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지적제도

 

제목 : 소련군정이 북한 토지개혁 주도 첫 확인-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05-09-10 조회수 : 940
[다시쓰는 한반도 100년](18)‘땅의 재분배’







땅, 바로 땅이었다. 좌와 우를 나눈 가장 중요한 잣대도 역시 땅이었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막 벗어난 조선 사회

에서 최고의 관심사는 땅, 그중에서도 농지의 소유관계를 어떻게 재편하느냐는 것이었다. 토지를 빼앗긴 지주들

은 고향을 등지고 38선을 넘었고, 땅을 못뺏은 농민들은 산으로 가 빨치산이 되었다. 땅을 놓고 서로 싸우고 때로

는 죽고 죽였다.





북한에서는 1946년 3월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이 단행되었다. 토지개혁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이는 김

일성(金日成)의 공(功)으로 돌아갔다. 언감생심 꿈도 못꾸던 지주의 땅을 공짜로 받은 절대 다수 농민들의 지지, 

그것은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고도 정권을 지탱할 수 있게 해준 최고의 자산이었다.





이러한 북한의 토지개혁은 지금껏 김일성의 작품으로 여겨져왔다. 연구자들이 그랬고, 언론도 동조했다. 일례로 

중앙일보의 북한 정권을 다룬 시리즈 기사(92년 6월26일자)는 ‘소 군정 주도안해’라는 제목 아래 “소 군정은 일

체 의견을 표시하지 않다가 나중에 추인하는 데 그쳤다”며 “소 군정은 토지개혁을 연구한 일도 없었다”고 기술하

고 있다.





그러나 최근 러시아 국방성 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당시 소련군 자료에 따르면 토지개혁은 소련군의 치밀한 계

획과 모스크바와의 수차례 협의를 거쳐 진행된 것임이 밝혀졌다. 김일성은 단지 주연배우였을 뿐이었다. 감독과 

시나리오는 소련군, 그 중에서도 특히 연해주 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상장)으로 주로 평양에 머물던 스티코

프의 몫이었다.





◇토지개혁 입안과정=토지개혁에 관한 소련군 사령부의 기안은 45년 11월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발견된 문서에는 북한 주둔군(25군)의 로마넨코 소장이 작성한 ‘북조선 토지개혁 시행에 관한 제의’가 있다. 여기

에서 로마넨코는 “40정보(1정보는 약 3,000평) 이상을 소유한 지주의 땅을 몰수하자”고 말하고 있다. 그는 몰수

와 분배의 방법에 대해서는 유상(有償) 혹은 무상(無償)인지를 말하지 않았다.





그해 12월 표도로프라는 북한 주둔 소련군인의 이름으로 칼라쉬니코프(연해주 군관구 정치국장·소장)에게 보낸 

‘북조선 농업관계와 토지개혁안’이라는 보고서는 헝가리의 예를 들어 유상몰수를 하고 20년 분할상환 방식의 유

상분배를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즉 45년 당시만 해도 소련군의 토지개혁 구상은 비교적 온건한 방향으로 입안

됐다.





그러나 미·소관계가 파열음을 내기 시작하던 46년에 들어서자 상황은 바뀌었다. 그해 2월23일 스티코프는 모스

크바 국방성에 보낸 보고서에서 “5정보 이상 소유한 지주의 토지를 무상몰수하자”고 밝혔다. 2월초에만 하더라

도 몰수기준선을 10정보로 바라봤던 스티코프가 더 강경한 쪽으로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결국 스티코프의 주장

은 소련 외무성을 중심으로 제기됐던 유상몰수라는 온건론을 눌렀다. 그는 2월말 북조선 농민연맹 회의를 소집, 

소련당국의 의사를 전달했다.





다만 그는 김일성 등 북한 지도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몰수된 토지는 국유화한 후 농민에게 경작을 맡긴다는 자신

의 안(案)을 수정, 토지 명의를 농민에게 넘기기로 했다. 자기 이름으로 된 자갈밭 한 뙈기라도 원하는 농민들의 

염원을 수용한 것이다. 그러나 소군정은 자기 명의의 땅이라도 일체의 매매, 양도 등을 금지시킴으로써 사실상 

국유화의 효과를 내도록 했다.





소련이 이처럼 토지개혁을 서두른 것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후 토지개혁을 단행한 경험을 가진 데다 전체 조선

인의 80%가 농민이고 농민 중 80%가 소작인인 당시 한반도 현실에서 식민지 반봉건 사회구조를 깨뜨리는 데는 

무엇보다 토지개혁이 절실함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지개혁 진행과정=그해 3월6월 김일성의 이름으로 토지개혁 법안이 발표됐다. 기존의 토지 소유관계를 전면 

부정하고 5정보 이상 소유토지와 면적에 관계없이 소작을 주던 토지는 대가없이 몰수하여 공짜로 농민에게 넘겨

주도록 했다. ‘땅을 빼앗긴 자’와 ‘땅을 받은 자’ 사이에는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렸고, 이것이 ‘계급’이라는 외투

를 쓰고 지주와 빈농 사이에 깊은 갈등의 골을 만들었다.





소련군이 토지개혁의 진행과정 또한 주도면밀하게 지켜보았다는 것은 이번에 발견된 이그나치예프의 문서에도 

확인된다. 스티코프의 직속부하로 대좌(우리의 대령급)였던 그는 그달 6일부터 토지개혁 기간동안 날짜별로 ‘토

지개혁 집행 및 주민동향 보고서’를 작성, 북한 각지에서의 진행과정과 주민 분위기를 스티코프의 손을 거쳐 모

스크바에 보고했다.





빈농과 소작농을 중심으로 조직된 농민위원회가 토지개혁의 실무작업을 담당, 지주들과 곳곳에서 마찰을 빚었

다. 지주들은 토지개혁에 격렬히 반발했다. 평양과 함흥에서는 학생들의 동맹시위가 일어나고, 최용건 암살미수 

사건(3월8일), 김일성 친척인 강양욱 집안에 대한 테러(3월14일) 등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들의 저항은 대세를 

흔들지는 못했다. 소련군의 물리력에 정면으로 대항하지 못하고 대거 남한행을 택했다.





그 때문에 북한의 토지개혁은 많은 피를 흘리지 않고 비교적 수월하게 이뤄졌다. 조선대 기광서 교수는 “토지개

혁의 영향으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임시인민위원회와 공산당의 입지가 크게 강화됐다”며 “반대세력이 될 만

한 계층이 대거 남하해버린 데다 물적기반마저 상실, 향후 공산당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북한 체제를 개편해나갔

다”고 밝혔다.





45년에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주로 고향을 찾아간 남한출신 공장 노동자들이라면, 46년에 월남한 이들은 주로 

지주 출신들이었다. 한 연구자는 토지개혁의 대상이 되었던 지주와 그 가족 23만명 중 15만명이 월남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들은 남한에서 서북청년단을 만드는 등 남한을 ‘반공의 교두보’로 만드는 데 열성을 쏟았다. 그리고 이들의 땅

을 뺏은 공산당에 대한 사무친 원한은 남한을 철저한 반공국가로 만드는 데 일조함으로써 남과 북이 오랜기간 서

로 다른 길을 걸어가게 한 원인중의 하나가 되었다. 





<김용석기자 kimys@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1년 12월 14일 1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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