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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친일재산국가귀속법'이 친일파 구했다?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0-11-15 조회수 : 1669


 























[주장] '이해승 토지 소송' 계기로 친일행위 제대로 단죄할 법 제정해야













10.11.15 20:54 ㅣ최종 업데이트 10.11.15 20:56

고상만 (rights11)
























 








 


나는 지난 2006년 9월부터 올해 7월 12일까지 '대통령소속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이하 '친일 재산조사위')에서 조사1과 소속 조사관으로 근무했다. 그리고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친일 재산을 국가귀속하는 실무업무를 담당한 조사관으로서 내내 우려했던 일이 끝내 현실로 드러났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 오마이뉴스 권우성









대법원






 



대법원(주심 민일영 대법관)은 친일 재산조사위가 지난 2007년 11월 '친일 재산'으로 국가귀속한 친일 반민족행위자 이해승의 토지(공시지가 300억 원대)에 대해 이씨의 손자 A씨(71)가 토지를 후손에게 돌려주라고 낸 '친일재산 국가귀속결정 취소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5일 밝혔다.



 



결국 친일파 이해승의 손자는 그 할아버지 명의의 막대한 토지를 다시 '온전하게' 돌려 받게 되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는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법률'(이하 '국가귀속 법률')이 제정될 때부터 '예견된 불행'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법에 의거, 활동해 온 친일 재산조사위는 그동안 최선을 다해 일해 왔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실무 업무를 담당하면서 이 법에 대한 적지않은 논란이 위원회 내에서 제기되어 왔다. 논란의 핵심은 바로 이 법에 명시된 '친일 행위의 대가성' 여부였다. 즉, 친일파가 친일 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에 대해서만 국가귀속을 할 수 있도록 명시된 법 규정상 이해승의 대상 재산은 친일 재산이 아니라는 것이다.



 



친일파가 친일 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에 대해서만 국가귀속하도록 규정한 이 애매한 법 해석이 결국 '명백한 친일파'인 이해승의 재산을 국가 귀속하지 못하도록 한 점이 너무나 애석하다.



 



논란의 중심, 친일 반민족행위자 이해승은 누구인가?



 



 



이해승은 189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한제국의 고종과는 가까운 인척 관계였으며 1902년 철종의 능인 예릉 참봉에 임명된 후 가선대부를 거쳐 정2품 자헌대부에 올랐다. 그리고 1910년 10월 16일, 약관 21세의 나이에 그는 '조선 귀족령'에 따라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고, 다음 해 이에 따른 은사공채 16만8천 원을 받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어 그는 "한일관계에 종적이 있다"는 이유로 일본으로부터 한국 병합기념장을 받기도 했으며, 또한 태평양 전쟁 기간 중에는 국방 헌금을 내는 등 일제의 식민지배 통치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왔다. 그리고 이해승은 이같은 친일행적으로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10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너무나 많고 구구절절한 이해승의 친일 죄상에도 그는 이같은 반민족 행위에 대해 제대로된 단죄는 받지 않았다. 물론 그 역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의 체포는 피하지 못했다. 1949년 2월, 어느 직책 이상을 맡은 친일 행위자에 대해 범죄자로 보는 '당연범' 규정에 의거, 그 역시 반민특위 경기도 사무분국에서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 7월, 그가 특별 검찰부로 송치된 이후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강제 해체되었고 이후 그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결과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것이 60여 년 전, 그가 민족을 배반한 행위에 대한 '그나마의' 단죄였다.



 



이해승의 기사회생 2번, 이것이 민족정기의 현실?



 



































  

일제 시절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들의 행적을 담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열린 지난해 11월 8일 오후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시민들이 '친일인명사전'을 살펴보고 있다.

ⓒ 유성호









친일인명사전






 



그런데 친일 반민족행위자 이해승의 '행운'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2010년 5월 28일, 이해승의 손자가 친일 재산조사위를 상대로 제기한 국가귀속결정 처분취소 소송에 대해 서울고법 행정 9부(부장판사 박병대)가 1심 판결을 깨고 후손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당시 재판부는 "한일합병 당시 왕실의 종친들은 일부 직명 환수조치를 당한 종친을 제외하고는 모두 작위를 수여 받았다"며 "작위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귀속결정 처분을 내린 것은 위법하다"면서 1심 판결 내용을 뒤집었다. 그리고 2010년 11월 15일, 이같은 고법 판결 내용을 대법원이 확정 선고했다고 밝히면서 친일파 이해승의 재산은 다시 그 손자에게 돌아간 것이다.



 



이해승의 운이 억세게 좋은 것인지, 아니면 이 나라에서 민족정기를 주장하는 이들이 어리석은 것인지 비통함을 넘어 참담한 심정이다.



 



법원은 이해승이 후작 작위를 받은 것은 한일합병의 공으로 수작한 것이 아니기에 그가 일제시대 취득한 대상재산 역시 '친일행위의 대가성'이 없음므로 후손에게 돌려주라고 했다. 법률이 가진 허점이 그대로 친일파 후손의 이익으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법 허점 이전에 분명하게 살펴봐야 할 지점이 있었다. 이해승의 친일 행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분명하게 살펴봤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는 것이다.



 



먼저 이해승의 후손이 주장한 내용은 이랬다. 이해승은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수작할 당시 21세로서 친일행위를 한 사실이 없다고 했다. 공적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황실의 종친'이라서 받은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이 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이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서 이해승의 행적만 살펴봐도 후손의 주장은 어색해진다. 이해승이 후작 작위를 수작한 직후의 행적이다. 1910년 그는 작위 수작 직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조선 귀족 일본관광단'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이 방문은 단순한 말 그대로의 관광단이 아니었다. 조선총독부가 비용 전액을 후원한 이 관광단의 목적은 일본 천황에게 작위를 수작해 준 것에 대한 사은의 뜻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연회에 초대받아 천황을 '알현'했고 그 자리에서 직접 천황에게 작위를 준데 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어 그는 1911년 1월, 일본으로부터 작위 수작에 따른 은사공채 16만8000원을 받았다. 이 액수는 지금으로 환산하면 무려 67억 원에 이르는 막대한 액수였다. 이해승은 이후 조선총독부 주도로 이뤄지는 각종 식민 지배 사업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한 각종 친일 사업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단체에 적지않은 기부금을 내기도 했다. 일일이 다 언급하기 어려울 만큼 그의 친일 행적은 화려했다.



 



그중 특이한 몇가지만 굳이 언급한다면 1942년 1월 자신이 회장으로 있던 조선귀족회 임시 총회에서 일본 육군과 해군에 각각 1만 원씩의 국방 헌금을 결의한 당시의 일이다. 그는 당시 조선총독부 총독이던 미나미 지로를 방문하여 "대동아 전쟁의 선전에 매우 감격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미세하나마 우리 귀족의 총의로 헌금합니다"라고 전하면서 당시 돈으로 2만 원을 헌납했다. 현재의 기준으로보면 수억 원이 넘는 거액이다.



 



이어 같은 해 5월 30일, 총독 미나미가 이임하자 그는 매일 신보에 조선귀족회 회장 명의로 '내선 일체에 큰 공적'이라는 제목으로 담화를 발표, "남 총독께서 사임했다니 다만 놀랄 뿐이다. 남 총독은 작임 이래 내선일체의 실현을 시정의 큰 받침으로 하여 침식을 잊고 조선 통치에 다한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인데, 특히 지원병 제도와 징병 제도는 글자 그대로 남 총독이 조선동포로 하여금 충성한 황국신민이 되어 대동아 공영권의 지도자가 되게 하자는 어버이의 마음으로 나온 선정으로서 감사 감격하여 마지 않는 바이다"는 등의 참담한 내용을 게재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해승이 후작 작위를 수작한 1910년 이래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보여준 행적은 말 그대로 몸과 마음으로 일본에 충성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친일파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면서 심지어 독립운동 자금을 댔다는 주장까지 내놓으면서 끝까지 저항했던, 그리고 끝내 승소하여 친일파 할아버지의 재산을 되찾아가는 그 후손을 생각하면 말 그대로 억장이 무너질 일이 아닐 수 없다.



 



친일파 박필병의 토지 153필지를 후손에게 돌려준 이유



 



































  

일제 시절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들의 행적을 담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지난해 11월 8일 오후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열렸다. 시민들이 '친일인명사전'의 한 부분을 읽고 있다.

ⓒ 유성호









친일인명사전






 



법원의 판단은 사실 법률 안에서만 해석해야 한다는 점에서 크게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결국 문제는 친일 행위 대가로 취득한 재산에 대해서만 국가 귀속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이 '국가귀속 법률'의 한계를 지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적한 것처럼 이해승은 '단지' 귀족이라서 할 수 없이 받은 것이 아니라 받은 직후부터 그에 대한 답례로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천황에게 감사의 뜻을 밝히는 등 아주 적극적으로, 그리고 이후 일제 강점 기간 내내 앞장서서 식민 지배에 협조했다는 점은 무시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이해승 판결과 같은 사례가 처음은 아니다. 더구나 이 친일 대가성 논란 때문에 법원으로 가게되면 패소할 것이 분명하여 어쩔수 없이 위원회가 포기한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경기 안성의 친일 반민족행위자 박필병이었다. 그는 안성 출신으로서 대단한 부자였다. 안성에서 그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을 정도의 대단한 지주였다. 그렇다면 그가 일제강점 기간에 이처럼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1884년에 안성에서 태어난 그는 1920년대부터 면 협의회원을 시작으로 1927년 경기도 도회 의원을 지내는 등 지역 유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후 그는 1928년 일본 쇼와 천황의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으며, 1934년 경기도 평택세무서 소득 조사위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어 그는 1937년 안성경찰서에 고사 기관총 구입비를 헌납했으며 39년 11월에는 전시 체제 강화와 유도 신민화를 위해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조선 유도연합회의 평의원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1941년, 마침내 그는 조선 총독부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오늘날 국회의원에 해당)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조선 임전 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그의 친일 행적은 분명하고 뚜렷했다. 박필병의 마지막 친일 행적은 1944년 5월 일제의 강제 징집제 실시를 선전하기 위한 각종 강연회와 좌담회를 개최한 일이었다. 그는 이 공로로 육군대신이 주는 기념품 등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같은 그의 친일 행적으로 그 역시 이해승과 마찬가지로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10년 발간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모두 포함되었다.



 



한편, 2006년 출범한 친일 재산조사위 역시 친일파 박필병에 주목했다. 그의 명의로 현재까지 남아있던 재산에 대해 당연히 추적했다. 예상보다 그의 재산은 상당했다. 여전히 안성지역에 150필지가 넘는 토지가 그의 명의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위원회는 그의 친일 행적으로 보나 대상재산이 일제시대 취득한 재산이라는 점에서 국가귀속 업무상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조사개시 결정을 통해 가압류했던 이들 재산은 끝내 국가귀속에 이르지 못했다. 오히려 친일 재산조사위가 너무 열심히 일한 나머지 박필병의 후손조차 몰랐던 친일파 조상의 땅까지 찾아내 결국 그 후손에게 돌려줘 버리는 황당한 일까지 겪여야했다. 왜 이같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을까.



 



마찬가지로 이 법이 규정한 친일 행위의 '대가성'이 문제가 되었다. '국가귀속 법률'로 살펴볼 때 박필병의 재산이 국가귀속되는 시점은 그가 중추원 참의로 임명된 1941년 이후였다. 그가 한 이전의 친일 행위는 이 법의 기준으로는 국가귀속 대상이 되지 못했다. 우습게도 그 정도는 그저 '생계형 친일 수준의 행위'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국회 입법 과정에서 당시 입법을 반대한 일부 한나라당 의원과의 정치적 충돌을 피하고자 조율하는 과정에서 칼끝이 너무 지나치게 무뎌진 결과였다.



 



그런데 박필병이 중추원 참의로 임명된 1941년 이후의 잣대로 국가귀속을 하려고 하니 어처구니 없게도 그의 명의로된 150여 필지가 넘는 토지 중 국가귀속할 수 있는 토지는 단 한 필지도 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대상 토지가 모두 1937년에 취득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즉, 박필병이 중추원 참의가 된 41년 이전에 취득한 재산이라서 37년 취득한 이들 재산을 친일 재산으로 볼 수 없다는 황당한 결론이 나온 것이다.



 



이 기막힌 문제점을 알게된 후 조사관들이 느낀 감정은 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허탈했다. 이 법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민족을 배반한 친일 행위, 결코 용납되어선 안 된다



 



박필병의 경우는 다시 생각해봐도 어처구니없는 결과였다. 그저 상식적으로 살펴봐도 이는 매우 이해할 수 없다. 1941년 박필병이 중추원 참의로 임명 받았다면 그는 과연 어떤 역할을 했을까. 정말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일제가 그에게 중추원 참의로 임명하였을까.



 



이미 앞서 지적한 것처럼 그는 일제 강점기 초기부터 일제가 식민 통치를 용이하게 운영하기 위해 만든 여러 기관과 의회에서 선출직 의원으로, 또는 임명직 간부로서 사회적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경찰서에 고사 기관총을 구입하는데 적지않은 액수를 기부하는 등의 여러 공적으로 마침내 1941년 중추원 참의에 임명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같은 과정이 무시된 채 특정 직책의 임명 시점을 기준으로 친일재산을 규정하도록 만든 이 법률은 너무나 어의없는, 부실한, 황당한 입법 행위라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처럼 엉성한 입법으로 인해 또다시 친일파 이해승과 박필병의 재산권이 보호되고 그 후손에게 돌아가는 결과가 되고 말았으니 이는 너무나 민망한 역사로 기록될 것이라고 단언하지 않을 수 없다.



 



이해승의 재산을 귀속하기 위해 지난 2007년 11월, 조사 1과 직원들은 며칠씩 집에도 가지 못한 채 철야로 조사개시 결정 업무를 했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무려 300억 원대에 달하는 이 막대한 재산이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는 상징적 의미가 될 것이라고 믿었고 그 재원을 토대로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될 것이라 생각하니 피로감도 덜하는 듯 싶었다. 그렇기에 혹여 이후에라도 우리의 작은 실수가 국가귀속의 변수가 될까 싶어 철자 하나라도 오타가 날까 몇 번을 돌아가며 감수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후 예상한 것처럼 이해승의 후손이 행정심판을 제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 초조해 하던 중 1심 판결은 국가귀속이 정당하다는 판결이었다. 다행스러웠다. 당시 1심 재판부는 "이해승이 한일합병의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것으로 보이므로 재산을 환수하는게 맞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결국 최종적으로 대법원이 이와 다른 판단을 내리게 되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고 슬프다.



 



일제시대 친일파가 취득한 재산은 모두 국가귀속해야...



 



이런 주장은 어떨까. 나는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이들을 제대로 단죄하기 위해서 기존의 '국가귀속 법률'을 보완한 새로운 법률의 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이들이 일제 강점 기간인 1910년부터 1945년 사이 취득한 모든 재산은 친일재산으로 규정, 모두 국가귀속하는 입법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지나친 것일까.



 



하지만 이처럼 법률을 제정한다고 할지라도 엄밀하게 따지면 친일파의 후손이 손해볼 이유도, 소위 연좌제 피해도 전혀 없다. 친일파로 규정된 그의 조상이 일제 강점 기간동안 취득한 재산이 오늘 이 시점까지 다른 제3자의 명의로 이전되지 않은 채 그대로 후손에게 상속된 재산에 대해서만 국가귀속할 뿐, 그 후손이나 다른 이가 취득한 재산에 대해서는 국가귀속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적어도 민족을 배반한 행위에 대해서 만큼은 일대 일의 대응 처벌이 옳다고 여기지 않는다. 민족을 배반한 행위는 그보다 더 크고 가혹해야 역사적 정의에 부합하지 않을까. 더구나 민족을 배반한 범죄행위로 얻은 수익만 내놓으라고 한다면 이는 고난 속에서 목숨을 내놓고 독립운동을 해온 이들과 비교해도 너무나 빈약한 대가일 뿐이다. 나는 오늘날 이같은 법의 허점이 훗날, 또다시 우리 민족이 어려운 시기를 맞게될 경우 민족을 배반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안이한 판단을 하는 기준이 되지 않을까 염려스러울 뿐이다.



 



끝으로 이번 판결을 보며 그동안 낙관적으로 생각했던 우려가 다시 고개를 든다. 그나마 부실한 현재의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법률'에 대해서조차 마땅치 않아 하는 친일파 후손이 제기한 위헌 소송이 이 시간에도 헌법재판소에서 심리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해승의 이번 판결 결과로 오판한 친일파 후손들의 줄 소송이 예상되는 가운데 2010년 대한민국의 역사는 흐르고 있다. 여전히 친일파의 후손은 득세하고 있고 민족의 정기는 교과서 위 표현으로만 머물러 있음을 통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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