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지적 100년 자료실

 

제목 : 토지가 國有와 民有로 구분되다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0-05-01 조회수 : 1044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173) 토지가 國有와 民有로 구분되다

















헤이그 밀사사건(1907년)에 황실의 지원이 있었음이 드러나자 통감부는 고종을 폐위시키고 그해 11월 황실재산 대부분을 국유화한다. 이로부터 궁장토(宮庄土)와 역토(驛土)·둔토(屯土)는 탁지부가 관리하게 된다. 역둔토(궁장토·역토·둔토의 통칭)는 공토(公土)이지만 내장원에 이속되어 황실의 사유물로 있다가 10년 만에 원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황성신문은 그동안의 폐단을 이렇게 지적한다.



"옛사람의 말에 재물은 기름때 같아서 가까이하면 더러워진다는데 큰 기름때가 있으니 전날에 세력자의 협잡과 탐욕이 가득하던 궁장토와 역둔토가 그것이로다. 내장원 관리와 허다한 사람이 호의호식하며 큰 집에서 밤낮으로 행락을 즐기던 돈이 다 거기서 나오니, 이를 이용하여 군주의 은총을 요구하며 국가의 권위를 농단하는 자도 있고, 권력에 아부하여 돈과 곡식의 증감을 조종하며 뇌물 받고 부귀옹이 된 자도 많은지라. 그것은 인민의 전토를 횡탈하고 국가에 들어갈 돈과 곡식을 중간에서 먹어 자기 주머니를 살찌운 까닭이니, 그 쌓인 폐단이 원망의 대상이었다."(1907.11.28.)





역둔토에 대해 1909년 6월부터 실지조사가 있었다〈왼쪽 사진〉(실지조사 모습). 역둔토 관리대장을 만들고 소작계약 체결을 통해 재정수입을 확보하고 역둔토를 동척(東拓)과 일본인 이민자에게 불하하기 위해서였다. 탁지부는 재무감독국 주사를 대폭 증원하고 조사원과 측량원으로 구성된 조사반 60개를 편성하였다. 그러나 조사는 역둔토를 민유지라고 주장하는 인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의주에서는 민유지인 군역토(軍役土)를 측량하려 하자 500여명이 모여 항의하였다. 서산과 홍천에서도 민유지가 국유지로 조사되자 인민들이 감독국에 호소하였으며, 해주에서는 인민 수백명이 소에 돌을 싣고 와서 불온한 상황을 보이자 실지조사를 중단하였다가 헌병과 경찰관을 대동한 후 다시 시행하였다.



이러한 저항이 있게 된 것은 역둔토 중에 민유지로서 결세(結稅)에 상당하는 세만 내는 토지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 궁장토와 역토·둔토를 지정할 때 궁방이나 국가기관에 의해 사실상의 민유지가 그 속에 강제 편입되었던 것이다. 이를 제2종유토라 한다. 민간의 소유권 의식이 매우 진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이 생긴 것은 전국의 토지를 왕토로 보는 관념 때문이었다. 조선왕조는 마지막 토지조사인 광무양전(1898~1904)에서도 토지소유자를 한시적 주인이라는 뜻의 시주(時主)로 규정함으로써 절대적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광무2년(1898)에 이용익〈오른쪽 사진〉씨가 내장원경으로 있어 황실의 부족을 보충한다 하고 하등의 보상 없이 민유지를 몰수한 것이 많으니, 호소할 곳 없는 고로 지금까지 묵묵히 있다가 지금에 이르러 민토로 복귀시켜 달라고 청원하는 자가 많은데, 10여년 동안 어떤 장애도 없이 수조(受租)하던 것이지만 그 기원을 미루어보아 증거가 명확한 것에 대해서는 환급함이 가한 바라."(황성신문 1909.8.17.)



역둔토 국유화와 민유지 환급을 통해 전국의 토지는 국유와 민유로 확실하게 구분되었고, 비로소 소유상의 혼란이 없는 근대적 소유권 개념이 탄생하였다.





  • 박기주 성신여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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