐진 느낌이다. 옆의 작은 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자 여자 안내원의 설명이 있었다. 중국말로 해서 알아 들을 수는 없었다.
 
▲ 1909년도의 광개토대왕비 모습 
태왕비가 위대한 것은 그 크기 때문이 아니라 4면에는 새겨진 1775자의 내용 때문이다. 이 기록은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일 뿐 아니라 그 내용도 풍부하여 마치 한 권의 책을 읽는 것과 같다. 광개토태왕비는 그 기록 내용이 기년식(紀年式)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연나라, 부여, 신라, 백제,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 전체의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다. 광개토태왕 비의 내용을 통하여 당시 고구려가 동아시아에서 차지한 위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고,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서의 역사서술이 중국 위주에서 우리의 주체적 입장에서 되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이다. 4면에 기록된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1면
옛날에 시조인 추모왕이 나라를 건립할 때에 그의 부친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여랑으로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다. 태어나자 곧 성덕이 있었다. 순행 남하하였다. 그는 남하하는 길에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였다. 왕은 나루에 이르러 말했다.《나는 황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다. 나를 위해 거북을 뛰워 배로 삼고 갈대로 다리를 만들어라》소리에 따라 즉시 거북과 갈대로 이루어진 다리가 나타났다. 연후에 강을 건넜다. 비류곡 홀본지방 서쪽의 산 위에 성을 쌓아 도읍을 삼았다. 세상의 왕위를 즐기지 않아 (하늘은) 황룡을 보내 왕을 영접하였다. 왕은 문득 홀본 동강에서 황룡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유명을 이어받은 세자 유류왕이 치국지도로 사업을 진흥시켜 국가가 大治되였다. 대주류왕은 양대의 기업을 계승하여 계속 발전했다. 이어 17세기를 전하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다. 18세에 즉위하여 존호를 영락태황이라 했다. 그의 은택은 황천과 같았고, 그위 무공은 사해에 진위하였다. 외래의 침략을 제거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평안히 그 업에 종사할수 있게했다. 국가는 부유하고 백성도 은실(殷实)했다. 오곡이 풍숙했다. 하늘은 왜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가? 39세에 국가와 세상을 사별해 내던지니, 갑인년 9월29일 을유에 황을 안장했다. 그 앞에 비를 세워 왕의 훈적을 명기하여 후세인에게 보이노라 각사(刻词)로 말한다. 영락5년은 을미년으로 왕은 비려가 고구려 함몰인들을 귀환해 주지 않기 때문에 몸소 토벌에 나섰다. 부산을 넘어 산을 등에 지고 염수에 이르러 비려의3부락6-7백명을 파하고 소, 말, 양떼를 ※위 내용은 삼국사기 원년의 일로 보고 있음. 삼국사기에 따르면《북으로 거란 정벌, 남녀5백명을 사로잡고 본국인으로 사로잡혔던 백성1만인을 설유하여 귀국하게 하였다.》그곳에서 돌아오면서 양평도를 거쳐 동으로 왔다. #성, 역성, 북풍에 이르러 왕은 사냥준비를 시켰다. 순유와 사냥을 하며 돌어왔다. 백잔(=백제), 신라는 옛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왔다. 그러나 신묘년 이래로 왜가 바다를 건너 백잔과 신라를 쳐 신민으로 삼았다. 때문에6년 병신에 왕은 몸소 수군을 인솔하여 백잔국을 토벌했다. 군사가 백잔소굴의 남쪽에 이르러
※왕건군은430년대에서야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했다고 주장. 385년 고국양왕이 요동 점령, 같은 해에 연의 모용농이 회복했다고. 그러나 광개토왕14년에 연 모용희가 요동성 공격에 실패하고 있음.

제2면
寍八성, 臼模성, 各模卢성, 干弖利성, □□성, 阁弥성, 牟卢성, 弥沙성, 古舍茑성, 阿利성, □利성, 杂珍성, 奥利성, 勾牟성, 古模耶罗성, 页□□□□성, 分而耶罗성, 场성, 於利성, 农卖성, 豆奴성, 沸□□利성, 弥邹성, 也利성, 大山韩성, 扫加성, 敦拔성, □□□성, 娄卖성, 散那성, 那旦성, 细성, 牟娄성, 于娄성, ○灰성, 燕娄성, 析支利성, 巖门성, 林성, □□□□□□□利성, 就邹성, □拔성, 古牟娄성, 闰奴성, 贯奴성, 丰穰성, 曾拔성, 宗古卢성, 仇天성 그 국성에 다가갔다. 백잔은 의에 복종하지 않고 감히 나와 영전했다. 왕은 위엄으로 대로하여 아리수를 건너 선두부대를 보내 성으로 진격했다. 백잔 군대는 구렁으로 몰아갔다. 쫓아 이어 성을 포위했다. 백잔의 주는 곤경에 빠져 남녀 생구1천인과 세포1천필을 헌납하고 왕 앞에 꿇어 앉아 맹세했다. “지금으로부터 이후 영원히 노객이 되겠소” 태왕은 은혜를 베풀어 용서하고 미혹하여 저지른 허물을 용서하고 뒤에 그가 공손한 성의를 다 할것인지를 살피기로 했다. 이번에58성퐈7백촌을 얻었다.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이끌고 개선군대를 거느리고 환도했다. 8년 무술에 군대를 변경의 백신토곡에 보내어 살피게 하여 인하여 다시 막사라성, 가태라성에서 남녀3백여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조공하여 일을 논하게 되었다. 9년 기해에 백잔은 자기의 맹세를 위반하고 왜와 더불어 통호했다. 왕은 남으로 평양을 손유했다. 그리고 신라가 사자를 보내어 왕에게 아뢰었다. 왜인이 나라 안에 가득 차 성과 못이 파괴되니 노객(신라왕)은 백성으로써 왕의 명을 듣기를 원한다고 했다. 태왕은 인자하여 그들의 충성을 칭찬했다. 기병5만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걸쳐 왜인이 가득했다. 관군이 도착하자 왜적은 퇴각했다. 왜의 매후를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까지 이르자 성은 즉각 항복하여 신라인으로 지키게하였다. 신라성과 염성을 장악하여 왜구는 크게 무너졌다. 성안의십분의 구는 왜를 모두 따라가기를 거절하여 신라인으로 수성하게 했다. 신라성……
※**2면9행의처음7자는 글자가 없는 부분으로 판독됨(왕건군).※
※**이 행 위의 16자는 글자가 없는 부분으로 파독됨(왕건군).※

제3면
나머지 왜구는 무너져 흩어져 도망갔다. □성을 탈취하여 신라인을 안치하여 지키게 했다. 전에 신라 이사금은 스스로 와서 조공청명함이 없었다. 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이사금은… …조공했다. 14년 갑진에 왜는 양국의 관계를 파괴하고 대방의 경계를 침입하여 백잔병과 연합하여 석성을 공격했다. …왕이 몸소 병사를 영도하여 토벌했다. 평양을 떠나 선봉이 적과 만났다. 왕의 군대는 길을 끊고 막아 사방에서 추격하여 살해하여 왜구는 궤멸되어 패했고 참살된 자가 무수했다. 사방포위 작전을 썼다. 적은 전부 참살되었으며 개갑 만여령을 노획하고 군자 기계는 수를 셀수 없었다. 돌아오며 사구성, 누성, 우#성, #성, …□성을 빼앗았다. 20년 경술, 동부여는 옛적에 추몽왕의 속민이었는데 중도에 이반하여 다시는 조공하지 않아 왕은 몸소 군대를 이끌고 동부여를 토벌했다. 왕이 동부여의 도읍에 다다르자 동부여는 두려워하여 항복햇다. …왕의 은혜가 고루 미치자 왕이 돌아왔다. 그 교화를 흠모하여 관군을 따라온 자가 미구로 압로, 타사루 압로, 숙사사 압로, □□□압로였다. 무릇 성64가를 공파하고 촌1천4백을 취득했다. (광개토왕의) 수묘인연호다. 매구여의백성은 국연2간연 3. 동해가는 국연3 간연5, 돈성 백성의4가는 모두 간연이 된다. 우성의 일가는 간연이 된다. 비리성의2가는 국연이 된다. 평양성 백성은 국연1, 간연10. 차련2 가는 간연이 된다. 배루 인은 국연1, 간연43. 양곡2가는 간연이 된다. 양성2가는 간연이 된다. 안부련22가는 간연이된다. 개곡3가는 간연이 된다. 신성3 가는 간연이 된다. 남소성1가는 국연이 된다. 새로 들어온 한예로 사수성은 국연1, 간연1. 모루성의 2 가는 간연이 된다. 두차압잠한의 5가는 간연이 된다. 구모객두2가는 간연이 된다. 구저한1가는 간연이 된다. 사조성의 한예는 국연3, 간연21. 고모아랴성1가는 간연이 된다. 경고성은 국연1, 간연3. 객현한1가는 간연이 된다. 아단성, 잡진성의 합10가는 간연이 된다. 파노성한의 9가는 간연이 된다. 구모로 성의4 가는 간연이 된다. 각모로성의 2 가는 간연이 된다. 모수성의 3가는 간연이 된다. 간저리성은 국연2, 간연3, 미추성은 국연1, 간연7.
※광개토대왕 비문 -4면※

제4면
야리성의 3가는 간연이 된다. 두노성은 국연1간연2. 오리성은 국연2간 연8. 수추성은 국연2간 연5. 백잔 남거한은 국연1간연5. 대한산성6가는 간연이 된다. 농매성은 국연1간연7. 윤노성은 국연1간연22. 고모루 성은 국연2간연8. 전성은 국연1간연8. 미성의6가는 간연이 된다. 취자성의 5가는 간연이 된다. 산나성1가는 국연이 된다. 나단성1가는 간연이 된다. 구모성1가는 간연이 된다. 우리성 8가는 간연이 된다. 비리성 3가는 간연이 된다. 성성3 가는 간연이 된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샌존시에 교시로 말했다.《조완, 선왕은 다만 원근의 구민으로 수묘함에 청소만을 명령했다. 나는 구민이 쇠약해져버릴까 염려한다. 내 만년의 후에는 (죽은 후에는) 묘를 안전하게 지키는 자는 다만 내가 몸소 순행하여 약탈해온 한예를 취해 청소를 준비케 한다.》교시가 이와 같아, 이것으로써 교령과 같이 한예220가를 취하였다. (그러나) 그 법칙을 모를까 염려하여 구민110가를 다시 취해, 합이 신구 수묘호 국연30, 간연300으로 도합330가이다. 윗조상, 선와 이래로부터 묘 위에 석비를 안치하지 않아 수묘인 연호에 차이나 착오가 생기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은 선대왕 묘 모두에 비를 서워 연호를 명기하여 차이, 착오가 없게 하였다. 또 수묘인의 제도를 만들어 지금 이후부터는 서로 전매를 하지 못하게 했다. 비록 부유한 사람이 있어도 역시 마음대로 살수가 없다. 그 령을 위배하면 판자는 형을 받고 산자는 제도에 따라 수묘케 한다.

▲ 광개토대왕비와 태왕비를 인공위성 영상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장군총은 집안에 산재헤 있는 12,000여 기의 고구려 무덤떼 가운데 대표적인 돌무지무덤으로 고구려 20대 왕인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집안의 고구려 고분 중 가장 웅장한 형태의 능으로 고구려의 비약을 상징하여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린다. 높이가 12.4m, 길이가 31.6m로 7단 계단식 사각형 피라미드 형태다. 장군총은 국내성에서 4.5km 떨어진 용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교적 높은 곳에 있어 압록강과 집안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 장군총의 모습도 인공위성 영상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고구려가 졸본에서 집안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유리왕 22년으로 서기 3년이다. 그 천도에 따른 뒷 이야기로 민족과 밀접한 전설이 남아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단오와 추석에 조상을 위해 제사를 올렸다. 유리왕도 재위 18년이 되는 해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제사상에 올린 돼지가 달아나 버려 탁리와 사비가 붙잡아 뒷다리를 끌고 왔다. 변고는 여기서 생겼다. 돼지가 상처 입은 것을 본 왕이 붙잡아 온 사람들을 생매장 시켰던 것이다.  그 뒤에 왕은 병환에 들어 시름시름 앓아 누었다. 용하다는 무당이 와서 모두가 생매장 당한 두 사람의 장난이니 제를 지내라고 했다. 그래서 제를 지내기로 하고 돼지를 붙잡아 왔으나 또 달아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사물택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돼지를 가져와 바치고 고구려에 귀속되기를 간청했다. 유리왕은 이에 응하고 사물택이 자리했던 집안으로 도읍을 옮기고 도읍지 이름을 국내성으로 불렀다.

 

▲국내성은 졸본성에 이은 고구려의 두번째 성으로 유리왕때 축조되었다. 현재는 터만 남아있고 안쪽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환도산성은 고구려 유리왕21년에 축조한 성으로 산봉우리와 주위능선을 이용하여 돌로쌓은 난공불락의 천연요새이다. 환도산성 남문 안에 음마지(飮馬池)가 나온다. 음마지는 음마만(飮馬灣), 연화지(蓮花池)라고도 부르는데 고구려 군사들이 말에 물을 먹이던 곳이다. 음마지 옆에 전투를 지휘하던 장대(將臺)가 있고, 500m쯤 올라가 면 동쪽 산기슭 옛 궁전 터가 있다.  

▲ 현재 흔적을 알 수 있는 터만 남아 있다. 궁전 터는 아는 사람이 안내하지 않으면 찾기 힘들다.

 
▲ 환도산성과 입구에 산재해 있는 무덤들을 몰수 있다. 집안에는 이러한무덤이 12,000여개가 있다. (월천답 조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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