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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피눈물로 세운 만주벌판 ‘경기村’…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5-06-10 조회수 : 691

 

피눈물로 세운 만주벌판 ‘경기村’… 100년째 디아스포라광복 70주년, 경기도 학술 토론회
한민족인 조선족을 동반자로… ‘진정한 조국’ 만들어야
 
승인 2015.06.08    저작권자 © 경기일보

경기일보와 경기연구원이 주최하고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가 후원하는 광복 70주년 기념 제3차 경기도학술토론회가 ‘일제강점기 만주집단이주와 경기촌 사람들’을 주제로 지난 5일 경기연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사회자로 나선 박정신 전 숭실대 부총장은 토론에 앞서 류시화 시인의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낭독하며 “오른쪽 외눈박이와 왼쪽 외눈박이가 서로 자기가 본 세상이 맞다고 다투고 있다”며 “우리는 일제 통치로 뒤틀린 사학을 양쪽 눈으로 바로보며 역사를 바로잡는 역사학을 지향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광복 70주년 기념 제3차 경기도학술토론회 기획의도를 통해 간도의 한인촌은 대략 세 차례에 걸친 집단 이주를 통해서 형성됐다고 밝혔다.

첫 번째는 조선 후기인 19세기에 압록강을 건너 집단 이주한 경우인데 청나라가 만주에 대한 봉금(封禁)정책을 해제한 것이 한 계기가 됐다.

이를 계기로 만주로 이주한 한인들은 타국에 이주한다는 생각보다는 선조들의 고토로 이주한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는 독립운동가들의 의도적 집단망명이다.

세 번째는 1931년 일제의 만주국 수립 이후 집단망명을 들 수 있다. 일제는 만주에 한인들을 대거 이주시켜 집단부락을 건설했는데 주로 가난한 한인들이 ‘낙토만주’라는 일제의 선전에 속아 집단 이주했다.

이런 이주민들 중에는 경기도 출신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거주하는 경기촌이 형성되기도 했다. 이렇게 이주한 한인들이 현재 200만명에 달한다.

이들에게 시선을 돌리면 곧 그 시선은 우리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이날 토론회는 한민족에게 광복은 과연 온 것인가, 이들 조선족에게 ‘진정한 조국’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 한인의 간도개척과 유하현 한인부락
-김병기 대한독립운동총사편찬위원장(참의부 참의장 희산 김승학 증손)

김병기 대한독립운동총사편찬위원장은 “간도는 우리민족의 발상지면서 우리의 고토 옛땅이다. 재중 동포들이 지금은 많이 떠나있다. 우리의 고토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김 위원장은 독립운동가 출신들을 중심으로 서술했지만 단순히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만 서술한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이란 목적의식을 가진 집단이주와 만주 사변 이후 생계를 위한 집단이주에 대해서도 서술했다.

특히 지산(芝山) 허영백(許英伯)이 1965년 서술한 ‘서간도 실록’은 일반인은 물론 학계에 처음 소개되는 저술로써 실제 이주자의 생생한 경험담과 목격담이 담겨 있는데 김 위원장을 통해 이날 토론회에서 공개됐다.

간도라는 지명은 함경도 종성과 온성지역 사이에 두만강물이 갈라져 흐르는 중간에 자연스럽게 생긴 섬을 말한다. 강과 강 사이에 있다고 해서 사이 간(間)자와 섬 도(島)자를 써서 간도라 부르게 됐다. 이후 한인들이 만주로 이주해 개간한 땅으로 확대 사용되면서 압록강, 두만강 이북지역인 만주 전 지역에 간도라는 이름이 붙게됐다고 김 위원장은 설명했다.

서북간도와 연해주 등지의 한인 이주 개척지는 역사적으로 보면 상고시기 이래 고구려와 발해로 내려오면서 민족의 활동무대로써 고대문화를 형성했던 민족의 옛땅이었다. 특히 독립운동사에서 큰 줄기를 이루는 ‘만주무장투쟁사’에서 이 지역은 중요한 거점으로 일찍부터 한인들이 정착해 대규모 한인사회를 형성했다.

오늘날 중국 안의 한민족인 ‘재중동포 (조선족)’들의 원형이 바로 19세기 이래 이주한 한인들인 것이다. 간도와 한민족 역사의 상관성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김 위원장은 밝혔다. 그러나 중국은 해방 전까지 사용되던 만주라는 명칭을 거부하고 ‘중국 동북지역’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다.
 

 ▲ 경기툰은 타인종에 대한 배타의식이 강해 어려운 이주시기와 생활환경, 문화혁명 시기를 거치면서도 돌잔치와 환갑잔치 등 우리의 전통 생활방식을 바꾸지 않고 있다. 김지욱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연구센터장 제공 
 ▲ 경기툰은 타인종에 대한 배타의식이 강해 어려운 이주시기와 생활환경, 문화혁명 시기를 거치면서도 돌잔치환갑잔치 등 우리의 전통 생활방식을 바꾸지 않고 있다. 김지욱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연구센터장 제공 

일제의 간도지역 이주정책으로 집단 이주한 지역에는 이주민들이 고향의 군 이름을 따다가 붙인 이름이 많다. 유하현 창성, 벽동, 경기, 초산, 가평 등 한반도의 평안도와 경기도에서 군 이름을 따온 것이다. 김 위원장은 “이주민들의 애타는 조국애와 애향심을 나타내는 것 같아 눈물겹다”고 말했다.

특히 유하현으로 이주해온 경기도 출신 이주민들은 집단부락을 형성해 경기촌을 형성하고 이른바 ‘만선척’이 제공한 토지· 집을 임대받아 주로 벼농사를 경영했다. 이들은 유하현 삼원포 일대에 안전촌, 풍향 의용개척단, 강가점 조선개척단 등의 명칭으로 개척단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김 위원장은 설명했다.

또한 김 위원장은 유아현은 일찍부터 한인들이 이주해 벼농사를 개척하면서 한인사회를 형성했던 것 이외에도 국내로부터 독립운동가들이 망명해 구국 무장 투쟁을 전개했던 독립운동의 발상지로도 유명하다고 밝혔다.

서간도 이주 한인들의 실생활을 얘기하면서 김 위원장은 학계 최초로 지산 허영백이 지난 1965년 서술한 ‘서간도 실록’을 소개했다. 서간도실록은 실제 서간도에 거주한 저자가 50여년이 지나 당시 체험하고 듣고, 본 것을 가감없이 수기로 기술한 책이다.

김 위원장은 “유하현 등 서간도로 이주한 한인들의 생활은 그리 녹녹치가 않았다. 국내에서 일제의 수탈을 피해 왔지만 만주에서의 이중 삼중 수탈도 견디기가 힘겨웠고 마적들의 횡포도 극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주 한인들은 경학사 등 자치기관을 중심으로 농사일에 힘쓰는 한편 교육운동과 독립군 양성을 통해 구국 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강인함을 보이기도 했다”며 “유하현에는 현재까지도 독립운동의 유적지는 물론 이주민이 정착했던 경기촌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를 기반으로 앞으로 유하현 등 서간도지역에 남아있는 경기도의 이주민 실태와 경기도 출신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심층적인 연구가 진척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망국과 실향의 한(恨), 만주 디아스포라를 떠올리다 (1930년대 ‘만주개척단’을 중심으로)
-구미정 숭실대 외래교수

“눈보라 사나워 야윈 볼을 깎고 빙판에 말굽이 얼어붙는 영하 50도 한북만리(漢北萬里)에 유랑의 무리가 산동쿠리(山東苦力)처럼 흘러간다” 다양한 인문학 글쓰기의 대표주자로 손꼽히는 구미정 교수는 이설주 시집 들국화에 실려 있는 ‘이민’이라는 제목의 시를 읽어 내렸다.

구 교수는 “이 시에 나오는 만주는 퍽 낯설다. 독립운동의 메카인 만주는 없고 민중의 한만 가득하다”고 설명했다. 도대체 그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이어 구 교수는 2연의 첫 행에 암시된 ‘사건’이 단서라고 밝혔다. 만주라는 코드에 균열이 야기된 것은 “일본서 또 무슨 개척단이 새로 입식(入植)한” 사건 때문이다.

 ▲ 학술토론회에 참석한 패널들이 토론을 마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학술토론회에 참석한 패널들이 토론을 마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만주개척단’에 대한 전(前)이해가 있어야 한다. 만주개척단은 1932년 만주국이 수립된 뒤 일제의 국책사업에 의해 만주국으로 이주한 집단부락민을 가리킨다. 일제는 우선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집단부락을 건설하려고 했다. 그러나 계획대로 되지 않자 한인(韓人)들로 그 대상을 바꿔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이 어찌 순탄했으랴. 식물도 옮겨 심으면 몸살을 앓는 터에, 하물며 사람이 어찌 멀쩡하겠는가. 이번 발표는 망국(亡國)의 상황에서 먹고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난 조선인들이 또 다시 정붙여 살던 집단촌을 떠나 이산(離散)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만주 경험’을 반추하기 위해 기획됐다고 구 교수는 설명했다.

구 교수는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오늘 그러나 여전히 빛은커녕 역사의 그늘 아래 밀폐된 그들의 특수 경험은 우리 겨레의 아픈 옹이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런 까닭에 인류 공동의 미래를 열어가는 데 일말의 단서를 준다고 본다”고 밝혔다.

일제의 만주사변 승리와 함께 1932년 3월1일 역사의 무대에 떠오른 만주국은 명색이 독립국이었다.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가 집정하니, 얼핏 보면 중국의 아류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일제가 내세운 꼭두각시 ‘얼굴 마담’일 뿐 실제 통치자가 아니었다.

일본 제국의회가 1932년 9월 일만의정서(日滿議政書)에 조인함으로 공식 창건된 만주국은 철저히 일제의 식민지에 불과한 이른바 ‘괴뢰국’이었다.

일제가 이러한 꼼수를 부린 이유는 명확했다. 서구 열강은 물론 일본 본토 국민들과 아시아 피식민지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제국주의를 선전하기 위함이다. 그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만주 괴뢰국의 연호에 잘 나타나 있는 대로, ‘대동’(大同)이라 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정치 슬로건, 곧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맹아 말이다. 이 개념은 표면상 ‘반(反)민족주의적ㆍ다(多)민족적 국민국가’를 지향한다는 뜻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 뜻을 담아 일제는 ‘오족협화(五族協和)’를 만주국 건국이념으로 내세웠다.

만주의 지난한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오족, 곧 일본인ㆍ한인(漢人)ㆍ만주인ㆍ조선인ㆍ몽고인(蒙古人)이 서로 협력해 조화롭게 사는 나라를 건설하자는 환상적인 구호다. 얼마나 그럴듯한가.

그러나 이것이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는 애당초 만주국이 괴뢰국으로 출발한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된 자명한 결과였다.

오족협화로 치장된 ‘만주 판타지’는 1930년대 일본 본토인들과 특히 조선 식민지 주민들에게 ‘만추리안 드림’(Manchurian Dream)을 유포하는 계기가 됐지만 정작 현실은 노골적인 제국주의의 민낯, 곧 야만스런 수탈과 광기 어린 착취뿐이었다고 구 교수는 설명했다.

구 교수는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우리에게는 과거 그 땅에서 살았던 수많은 ‘피붙이’들을 어떤 식으로든 타자화하지 않고 또 현재 이 땅에 거주하는 수많은 ‘조선족’ 들을 수탈하는 데 동조하지 않기 위해 제3의 시선, 곧 ‘그 너머의 시선’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이어 그는 “디아스포라에게 향수병의 원인은 ‘진정한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다. 국경에 둘러싸인 그런 조국 말고 또 혈통과 언어와 문화의 연속성이라는 관념 속에 박제화된 그런 조국 말고, 거기서만큼은 어느 누구도 소수자나 약자나 타자가 되지 않으며 온전히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그런 나라 말이다. 그래서 아직도 광복은 오지 않은 것이다.

참된 광복은 분단을 넘어 통일로, 통일을 넘어 ‘진정한 조국’으로 부단히 나아가는 역사적 분투를 통해서만이 주어질 것이다. 도둑같이 홀연히 임할 것이다. 하여 우리의 질문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광복 70주년이라는데 어떤 광복, 누구의 광복인가라며 진정한 의미의 광복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 중국 길림성 경기촌 사람들의 삶과 문화
-김지욱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연구센터장

김지욱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연구센터장은 경기도 출신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경기촌’ 사람들의 삶의 형태를 수년간 진행된 방문조사를 토대로 세세하게 풀어냈다. 그는 해외 생존 이민 1세대를 비롯한 해외 이주민들에 대해 ‘경기도 밖의 경기도’, ‘경기도 밖의 경기도 사람’으로서의 정책적 관심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조선인의 만주 이주는 만주사변(滿洲事變ㆍ1931)을 기점으로, 이전을 ‘자유이민’, 그 이후를 ‘계획이민’으로 나눌 수 있다. 당시 일제는 만주의 추운 날씨 때문에 일본인의 만주 이민이 성공할 가능성이 적을 것으로 판단, 비교적 기후가 온화한 조선에 일본인을 정착시키고 대신 조선인을 만주로 이주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일제는 1936년 조선인의 만주 이민이라는 국책을 수행하고자 경성에 선만척식주식회사(鮮滿拓植株式會社)를, 만주 신경에 만선척식고분유한공사(滿鮮拓殖股有限公司)라는 특수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일제는 15년 동안 매년 1만 호씩 모두 15만 호의 조선인을 만주에 이주시키고자 계획했으며 1937년 3월10일에 집단이민이 처음으로 실시됐다.

특히 1936~1940년에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은 약 25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경기도에서 만주로 이주한 뒤 지금까지 ‘경기촌’이라는 마을 이름을 유지하며 살아온 사람들도 이 시기의 이민에 해당한다.

경기촌은 현지에서 경기툰(京畿屯)으로 불리며 행정구역으로 중국 길림성 유하현 강가점 조선족향 오성촌에 속한다. ‘오성촌(五星村)’은 경기툰을 비롯해 인근의 벽동툰(碧潼屯), 창성툰(昌城屯), 초산툰(楚山屯), 태래툰(泰來屯) 등 다섯 개의 마을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경기툰이 조성된 것은 1940년 초로써 처음에는 현재 마을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평지였다. 지금은 그곳을 구툰(舊屯)이라 부른다. 구툰은 물이 좋지 않아 괴질이 자주 발생했는데 이후 마을 사람들이 논의해 우물을 찾아 이동한 곳이 현재의 경기툰 마을이다.

2005년까지만 해도 경기툰 마을에는 70여 가구에 남자 160명, 여자 140명 등 300여명이 살고 있었으나 2012년 13가구 정도로 축소돼 대부분 빈집으로 남아있다.

경기툰의 젊은 사람들은 직장과 교육을 위해 북경(北京)ㆍ대련(大連) 등 대도시에서 생활하거나 한국에 들어와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상태다. 경기툰과 마찬가지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지역별로 자리를 잡은 다른 지역은 이미 한족과 타지인들로 마을 구성원이 혼재된 상태다.

  
   

이에 반해 경기툰은 비록 규모는 축소됐지만 지금도 경기도 출신 지역민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경기툰의 이주 1세대들은 대부분 작고했으며 이들과 함께 이주해온 1.5세대가 몇 분 생존해 있다. 구성원들은 여전히 경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물론 마을을 큰 범위의 가족 그리고 친족으로 인식하고 있다.

특히 경기툰은 타민족에 대한 배타의식이 강해 통혼을 경기툰 내에서만 했으며 경기도 언어를 사용하고 있어 연변방송국 아나운서들이 한국 표준말을 배우기 위해 내방하기도 했다.

이들의 생활문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어려운 이주시기와 생활환경, 문화혁명 시기를 거치면서 이주 당시의 살림살이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것과 현지의 생활환경에 적응하면서 생활의 필수도구는 한족들의 것을 사용하면서도 생활방식은 바꾸지 않았다는 점이다.

돌잔치나 각 가정의 애경사에는 온 마을 주민이 함께 참여해 밤새 음식을 장만하고 다음날 하루 종일 모여서 먹는 풍습이 지금도 남아 있다. 특히 61세가 되면 대부분은 회갑잔치를 성대히 치르고 있다.

자동차를 대절해 마을을 한 바퀴 돌고 폭죽을 터트리고 큰 회갑상을 온 마을 사람들이 직접 장만해 차리고 그 앞에 선물을 진열한다. 자식들의 절과 술을 받고 기념촬영을 하고 하루 종일 먹고 즐기는데, 먼 곳에 있는 친척들도 대부분 참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2005년도 방문조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양상이었다. 이후 2011년 10월 2차 방문조사 당시 대대 등록상으로는 60호였으나 16호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으며 나머지는 빈집이거나 한족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3~4호 정도 들어와 있었다.

마을 주민은 경기툰 원주민 18명이 당시 만날 수 있는 인원이었으며 그 중 노인 12명, 중년층 6명이 전부였다. 2005년 방문조사 당시 면담을 했던 노인 중 8명이 작고했다.

당시 생존 이주 1세대인 안봉려(광주ㆍ1934년생), 최창화(평택 포승면ㆍ1926년생), 장순례(용인 서원마을ㆍ80세ㆍ최창화 부인ㆍ갈대툰), 최봉화(평택 포승면ㆍ78세ㆍ7세에 이민ㆍ최창화 동생), 서덕환(수원 비행장 옆 거주ㆍ13세에 이민ㆍ84세)은 마을의 존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로 구술조사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2012년 11월에 3차 조사방문했을 때는 최창화, 서덕환 어르신은 돌아가신 상황이었다.

김지욱 센터장은 “2007년 국내 방문취업제 이후 급속하게 한국으로의 취업 출타로 경기툰 마을이 공동화되고 있으며 그 현상은 2011년 방문에서 심각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라며 “이러한 때에 경기도에서 경기촌 주변의 조선족에 대한 조사와 나아가 중국, 해외 생존 이민 1세대들에 대해 ‘경기도 밖의 경기도’, ‘경기도 밖의 경기도 사람’으로 정책적인 관심을 가진다면 한민족으로서의 동포애와 경기도 사람으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일제강점기 경기도민의 만주 이주와 귀향
-강진갑 경기대 교수

강진갑 경기대 교수는 조선족을 미래 사회를 함께 열어 갈 ‘동반자’로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통일을 넘어서 한민족 모두가 희구할 수 있는 ‘진정한 조국’을 만들어야 하는 의무가 바로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절감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린성을 포함한 중국의 동북3성에는 한때 조선족이 200여만명에 달했으나 지금은 50여만명으로 줄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한국으로 들어왔다. 현재 경기툰에 사는 이주민 1세대는 대부분 사망했으며 경기툰의 조선족 공동체 역시 거의 해체 단계에 접어들었다. 대신 새로운 공동체가 한국에서 형성되고 있다.

경기도에는 귀향한 조선족의 집단 거주지가 있다. 안산의 ‘국경없는 마을’이다. 2015년 4월 현재 안산에는 4만6천33명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다. ‘국경없는 마을’에 조선족을 포함해 외국인 이주자들이 늘어나면서 주변 경관도 변화하고 있다.

중국식 간판이 늘어나고 한국의 다른 지역에서 목격하기 어려운 전화방, 중국식품 재료점 등이 늘어나고 있다. 경기툰을 떠난 이주민 2세대들은 결혼식을 한국에서 올리고 이주민 1세대인 부모의 칠순잔치도 한국에서 치른다.

 ▲ 사회 박정신 前 숭실대 부총장 
 ▲ 사회 박정신 前 숭실대 부총장 

많은 경기툰 사람들이 한국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귀향 조선족의 규모가 나날이 확대되고 있지만 이들 조선족에 대한 한국인들의 시선은 그리 따뜻하지 않다. 조선족은 만주로 떠난 이주민 1세대들의 자녀들이지만 아직까지도 그들을 외국인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이 대부분이다.

강 교수는 “조선족은 만주로 떠난 이주민 1세대들의 아들 딸들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족을 다문화정책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경기툰과 가평툰 등 경기마을 출신 조선족을 고향으로 돌아온 손님으로 여기고 재외동포로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한국인 중 상당수가 아직도 조선족 하면 힘든 일을 하는 이주노동자나 결혼 이주 여성을 떠올리고 다문화 정책을 담당하는 공직자들조차도 이러한 인식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다.

조선족은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이 조금씩 상실해가고 있는 ‘도전정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랴오닝 성, 지린 성, 헤이룽장 성 등 중국 동북 3성에 살던 200여만명의 조선족 중 그들의 집거지에 그대로 남아 있는 이들은 60여만명이고 나머지 140여만명은 모두 새로운 성취를 위해 살던 곳을 떠나왔다.

게르만 민족 대이동에 버금가는 자발성에 기초한 민족 대이동을 한 이들이 바로 조선족이다. 이처럼 강인하게 새로운 곳을 개척해나가는 집단이 앞으로 10년, 20년, 50년 뒤에 어떠한 집단으로 성장해 있을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게 강 교수의 설명이다.

조선족에 대한 연구와 학자들의 의견들은 끊임없이 제시되고 있다.
일부 조선족 학자들은 중국에서 조선족은 다른 민족에 비해 우대받고 있다고 했다. 이유인즉슨 조선족이 만주에 벼농사를 보급한 것과 항일전쟁 기간에 공을 세운 것, 6ㆍ25 전쟁에 참전해 중국의 항미원조 보가위국 기여한 것 등이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 개전 당시 조선족 3만5천여명이 인민군에 편입돼 전쟁에 참전했고 인민군 21개 보병연대 중 10개 연대가 조선족 부대였다는 연구도 있다. 특히 조선족은 남한과 북한 양쪽과 혈연관계를 가지고 있고 남북한 모두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남북관계 진전에 여러가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조선족은 중국과 북한을 오가며 사업을 펼치고 있어 시장경제를 모르는 북한경제를 개방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은 물론 남북한을 오가며 북한 사람들에게 남한과 중국 문화와 소통하는데도 많은 기여를 할수 있다는 이론이다. 한국 및 일본에서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한 유학생, 상사 주재원, 기업인 등 조선족 엘리트들이 북한과 중국의 경제협력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것이다.

강 교수는 “우리가 조선족의 성장을 도와 함께 문제를 풀어가고 함께 성장할 지, 아니면 여전히 이들을 규제 대상으로만 파악해 조선족이 우리와 상관없는 다른 성장의 길로 가게 내버려 둘 것인지를 결정해야한다. 급성장하는 중국사회를 조선족보다 더 잘 아는 한국인들이 얼마나 있을까. 이제 조선족을 미래 한국사회를 열어갈 동반자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하고 선택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한편 이어진 토론회에서 토론자들은 ‘해방 후 조선인 만주개척단은 어떻게 되었나’, ‘중국동포문제에 대하여’ 등의 주제로 자유토론을 진행했다. 토론자들은 경기촌 사람들을 어떻게 보듬을 것인가, 남북교류에서 조선족의 역할은 무엇인가, 조선족에 대해 어떠한 정부차원의 지원책이 필요한가 등의 의문을 제기하면서 토론장의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최원재ㆍ박준상기자
사진=전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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