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지적 100년 자료실

 

제목 : 토지 양전관 정극인…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1-07-11 조회수 : 913


[호남] [이종범 교수의 호남인물열전] [8] 정극인… 백성과 섞여살며 '사회운동' 빛 밝혀



입력 : 2011.07.10 22:49







태인고현동향약(泰仁古縣洞鄕約,보물 1181호)을 보관하는 동각(洞閣)옆에 단종비 정순왕후 탄생지를 알리는 정순왕후여산송씨탄생지비(정읍시 칠보면 시산리)가 1988년 세워졌다.



"홍진(紅塵)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 어떠한고. 옛사람 풍류에 미칠까, 못 미칠까.…단표누항(簞瓢陋巷)에 허튼 생각 아니 하니, 아무튼 백 년 행락(行樂)이 이만하면 어떠한가."



'상춘곡(賞春曲)'의 처음과 끝이다. 훈민정음 창제 1세대만의 최초 한글 가사다.



지은이 정극인(丁克仁·1401∼1481)은 한강 두모포에서 생장하였다. 여말선초 낮은 벼슬을 지낸 조부와 부친이 묻힌 서울 성동구 옥수동이다. 그리고 전남 영광으로 옮겼다. 선조가 향리를 지낸 관향(貫鄕)이었다. 중년 이후에 태인현 고현면에 정착하였는데 처가가 있었다. 전북 정읍시 칠보면으로, 이웃마을에서 단종비 정순왕후(1440~1521)가 태어났다.



대과는 늦었다. 세종 11년(29살)에 생원이 되고서 단종 원년(53살)에 문과를 들었던 것이다. 벼슬도 짧았다. 문종 원년 경학과 행실의 선비로 천거되어 5년가량 머물다 물러났다. 그리고 10년 후, 65살에 다시 나섰다가 70살에 마감하였다.



관직 또한 낮고 볼품없었다. 녹봉을 관리하는 광흥창 주부(종6품)로 시작하여 끝자락에 사간원 정언(정6품)을 지냈을 뿐이다. 토지를 측량하는 양전관(量田官)과 향교 교관을 세 차례씩 맡았다. 문과출신자라면 결코 달가울 수 없는 직책이었다.



그는 권세의 저편에서 뜨이지 않고 살았다. 밭 갈고 나무하는 사람과도 섞였다. 그래도 각오는 대단하였다.



"얻기 전에 얻을 것을 근심하지 않고, 얻은 후에 잃을 것을 걱정하지 않으리라."



당호가 불우헌(不憂軒)인 까닭이다. 그러면서 학령을 갖추고 시골 자제를 열심히 가르쳤다. 또한 향약을 세웠다. 덕업을 권장하고 과실은 규제하며 예절로 사교하며 환난을 구휼하자는 '서로'의 약속이었다. 반목과 거짓은 금물, "신명이 벌하리라! 그 죄는 마땅히 내쫓아서 굴복시켜야 하나니!" 도덕문명의 동아리 맺기, 향촌사회책임운동이었다.



어느덧 임금에게 알려졌고 정3품 당상관도 받았다. 훈구계 관료는 심드렁하였다. "융통성 없이 자기 분수를 지키며 뜻이 강개할 따름이다."



그러나 비(非)훈구계 신예들과 절친하고 성리학에 조예 깊던 종친 이심원(李深源)은 달랐다. 혹여 왕실의 교육기관인 종학(宗學)에 봉직할 때 감화를 끼쳤는지 모르겠다. "태인의 정극인, 함양의 정여창(鄭汝昌), 은진의 강응정(姜應貞)은 성현의 동아리다." 그러면서 훈구공신의 퇴진을 주장하였다.



이레 후, 성균관 유생 남효온(南孝溫)은 '보통사람' 현덕왕후의 복위를 들고 나왔다. 국가적 금기를 들춘 것이다. 철벽같은 공신기득권에 대한 도전의 시작! 성종 9년(1478) 4월이었다.



이렇듯 정극인은 구름을 뚫고 땅을 덮을 권세와 재물로도 얻지 못할 실로 소중한 '성현의 동아리'라는 영예를 얻었다. 새 정치를 꿈꾸던 사림파가 존재감을 드러내던 참이었다. '상춘곡'은 이때의 감회를 담은 작품이다. 이즈음의 '불우헌가'와 '불우헌곡' 또한 잔잔한 명품이다.



그러나 한편의 응어리마저 정녕 씻겼을까? "열심히 학문하고 총명을 계발하라. 공경장상이 어찌 종자가 있겠는가!" 자손을 훈계한 글에 있다.





목록  
총 방문자수 : 5,700,314 명
오늘 방문자수 : 6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