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영토 답사기

 

제목 : 가슴저린 역사의 현장, 토자비 앞에서 첨부파일 : 다운로드[1]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09-04-26 조회수 : 2214

2007년 12월 백두산 기행과 함께 북한과 중국, 러시아가 만나는 토자비를 다녀 왔다. 이 곳은 발해의 유적과 일제에 항거했던 우리 독립투사들이 할동했던 러시아 연해주 지역이 위치하고 있으며, 특히 이순신장군이 목숨을 걸고 지킨, 녹둔도와 토자비기 있는 곳이다 . 

▼ 답사지도를 펴 놓고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 녹둔강 상류쪽. 오른 쪽이 녹둔도이다.  

 

▼ 녹둔강 하류쪽   

1860년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맺은 북경조약에 따라 시베리아 연해주일대가 러시아에 귀속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동북 변경은 러시아와 역사상 최초로 국경선을 접하게 되었다.  이 때 그들은 백두산 정계비에 새겨진 '토문'을 그들 나름대로 '두만강'이라 해석하고, 두만강 하루에서부터 상류를 향한 만주 휘춘(揮春) 근역에 토자비(土字碑)를 새워 국경선을 확정함으로써 이제까지 우리나라와 청나라간의 쌍방적 접경관계가 삼각 접경관계로 바뀌었다.이러한 사태 속에서 종래 우리 영토였던 두만강 하류의 녹둔도가 러시아령으로 귀속되고 말았다. 이 섬은 사차마도(沙次麻島)라는 이름으로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등장하는 섬으로 일찍부터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의 방비와 여진족의 내륙침입을 방비, 견제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서 조선정부에서는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1882년 1월 고종은 어윤중을 서북경략사로 명하고 임지로 떠나는 그에게 "녹둔도는 본시 우리 땅이니 이번에 가서 되찾을 수 없겠는가 잘 살펴보라."고 명하였고,1899년 청나라와 러시아간의 국경 재감(再勘)때에는 청나라측 대표인 오대징에게 녹둔도 반환교섭을 의뢰하였으며, 그 뒤 우리나라와 러시아간에 국교가 열리자 러시아 공사에게 이 섬의 반환을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그들의 무성의로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또한 고종은 김광훈·신선욱 두 사람을 현지로 파견하여 녹둔도 관계지도를 작성하게 하기도 하였다. 이 지도는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라는 이름으로 그 당시의 녹둔도의 지리적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나타낸 것이다. 이 지도에 따르면 주민 가운데 우리 민가가 113호에 인구 822명이 우리 풍속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는 녹둔도가 그들의 영토로 관할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함은 물론 타국인의 접근도 막고 요새화하였다. 

 

훈춘부도통아문(1881-1909)

<육삼의 우리민족 이주사진 기행 주성화 zhutaining@paran.com>

 

 

훈춘부도통.아문(1881-1909) 옛터 1714년 간도에 훈춘 협령을 설치, 1859년 부도통급 협령으로, 1881년 훈춘부도통으로 승급시키고 간도의 대부분 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 훈춘부도통아문의 위치는 현 훈춘진 정화가이다. 부도통아문은 7칸으로 된 대문, 3칸으로 된 의문, 동쪽모서리에 각루 1개, 그리고 대청과 사랑채로 되었다. 1889년에 대문 좌 위쪽에 포대를 하나씩 앉혔으며 아문 밖 서남쪽모서리에 5칸으로 된 감옥을 지었다. 부도통부는 아문의 뒷 뜨락에 있었다. 1900년 짜리러시아가 불을 질러 대부분 건물이 없어지고 현재 아문 사랑채厢房의 일부분이 남아있다. 훈춘부도통아문의 제1임은 依克唐阿이다. 광서 15년(1889년), 이크탕아가 흑룡강 장군으로 승급한 후 정면우로와 남강 6개 사의 군민들이 훈춘에 있을 때 그의 공덕을 찬양하여 세운 것이다. 비석은 할바령 영마루 옛길 남쪽에 세워졌다. 비석몸체와 개두는 흰 돌로 조각되었고 롱대석은 사암으로 만들었는데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정면 중간 아래 부분의 네모난 테두리 안에 名留千古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비석은 1978년 여름, 대석두진중학교 한 교원에 의해 발견되었다

  

▼ 녹둔도의 벌판과 야산, 일제시대 때 봉오동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그러다가 선조 16년(1583년) 조정에서 여기에 둔전(屯田)을 설치한 후 “백성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녹둔도(鹿屯島)로 불리기 시작했다. 선조 20년에 여진족이 침입해 11명의 군사를 살해하고 농민 160여명을 납치해간 ‘녹둔도 사건’이 발생했다. 지역해군사령관으로서 이 섬 방어책임을 지고 있던 당시 43살의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은 이 사건으로 장형(杖刑)과 함께 백의종군해야 했다.   

조정은 즉각 두만강 건너까지 대군을 파견해 여진족에 타격을 가했다.  그만큼 녹둔도 사수(死守)에 대한 조선의 의지는 강했다. 이 반격 작전에서 이순신은 큰 공을 세워 재기할 수 있었다. 20세기 초까지도 녹둔도에 이순신의 녹둔도 전승(戰勝)비각이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지금 ‘녹둔도’는 섬이 아니라 러시아쪽 육지와 연결돼 있다.

 

1861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분명히 섬으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두만강 하구의 퇴적작용이 그같은 자연의 조화를 부린 듯하다.

 이 녹둔도가 러시아손에 넘어간 것은 1860년 청나라와 러시아의 베이징조약 체결 때다. 30년이 지난 1889년 고종 26년에야 이 사실을 알게된 조정이 청나라에도 항의하고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에게도 요구했으나 들어줄리 만무했다.

몇년 전 이곳을 탐사한 국내조사팀(팀장 이기석 서울대 지리교육학과 교수)은 갈대숲과 늪지의 초목들로 우거진 원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실제로 이곳은 시베리아 아무르 호랑이의 피난처 구실을 하면서 야생동물의 천국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20여 차례에 걸쳐 “녹둔도는 비옥하여 경작할 만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조사팀이 이번에는 러시아측의 엄격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20세기 초까지도 녹둔도에 살았음을 보여주는 연자방아와 놋쇠밥솥 등을 확인했다고 한다.

 북한과 구(舊)소련은 국경문제 협상을 벌인 바 있다. 아직도 베일에 싸여있는 녹둔도에 관한 양자 합의내용이 궁금하지만 영토를 이렇게 싱겁게 방기한 우리의 역사도 안타깝다.  

 ▼ 두만강 철교  

 

▼ 중국, 북한, 러시아 국경지역에 설치한 국경표지 토자비

 

     ▼ 블라디보스톡 아무르만의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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