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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상태의 역사속 다문화인 9> 법치 질서를 세운 중국 귀화인 당성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1-02-07 조회수 : 940


 



지면발행일 2011.02.07  63면



 



당성(唐誠)은 중국 저장성(浙江省)출신이다. 원나라 말기 전란을 피해 고려에 귀화했다. 율령(律令)에 정통하고 밝아서 정사를 처리할 때에도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국정을 맡은 자가 자기 편에 서지 않는 성석린(成石璘)을 미워하여 죄를 덮어씌워 감옥에 가두었다, 병마도통사(兵馬都統使) 최영(崔瑩)이 옥사를 담당하였는데 장차 극형에 처하려 하였다. 당성은 성석린의 죄가 법률에 비추어 봐도 사형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최영을 설득하였으나, 최영은 듣지 않았다. 당성이 거듭 주장하였으나 어쩔 수가 없게 되자, 드디어 율문(律文·법률을 조목별로 적은 글)을 땅에 집어던지면서 최영에게 이르기를, “도통(都統)이 율문보다 먼저 났습니까? 아니면 율문이 도통보다 먼저 났습니까? 도통이 어찌하여 자기 한 사람의 견해로써 율문을 버리십니까?”라고 말하니, 최영도 당성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이성계도 성석린을 적극 도왔으므로, 성석린은 사형을 면하고 감형되었다. 이는 인치보다 법치가 우선임을 강조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조용히 뒤에서 외교문서 작성 등을 담당하였던 당성은 1401년(태종 1)에 왕에게 비서직이 아닌 실제 관직에 임명하여 달라고 간청하였다. 태종은 그를 개성부 부유후(副留後)로 삼았고, 1409년에는 공안부 부윤(府尹)에 임명하였으며, 밀양을 관향(貫鄕)으로 내려 주었다. 그는 밀양 당씨의 시조다.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성석린이 시(詩)로써 애곡(哀哭)하기를 “학문이 이문(吏文)을 겸하여 양쪽이 정강(精强)하니, 동방에 유익함을 누가 견줄 수 있으리오? 도통(都統)과 율문(律文)의 선후 이야기, 이생에 갚기 어렵고 죽어도 잊기 어렵네”라고 하였다. 당성은 중국어 이문(吏文·외교에서 사용된 글)에는 독보적인 존재였으며, 성품이 근실하였고 율문과 사대문서(事大文書)에 능하여 고려 말과 조선 초의 형정(刑政)과 외교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중국에 보내는 국서는 반드시 친히 살피고 가다듬어 조금도 착오가 없었으므로 나라에서 믿고 맡겼다.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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