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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헌법제3조영토조항과 간도문제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07-04-06 조회수 : 1018
헌법제3조영토조항과 간도문제 ( 3 )  



집필자 : highboomj  (2004-09-06 03:23) 



" 한국은 한민족 정통성의 계승자로서 일제 식민지 이전

한민족의 국가였던 조선과 대한 제국의 영토를 계승할 

권리와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한민족은 태백산(백두산) 신단수 아래서 나라를 세운 고조선시대부터 부여∙고구려∙발해 시대에 이르기까지 백두산을 중심으로 만주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활동영역으로 삼아 왔다. 



그러나 발해가 멸망한 후 만주 일대의 지배권은 거란족의 요, 여진족의 금, 몽고족의 원을 거쳐 한족의 명나라로 넘어 갔다. 

이 동안 만주 동남부 일대와 두만강 유역에는 여진족이 거주해 왔는데 조선시대 초 태조가 이 지역을 경략한 후 여진족은 ‘번호’란 이름으로 대대로 조선에 조공을 해왔다.



임진왜란 이후 15세기 말에 누루하치를 중심으로 한 여진족의 세력이 커져서 만주 일대를 차지하고 후금을 건국한 후 이어서 국호를 청으로 바꿨다.

정묘호란 후 청은 조선을 형제국으로 삼고 두 나라 사이의 국경선을 설정하였으나 그 경계선이 명확하지 않았다. 



병자호란 후 1638년에는 압록강 하류의 남반에서 고려문을 거쳐 애양 변문∙성창무∙왕청 변문에 이르기까지 방비선을 설치하고 이 일대를 민간의 출입을 금지하는 국경대(國境帶)로 정하였다.



그 후 청나라는 3대 순치제 때 명나라를 정복하고 거족적으로 중국 본토로 이주해 감에 따라 백두산 흑수 지방인 만주 동남부 일대는 인적이 드문 무인 광야로 되어 갔다.

그리고 청나라는 종래의 국경대를 포함한 만주 일대를 봉금(封禁)지대로 선포하였다.



봉금지대란 무허가 개간이 엄격히 금지되며, 만약 이를 어기고 경계를 넘어 개간이나 벌목 등을 하는 자는 한∙청 양국이 엄히 다스리는 출입금지 지역으로서 어느 나라의 영토라고도 명확히 정하지 않은 한∙청간의 국경지대이자 완충 지대였다.



그러나 이 봉금 지대는 국경지방에 사는 민간인의 생업처였기 때문에 민간인들은 생계상의 이유로 봉금령을 무시하고 월경하는 일이 빈번하였다.이러한 불법적인 월경은 한∙청강의 중요한 외교 문제가 되었다. 



1710년 봉금 지대의 서간도 지방에서 조선인 이만지가 청나라 사람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청나라는 양국간의 국경선을 명확히 할 것을 조선에 요구했다.



국경선 확정을 위해 1712년(숙종 38년)에 청나라는 목극등(穆克登)을 변계사정관으로 파견하였으며 조선에서는 접반사로 박권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를 임명하여 목극등 일행과 공동으로 국경을 심사케 하였다.



이들은 백두산에서 흘러 내리는 물줄기로 국경을 정하기로 하고 백두산 등정에 나섰는데 목극동은 박권과 이선부가 늙어서 산을 올라갈 수 없다고 따돌리고 조선의 하급 관리만을 대동한 채 백두산에 올라 천지에 이르렀다.



목극등은 양국의 경계로 삼을 만한 물줄기를 조사케 한 다음 백두산 천지에서 남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서 두 물줄기가 동∙서로 갈라지는 중간 지점에 높이 3척, 넓이 2척쯤 되는 돌을 세우고 그 위에 ‘대청총관 목극등이 명을 받아 변경을 조사하다가 여기에 이르러 자세히 살피니 서쪽은 압록강이요, 동쪽은 토문강이므로 분수령 위에 돌을 세우고 기록한다. 



강희 51년(조선 숙종38년, 1712년) 5월 15일’이라고 새겼으니 이것이 바로‘백두산 정계비’이다.



이 정계비는 목극등이 세웠다 하여 중국에서는 ‘목비’라고 부르는데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大淸

烏喇總管穆克登奉

旨査邊至此審視西爲鴨綠

東爲土門故於分水領上靭

石爲記

康熙五十一年五月 十 五一日 (이하 생략)



‘정계비 제정 과정에서 박 권과 이선부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알 수 있듯이 조선 정부는 영토 의식이 희박했던 반면에 청나라는 그 동안 수 차례에 걸친 러시아와의 국경 분쟁의 경험을 통해 영토 의식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영조시대 당주(鐺州)는 그의 유고에서 ‘목극등은 정계비를 세우고 나서 소국(조선)에 사람이 없어서 좋은 땅을 많이 잃었다고 말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당시 종주국의 위치에 있던 청나라가 일방적으로 세운 정계비에 대해 조선 정부에서는 그 정계비가 잘못 세워진 것이라는 논의가 분분했으나 공식적인 이의 제기가 없었다. 



이로써 어느 나라 영토인가 그 한계가 불분명했던 만주 일대는 압록강과 토문강으로 한∙청간의 국경이 정하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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