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자료실

 

제목 : 사이섬 사이섬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09-12-03 조회수 : 948








백두산에서 흘러내리는 두만강물은 제방뚝이란 무언지도 거의 모르고 산곡간을  누비며 출렁이다가 룡정시 개산툰진구간 천평벌에 이르러서는 중조 두 나라 제방뚝사이로 천천히 흐른다. 이곳 천평벌 하단에 개산툰진의 선구촌 제6촌민소조가 자리잡고있는데 나이 지긋한 당지 사람들은 지금도 이 마을을 꼬리섬으로 외운다. 꼬리섬이란 사이섬을 말한다. 사이섬이면 그제날 간도의 유래가 담긴 력사의 현장이 아니더냐? 그렇다! 여기 사이섬이 바로 100여년의 조선족이주의 눈물이 어린 그 사이섬이다.

사이섬을 알자면 아마도 청나라시기로 거슬러야 할것 같다.



1644년에 청나라 주력군이 파죽지세로 관내에 쳐들어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북경에 도읍을 정한후 청조통치자들은 장백산을 저들 조상의 발상지 — 룡흥지지(龙兴之地)로 간주하고 강희년간(1663-1681)에 흥경(오늘의 료녕성 신빈)이동, 이통주이남, 두만강이북의 광활한 지역을 봉금(封禁)하고 타민족이 봉금지내에서 사는것을 엄금하였다. 1712년에 청조에서 장백산에 정계비를 세운후 봉금정책은 보다 강화되였다. 한데서 이 지구에는 청나라조정이나 여러 왕부에서 파견한 장정들이 사냥하고 인삼을 캐고 진주를 채집한 외 돈화, 훈춘 두 현에 만족이 일부 거주하고있을뿐이였다.



그러던 18세기중엽부터 산동, 하북 등지의 관내 한족들이 봉금정책에 눌리지 않고 료동, 길림 지방을 거쳐 연변땅에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조선북부의 빈고농민들도 리조조선의 엄격한 국경봉쇄를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너 날농사에 나섰다. 날농사란 말 그대로 아침에 왔다가 저녁에 돌아가는 농사를 말한다.

그 시기 조선 무산으로부터 하류의 두만강가운데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섬들이 있었다. 이런 섬가운데서 제일 큰 《섬》을 사이섬이라고 불렀는데 이 사이섬이 바로 오늘의 선구구간 사이섬을 말한다. 조선 6진(六镇—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의 농민들은 두만강을 넘나들다가 관리나 변방순찰병들에게 발각되면 사이섬에 갔다온다고 변명하였다. 두만강을 건너 날농사에 나선 사람은 거의 집집마다 한사람씩은 있었다.



헌데 《동삼성정략》이나 《연길변무보고》에 의하면 사이섬은 워낙 섬이 아니였다고 한다. 이를 두고 연변대학 박창욱교수는 중국조선민족 발자취총서(1)—《개척》의 해당 글에서 이렇게 적고있다. 

《지금의 룡정시 광개향(필자주: 지금은 개산툰진으로)의 선구, 광소촌과 조선 종성사이로 흐르는 두만강의 중국측강안에 길이 약 10리, 너비 1리가 되는 2000여무의 〈복새험〉이 있었는데 그 복새험은 광제욕에 잇대여있는 륙지였다. 이 〈복새험〉이 어느때부터 개간되였는지는 알수 없으나 1881년 연변지구의 봉금제가 페지되자 월경한 조선족간민들이 광제욕앞을 개간하느라고 물길을 뺀후부터 〈복새험〉은 사방이 강물에 둘러싸인 〈섬〉으로 되였다.》



박창욱교수가 말하는 이 《섬》이 바로 사이섬이다. 당시 날농사를 하는 조선사람들이 사이섬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번지여 두만강북안은 북간도로, 압록강북안은 서간도로 불리였다. 두만강이북에 깊숙이 들어온 조선이주민들은 두만강연안을 《역섬》이라고 불렀다. 이에 청조의 통치자들은 1848년부터 해마다 변방순찰병들을 파견, 순회시켜 조선 도강자들의 집과 밭을 조사, 파괴하고 쫓아냈지만 늘어만나는 도강자들을 어찌할수 없었다.



1861년과 1863년, 1866년에 대수재가 조선북부지구를 휩쓸었다. 1869년과 1870년엔 련속 대한재가 덮치였다. 생사의 기막힌 현실앞에서 조선북부의 많은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고향땅을 등지고 눈물을 뿌리며 남부녀대하고 강을 건너섰다. 두만강이북에로의 력사적인 대이주는 이렇게 시작되였다. 청나라의 봉금제도, 리조정부의 월강죄도 목숨을 내건 도강자들의 흐름을 막아낼수 없었다.



1883년에 조선의 서북경락사 어윤중에 의해 월강죄가 해소되고 1885년에 청정부에 의해 봉금령이 정식으로 페지 되였다. 두만강이북, 해란강이남의 길이 700리, 너비 40~50리 되는 지역이 조선이주민의 개간구역으로 확정되자 1890년에 이르러 무산으로부터 종성대안에 이르는 200리 두만강이북이 전부 개간되였다. 조선이주민의 거주지구는 두만강대안으로부터 해란강, 부르하통하, 가야하 류역일대로 점차 확대되였다. 



눈물에 젖은 이주사의 갈피갈피라 하겠다. 이 글에서 보여주고자하는 사이섬이 바로 이주력사의 생생한 《견증자》가 아닐수 없다.



지난 50년대까지만 해도 개산툰구간 두만강은 선구촌구간에서 두곬으로 흐르다가 합수되면서 길이가 꽤나 되는 섬을 이루었다. 선구촌의 원 이름이 사이섬이라면 그대는 믿을수 있겠는가, 어찌하든 이는 드팀없는 사실이다. 선구촌의 1~5촌민소조 구역이 머리섬이라면 천평벌 말끝의 선구촌 6촌민소조구역은 꼬리섬이였다. 두만강천리구간에서, 조선족이주사에서 가장 유명했던 나루터를 꼽으라면 아마 이곳 선구나루터를 꼽아야 할것이다. 나루터가 한자로 번지여 선구(船口)로 되고 선구가 꼬리섬의 지명으로 되였다. 이 지명에는 이런 유래가 깃들어있다.



19세기 60년대 두만강대안의 조선 종성 하산봉에는 리영수형제가 살고있었다. 그 시절엔 날농사를 짓던 시절이라 리영수형제는 강물이 넓은 두만강을 떼목을 타고 건너와서 땅을 뚜지고 농사를 지었다. 그때만 해도 종성사람들은 사이섬농사를 지을 때이고 월강죄를 다스릴 때여서 리영수형제는 누가 물을라 치면 사이섬에 가서 농사를 짓는다고 얼렁뚱당 넘기군 하였다. 1883년에 서북경락사 어윤중이 북관 6진을 순시하고 조정에 올린 보고에 《월강하는 죄인을 다 죽일수 없다.(越江罪人不可尽杀)》고 지적하자 사람들은 시름을 놓고 월강농사를 했다. 리씨형제는 아주 이사하고말았다. 그 뒤를 이어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차츰 배가 오가고 선구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광복전에 강건너에 종성세관이 있고 북안에 선구해관이 있은 데다가 세무소, 파출소, 학교, 상점, 료리집들이 따라 흥기한데서 제법 흥성흥성한 동네였다. 

그제날 나루터를 볼라치면 이 일대 섬을 이루며 흐르던 두줄기 강이 이곳 나루터에서 합수되면서 강폭이 



아주 넓었다고 전해진다. 지난 50년대부터 당지에서 강을 한곬으로 몰아 넣으며 제방뚝을 쌓기 시작하자 강뚝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사이섬의 옛모습을 다시는 찾을수 없게 되고 나루터는 뚝밖으로 밀려나 원 모양을 잃고말았다. 지금은 호수를 이룬 논밭머리 쑥대속에 외로이 버려진 상태. 그래도 옛날의 자그마한 콩크리트땜이 여전하여 이전 나루터임을 환기시켜주니 다행이다. 



흥미로운것은 사이섬이 옛모습을 잃은 대신 제방뚝밑으로 흐르던 두만강이 앞으로 물곬을 옮기면서 새로운 사이섬이 생겨나 옛모습이 아닌 사이섬이나마 볼수 있는것인데 새 사이섬—꼬리섬속에 중조국경선이 생겨나 보다 가관이다. 지금 보면 새 사이섬이라 해도 사이섬이 우리쪽 땅과 이어진데서 조선땅이란 느낌을 가져볼수가 없다. 한데서 우리쪽 사람들은 조선땅 사이섬에 가끔 놀러가거나 휘트인 돌밭에서 탐석하기도 하는데 변경을 순라하는 두만강저쪽 조선군인들도 관계치 않는다. 



사이섬은 이렇듯 피눈물의 이주력사를 담은 유서깊은 땅이기도 하고 짙은 흥미를 자아내는 신형의 땅이기도 하다. 하기에 오늘날 적지 않은 유람객들은 사이섬을 찾아보며 휴식의 한때를 즐기군 한다. 실로 연변의 이름난 관광명소로 떠오를만한 력사의 땅이다. 



허나 우리쪽 사이섬이라 해도 사이섬과 그 부근에는 아무런 관광시설들이 없어 쓸쓸한 기분만 더해준다. 안내자나 소개자가 없으면 뭐가 뭔지를 가려볼수 없는 현실. 선구촌 제6촌민소조를 민속마을로 꾸미고 그제날 나루터와 사이섬가에 사이섬 이주박물관을 꾸린다면 그 품위가 확연히 달라지련만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오, 사이섬아, 명실공히 한다 하는 관광명소로 떠오를 그날은 언제냐? 그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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