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발행일 2011.01.24  64면 



설손은 위구르(Uighur·回 ) 사람으로 고조부 위래티무르 이래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는데 아버지 철독은 강서행성 우승(右丞)을 지냈다. 조상 대대로 중국과 몽골의 국경지대인 설련하( 輦河)에 살았으므로 설( )씨로 성을 삼았다. 설손의 맏아들 설장수( 長壽)가 조선 태조 때에 연산부원군에 봉해지고 계림을 본관으로 하사받았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경주로 삼았다. 설손의 중국 이름은 백료손(百遼遜)이다. 그는 학문이 깊고 문장에 뛰어나 원나라 순제(順帝) 때 진사에 합격하였고,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단본당(端本堂) 정자(正字)로 뽑혀 황태자에게 경전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다. 그러나 승상 합마(哈麻)의 시기를 받아 단주(單州) 태수로 쫓겨났으며 그곳에서 부친상을 당하여 대령(大寧)에 살게 되었다. 이때 홍건적의 침입을 받아 고려로 들어와 1358년(공민왕 7)에 귀화하였다. 공민왕은 그가 단본당에서 황태자를 가르칠 때 원나라에 있으면서 친교를 맺었기 때문에 그를 후히 대접하여 부원후(富原侯)로 봉하고 부원의 땅을 주었다. 호를 근사재(近思齋)라 하며 고려의 대표적 시인의 한 사람이고, 저서로는 ‘근사재일고 (近思齋逸藁)’가 있다. 그의 시 중에 한 편을 소개하면 귀화인의 고독감을 느낄 수 있다. “남아로 나서 이름 이루지 못하고 이십이 넘었으니, 강호에 해 저문데 무슨 소득 있으랴. 가는 곳마다 골육지친이 없으련만, 가고 머무는 데 차라리 모르는 사람보다 못하다. 키를 돌리자 바람이 와서 돛이 저절로 걸리니, 내일은 누구 집에 댈지 몰라라. 그대 보지 않았는가, 적공의 문에 새 그물 쳤다는 것을, 아아, 세상 물정을 그대는 한탄하지 말아라.” 아들은 설장수( 長壽)를 비롯하여 5명이 있었다. 위구르는 오늘날 중국의 서역 지방이며 터키계가 살고 있다.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