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지적 100년 자료실

 

제목 : 이완용 600억 어디로 … 6961만원밖에 못 찾아 아쉬워요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5-03-13 조회수 : 230

[중앙일보] 입력 2015.03.11 01:48 / 수정 2015.03.11 01:50         

친일재산환수법 제정 10년
대대로 상속된 선산 주장에
진짜 묘 있나 산까지 뒤져
친일파 1000억 땅 찾아냈지만
을사오적 재산은 거의 없어

                        

이완용
제가 세상 빛을 본 건 ‘8·15 광복’ 60년을 맞은 2005년 12월 19일입니다. 올해 나이 열 살입니다. 어떤 이는 저로 인해 가슴에 맺힌 한(恨)을 풀었고, 어떤 이는 애써 부정하고 싶었던 진실을 마주해야 했죠. 제 이름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친일재산환수법)입니다.

 친일파 이완용과 송병준 자손의 ‘조상 땅 찾기 소송’이 저를 태어나게 했습니다. 을사오적(乙巳五賊·1905년 을사조약에 서명한 내각 대신 5명) 이완용의 후손은 1992년 시가로 30억원대인 서울 북아현동 대지(2372㎡)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해 97년 승소했어요. 그는 곧장 이 땅을 팔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면서 국민적 분노를 샀죠. 송병준의 자손도 3000억원 상당의 인천 부평의 미군기지 ‘캠프 마켓’ 부지(36만5000㎡)가 자기 땅이라며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일제시대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땅은 “송병준이 우국지사 민영환 선생으로부터 빼앗은 토지”라고 합니다. 최종적으로 패소한 게 천만다행이었죠.

  저의 존재를 근거로 정부는 ‘친일재산환수 조사위원회’(2006년 7월~2010년 7월)를 발족해 친일파 재산 환수 작업에 나섰습니다. 40여 명의 조사관들이 조선총독부 관보·공문서를 토대로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은 사람들을 1차로 추렸습니다. 이들의 본적 정보와 족보를 뒤져 후손 가계도를 그려나갔습니다. 2008년 18대 총선 때 한나라당의 현역 국회의원 보좌관이 조사위로 전화를 걸어 “친일파 명단에 우리 의원님이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청탁한 일도 있었어요. 결혼해 족보에서 사라진 여성, 북한에 본적을 둔 인물을 제외해 나가다 보니 454명→441명→168명으로 압축이 됐죠.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들이 후손에게 상속한 부동산 2359필지(1113만9645㎡)를 대상으로 현장 조사가 시작됐어요. 조사관들이 전국으로 퍼져 답사를 했죠. 비옥한 전답은 이미 팔아 현금화한 경우가 많아 남은 건 대부분 임야였답니다.

 그나마도 후손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선산”이라고 주장해 조사관 3명이 하루 종일 산을 뒤지며 실제 조상 묘가 있는지를 조사한 적도 있답니다. 전라남도 지주 친일파인 김윤수의 땅 1500필지를 확인하기 위해선 일주일간 전북 고창의 여관에서 숙식을 했습니다. 그렇게 1000억원대 땅을 국고로 환수했답니다.

 조사위 활동이 2010년 막을 내리자 후손들과의 ‘소송 전쟁’의 막이 올랐습니다. 2006년부터 올해 2월까지 행정소송 92건, 국가소송 22건, 헌법소원 9건 등 123건의 소송이 진행됐어요. 친일파 후손들은 하나같이 법정에서 “친일 행위로 모은 재산이 아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이해승의 후손 이우영(75) 그랜드힐튼호텔 회장은 2008년부터 행정·민사 소송을 5건 제기했고 모두 대법원까지 상고했습니다. 2010년 300억원대의 서울 은평구 땅과 관련한 소송에서 서울행정법원은 특별법상 ‘한·일 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은 자’ 조항을 이유로 이씨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작위를 받은 것만으로 한·일 합병의 공이 입증된 건 아니라는 거였죠. 그러자 국회는 해당 조항에서 ‘한·일 합병의 공’을 삭제하는 법 개정을 했고, 지난해 항소심에서 이씨는 패소했습니다.

 민영휘·이정로·고홍겸 자손 등이 저의 존재가 위헌이라며 제기한 헌법소원 사건에서 헌법재판소는 2013년 “친일 재산은 일제 투쟁과 극복으로 탄생한 우리 헌법의 법통, 정신을 고려할 때 헌법상 재산권 조항으로 보호할 수 없다”며 재판관 7대 2로 합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후 소송에서 정부는 대부분 승소했고요.

 10년간 아쉬움도 많았어요. 광복 이후 세월이 흘러 자료가 사라졌고 ‘을사오적’ ‘정미칠적(丁未七賊·1907년 한·일 신협약 조인에 찬성한 송병준 등 내각 대신 7명) 등의 대표적 친일파들은 제3자에게 땅을 처분해 환수 재산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완용은 1925년 당시 재산이 300만원(현재 시가로 600억원)에 달했어요. 보유한 땅은 1572만9167㎡로 조사위의 전체 국고 귀속 면적보다 넓었습니다. 그러나 후손들에게 상속된 재산은 거의 없어 6961만원밖에 환수하지 못했습니다. 일제가 토지조사를 한 1913~19년 일본인 4명에게 땅을 팔아 현금화했기 때문이었죠. 사정이 이렇다 보니 조사위 스스로도 “과거사를 청산했다는 상징적 의미만 있는 미완의 청산”이라고 자평했던 거죠.

 제3자에게 처분한 재산도 국고로 환수할 수 없었어요. 특별법 발효 이후인 2008년 친일파에게 땅을 사들인 제3자 박모(57)씨가 낸 소송의 1심에서 조사위는 “국고 반환은 불가”라는 판결문을 받아들였습니다. 조사위는 대법원에 비약 상고를 했지만 그해 11월 대법원에서 패소했습니다. “제3자가 정당한 대가를 주고 산 땅은 환수하지 못한다”는 이유였죠. 친일파 후손과의 법정 분쟁에서 정부는 행정소송 3건 패소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승소했습니다. 친일 재산 환수의 역사는 이해승 후손이 제기한 두 건의 소송을 마지막으로 조만간 끝이 납니다. 다시는 이런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기도할 따름입니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이 기사는 오영신 법무부 국가송무과장, 친일재산조사위 전 상임위원 장완익 변호사, 정숭교 전 조사총괄과장, 김도훈 전 조사과장, 우대형 전 연구원, 손영실 변호사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목록  
총 방문자수 : 5,700,314 명
오늘 방문자수 : 7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