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영토 답사기

 

제목 : 옛 선조의 숨결을 찾아서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09-04-22 조회수 : 1479
<고구려연구회에서 작성한 우리 땅 북방영토에 대한 지역별 소개 자료입니다. 월천답 조병현 > ◈ 심양 중국 동북3성(길림성,요녕성,흑룡강성)의 최대도시. 심양은 요녕성의 성도(省都)이면서 중국 동북지방의 최대도시이다. 1625년 누루하치가 세운 금나라부터 만주제국에 이어 청왕조가 북경으로 천도하기전까지 수도로서 번성하였으며, 북경으로 수도가 이전된 후에도 중국의 두번째 수도로서 동북 무역의 중심지로서 중요성을 인정받은 곳이다. 심양이라는 이름은 원대에 지리적으로 심수(沈水)의 양(陽 / 풍수사상에 의하면 물의 북쪽을 陽,남쪽을 陰이라 칭한다)에 위치한다고 하여 심양로(沈陽路)라 불리기 시작하였고 1625년 청태조가 도성을 요양(遼陽)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 1634년 청 태종이 심양을 성경(盛京)이라 개명하였다. 이후 1644년 수도를 다시 북경으로 옮기면서 배도(陪都)라 개명하였고 청조가 중국을 완전히 통일한 후에는 이곳에 봉천부(奉天府)를 설치하였다. 심양이라는 이름은 1945년에야 다시 찾게 되었다.금나라를 시작으로 만주제국에서 청대까지가 부흥시기였기에 이곳에 가면 만주시대의 유적들이 잘 보존되어있으며, 심양 고궁, 청대황제의 릉(복릉, 북릉 등) , "九一八"사변기념관, 장씨솔부 등 다양한 관광지들이 분포되어 있다. ◈ 동관교회, 문광서원 1889년 존 로스목사님에 의해 세워진 교회다. 1919년 이화단 사건으로 일부 건물이 파괴 되었으며 문화혁명이 끝난 1979년 이후에 복원됐다. 로스는 이 교회에 신학교를 세우고 10명의 신학생에게 목사안수를 주는 등 선교사로서의 업무를 계속 수행하다가 1910년 70세를 맞아 고국으로 돌아갔다. 5년뒤 로스는 고향에서 소천했다. 현재 교인은 3만명의 교인들이 매주 주일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예배를 드리고 있다. 존 로스목사님은 이곳에서 한글성경번역과 출판을 하였으며 조선선교의 센터로 사용 하신 곳이다. ◈고구려의 다물도 주몽이 22살의 나이로 졸본에서 나라를 세우고 맨 먼저 합병한 이웃나라가 바로 비류국이다.삼국사기에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활솜씨 겨루기로 결판을 내, 비류국의 송양왕이 깨끗이 항복하자, 주몽은 비류국을 고구려의 한 행정구역인 "다물도"로 편입시키고 송양을 도주로 삼았다. 다물"이란 고구려 말로 "되돌린 땅"이란 뜻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흔히 "고토회복","고토회복"을 부르짖을 때 많이 쓰이는 말이다. ◈고구려의 피라미드,12000여개 무덤떼 중국 집안의 고구려 유적 가운데서 가장 경이로운 것은 1,2000여 기가 넘는 무덤떼이다. 고구려 후기의 수도인 평양 근방에도 1,000기밖에 없는데 그 보다 10배가 훨씬 넘는 무덤들이 한 곳에 몰려 있다는 것은 전세계에서도 유래가 없는 일이다.  집안시 안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무덤떼는 모두 32개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1962년 봄 집안시 전체의 문화유물을 전면적으로 조사할 때 파악한 숫자에 따르면 모두 12,358기나 된다고 한다. 일본의 한 학자가 "고구려인들은 땅의 절반은 주거지로 절반은 무덤으로 사용하였다"고 했는데 실감나는 이야기다.   고구려 무덤떼중 주요한 무덤들을 보면, 장군총은 한 변의 길이가 30m가 넘고, 태왕능은 66m이며, 가장 큰 천추묘는 85*80m나 된다. 천추묘는 묘자리만 2,057평이나 되는 거대한 피라미드이다. 이집트 피라미드도 증축하기 전 처음에는 한  변이 63m였으니 이러한 거대한 묘들은 고구려의 피라미드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고구려 무덤떼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실질적 가치는 23기의 무덤에 나타난 벽화이다. 벽화는 주제가 풍부하고 대채로워 인간세상의 갖가지 생활상과 사후의 하늘세계까지 자유자재로 표현하고 있으며, 기술적 수준이 대단히 높아 고구려인의 창조력과 예술적 감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걸작이다. 한편 이 벽화는 고구려의 정신문화와 물질문화를 읽어낼 수 있는 생생한 자료일 뿐 아니라 당시 동북아세아의 상관관계를 읽을 수 있는 영상자료라는 점에서도 학자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동방의금자탑 장수왕능 12,000여 기나 되는 집안의 고구려 무덤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장군총(장수왕능)이다. 장군총은 국내성에서 4.5km 떨어진 용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교적 높은 곳에 있어 압록강과 집안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장군총을 바라보면 우선 엄청나게 큰 규모에 압도 된다. 물론 가장 큰 천추총이나 태왕능에 비하면 3분의 1이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그 빼어난 건축술과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있는 웅대한 모습을 보노라면 중국 학자들이 '동방의 금자탑'이라고 했다는 말이 실감난다. ◈ 수수께끼의 버팀돌과 딸린무덤 무덤 사방에서 굉장히 큰 돌을 3개씩 기대어 세워놓았는데 부쪽 맨 왼쪽 하나가 깨져 지금은 11개만서 있다. 11개 가운데서 가장 작은 것이라도 15톤이나 된다.이런 세운돌들은 '밑 기단 돌이 밀려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하지만 전문건축가는 그 정도의 무게로는 무너지는 것을 막는 버팀돌 노릇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한 면에 3개식 12개를 세워 12지처럼 보호신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장군총 위에서 동북쪽을 보면 마치 고인돌 비슷한 돌더미가 보이는데 이것이 딸린무덤이란 것이다.  원래 장군총 에는 5기의 딸린무덤이 있었는데 지금은 1기밖에 남지 않았다. 장군총과는 모양도 판이하게 다르고 크기도 대단히 작다. 남은 한 기의 딸린무덤도 일찍이 도굴당하고 파괴되어 지금은 밑부분 3계단만 남아 있다. 밑변 길이 9.2m, 계단 높이 1.9m이다. 이러한 딸린무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에도 3개가 있다고 한다. 딸린 무덤은 왕의 첩들이라는 설이 있으나 아직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아 수수께끼인채 남아 있다. ◈장군총은 누구의 무덤인가? 장군총은 건축규모나 딸린무덤의 수를 볼 때 고구려 때의 왕능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부장품이 모두 도난 당해 누구의 무덤인지 분명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일찍이 일본 학자들이 장군총은 광개토대왕의 묘라는 설을 내 놓았다. 그러나 중국 현지 학자들은 장수왕의 묘라고 주장한다. "장수왕은 수도를 집안에서 평양으로 옮긴 장본인이고, 또 평양에서 세상을 떴는데 어떻게 이곳까지 와서 묻히게 되었는가?" 라는 나의 질문에 중국 현지의 학자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고구려 왕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무덤을 준비해간다. 그렇기 때문에 장수왕도 수도를 옮기기 전에 이미 국내성에 무덤을 준비해 놓았고, 관례에 따라 시신을 옮겨 이곳에 장사 지냈던 것이다."   장군총을 비롯한 고구려의 유적을 보노라면 '과연 고구려는 대단했다'  '고구려는 스케일이 크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고구려 초기의 벽화, 춤무덤 광개토태왕비에서 통(화)집(안)공로 쪽으로 가다 과수(果樹)라는 마을에서 왼쪽으로 꺾어 지면 국내성으로 가는 시골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얼마 안 가 오른쪽에 춤무덤(舞踊塚) 과 씨름무덤(角塚)이 나온다. 두 무덤은 과일밭 사이에 위아래로 나란히 붙어 있는데 위쪽이 춤무덤 아래쪽이 씨름무덤이다. <춤무덤 널방에 들어서 전등불을 비치자 1500년 동안 감추어졌던 고구려의 영상이 재현되기 시 작하였다. 3평 남직한 작은 방이지만 그 안에 하늘과 땅이 다 들어가 있었다. 어떻게 1500년 이상 지난 그림이 마치 얼마 전에 그린 그림처럼 선명한 색채를 그대로 간직할 수 있을까? 뛰어난 미 적 감각으로 화려하게 그려낸 솜씨에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작은 공간에 생전의 생활은 물론 죽 은 뒤의 하늘나라의 생활까지 한꺼번에 표현할 수 있는 화가라면 단순한 기능공으로서의 화가가 아니라 당시 사회의 생사관을 분명히 나타낼 수 있는 안목과 사고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생생한 고구려의 생활도 벽화의 내용은 크게 벽면과 천장으로 나눌 수 있는데, 벽면은 무덤의 주인이 생전에 생활했던 삶을 표현한 생활도이고, 천장부는 죽은 뒤 하늘나라를 그린 것이다. 문을 들어서면 바로 바라다 보이는 안벽(북동쪽) 주인공이 손님을 맞이하는 그림이 나온다. 두 부인을 거느린 주인공이 백라관을 쓴 채 두 팔을 모으고 않아 있고, 그 앞에 작게 그린 시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음식을 올리고 있다. 음식이 올려있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스님인 듯한 손님과 마주하고 있다. 맨 아래는 머리만 보이는 8명의 시녀가 늘어서 있어 주인공의 신분이 높다는 것 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이 있는 안벽에서 볼 때 오른쪽 벽(북서쪽)에 그 유명한 사냥도(狩獵圖)가 그려져 있다. 속도감과 긴장감이 가득한 사냥터 맨 위쪽에는 백마를 타고 달리며 윗몸만 뒤로 틀어 돌린 채 암수 두 마리의 사슴을 향해 화살을 쏘는 힘찬 무사가 그려져 있고, 중앙에는 검은 말을 타고 달 아나는 호랑이를 향해 시위를 당겨 막 쏘려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사냥그림에서도 보면 가장 멀리 있는 무사가 가장 크고, 가장 가까운 대상을 가장 작게 그 려 원근의 비례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중심 되는 인물을 크게 부각시키는 파격적인 세부표현방식 이 눈길을 끈다. 이 사냥그림은 표현이 예스럽고 서툴러 보이지만 시원스런 공간배치와 생동감 있는 필치 때문에 고구려 고분벽화 초기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주인공이 있는 안벽에서 왼쪽(동남쪽)에는 춤추는 그림(무용도)이 그려져 있다. 이 춤추는 그림 때문에 이 무덤의 이름이 춤무덤(무용총)이 되었으니 이 그림이 이 무덤 벽화를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춤추는 그림은 우측 하단에 옷모양이 각기 다른 가수 7명이 부르는 노래에 따라 상단에 5명의 무용수가 맨손으로 추는 사위춤을 추고 있는데 무용단을 이끄는 선두무용수가 무용 단을 바라보며 함께 춤을 추고 있다. 화폭 좌단에는 위아래 두 채의 집이 있고 세 여인이 음식을 들고 나온다. 아랫집 우측에는 말 을 타고 집을 나서는 주인과 화살을 든 시종이 뒤따르는데 개가 한 마리 앞서 있어 눈길을 끈다. 무덤의 주인이 손님을 접대하는 그림 오른쪽에 상무적인 사냥도를 그리고 왼쪽에는 문화생활의 멋을 즐기는 노래와 춤을 그린 것은 문무를 겸비한 당시 귀족의 생활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장에 펼쳐진 하늘나라의 파노라마 천장구조는 모두 8단으로 쌓아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지도록 한 평행팔각고임식이다. 평행고임 제1단에 세모꼴의 불꽃무늬(火焰文) 16개를 그려 이승과 하늘나라를 구별하고, 이어서 제2단에 하늘로 떠오르는 연꽃과 연꽃봉우리를 번갈아 그려 하늘나라에서 연꽃을 통해 화생한다 는 불교식 화생법을 떠오르게 한다. 평행고임 제3단에는 각종 상서로운 동물과 신선(仙人)을 그렸다. 동남면에는 혀를 길게 내밀고 오른쪽을 향하여 달려가는 백호와 거문고를 타는 두 인물을 그렸으며, 서남면에는 한 가운데 수 탉 한 쌍이 마주 보며 서 있다. 북면은 청룡과 나무, 평상에 앉은 인물들을 묘사했고, 동북면은 역 사 두 사람이 태껸 류의 무술을 겨루는 모습을 그렸다. 다섯 층으로 된 팔각고임부에는 해와 달을 포함한 각종 별자리들, 상서로운 동물들, 피리를 불 거나 거문고를 타는 신선들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어 고구려 시대 사람들 사후세계에 바라는 하늘나라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중국이 공개하는 단 하나의 벽화 무덤 오회분(五盔墳) 다섯무덤중  5호묘, 초기 형태인 춤무덤 등은 벽에다 일차 회를 바르고 마치 현대의 화 판처럼 하얗고 깨끗한 면에다 섬세하게 그린 반면, 다섯무덤 등은 돌 위에다 직접 그렸다는 것이다. 무덤방은 4.7평(약 15.6㎡)으로 10여 명 들어가서 설명을 들을 정도이기 때문에 제법 넓은 편이 다. 4벽은 높이가 2.18m 이므로 우리 키보다 높다. 그 위에 도리가 올려있고, 도리 위에 천정을 만들고, 맨 꼭대기에 한덩어리로 된 편편한 마감천정돌을 덮었다. 무덤방의 높이는 3.94m이다. 널 안에는 돌로된 관대(棺臺)가 3기 놓여 있는데 중간에 있는 큰 관대는 큰 돌을 다듬어 하 나로 되어 있지만 양쪽에 있는 두 관대는 다른 토막을 붙여서 만든 것으로 두 부인의 것으로 보 인다. 두 부인의 관대는 두 벽에 바싹 붙여 그 틈새를 석회로 발라 매웠다 ◈찬란한 네 벽의 사신도 네 벽에는 거대한 4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는데 이 사신도가 벽화의 주제를 이루고 있다. 동쪽 벽에는 날아오르는 청룡을 그렸다. 용머리는 남쪽을 향하고 아래를 굽어보며 위로 뛰어오르는 모양을 하였다. 용의 몸에는 노랑, 초록, 홍갈색을 평행으로 발랐고, 윗면에는 검 은색으로 비늘을 그렸으며, 목과 배는 분홍색을 칠했다. 네 발은 하얀 깃으로 장식하고 까만 선으로 윤곽을 그렸으며 발톱은 매우 날카롭다. 이 벽화에는 모두 39 마리의 용이 나오는데 형체와 채색은 거의 비슷하다. 서쪽 벽의 백호도는 남쪽을 향하고 있다. 날듯이 날쎄게 뛰어가는 자세인데 호랑이의 몸 은 하얗고 까만 선으로 얼룩무늬를 그려 넣었으며 배는 분홍색을 칠했다. 뒷다리의 뒤에는 날개로 장식했다 남쪽 벽의 중앙에는 들어오는 문이 있고, 동서 양쪽에 각각 주작(朱雀)이 한 마리씩 그려 져 있는데 부리가 가늘고 날카롭다. 빨간색으로 불꽃 모양을 냈고, 몸에는 붉은색을 꼬리털에 는 노랑, 초록, 붉은색을 섞어서 칠했다. 머리를 처들고 서로 바라보며 연꽃 좌대 위에 서 있 는데, 날개를 치며 날으려 하고 있다. 북 쪽 벽은 현무(玄武)로 거북과 뱀이 서로 휘감아 얽혀 있다. 거북이는 서쪽을 향하고, 머리를 돌려 위로 향해 아래로 내뻗는 뱀의 머리를 맞받고 있다. 거북이의 등은 홍갈색이고 등에는 무늬가 없다. 네 발에는 모두 발가락이 세 개씩 달려 있고 뱀의 몸은 청룡과 같은 색 을 칠했다. ◈찬란한 하늘세계를 그린 두 층의 고임돌 두 층으로 된 삼각고임에는 여러 신들을 포함한 하늘세계를 그리고 있다. 다섯무덤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를 그림이 함축하고 있는 풍부한 설화성을 들고 있는 사람도 있다. 널방의 천장 을 받치고 있는 사방의 거대한 화강암 위로 인류 문명의 획기적 진보를 가져온 신들의 이야기가 탁월하게 조형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삼각고임 1단에는 해와 달의 신, 수레바퀴제조신(製輪神) 과 씨뿌리는 하늘나라 사람, 소머리신 (神農)과 불의 신, 하늘을 나는 신선과 신장 등의 그림이, 삼각고임 2단에는 용을 타고 비파, 거문 고, 피리, 장고 등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하는 하늘나라 사람들이 그려져 신과 사람을 한 차원에 서 다루어 마치 그리스 신화를 방불하게 한다. 한편 해와 달, 북두칠성과 남두육성, 기타 별자리 등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다양한 별자리는 당 시 고구려의 천문학적 관심과 수준을 알 수 있다. 다섯무덤의 특성은 우선 사신도에서 찾을 수 있지만, 그보다도 전통적인 신선사상을 바탕으로 불교.도교.오행사상 등 여러 수입된 사상과 종교를 모두 용해하여 반영한 다양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벽화의 천적, 벽의 습기 다섯 무덤은 주위에 담장을 쌓고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으며, 무덤 입구에도 철문을 달고 열쇠로 잠가 관람객이 있을 때만 열어서 보여주는 등 중국 당국이 관리에 상당히 신경을 쓰 고 있다. 그러나 관람할 때마다 가슴아팠던 것은 벽에 물이 차서 흐를 정도였다는 점이다. 마치 목욕 탕 천장처럼 물방울이 맺혀 있어 무덤 안 전체가 습기가 아닌 물기가 흐르고 있다. 돌 위에 그린 그림이 1500여년이나 지난 오늘날까지 색깔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을 보면 정말 신비하게 생각 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물감을 썼더라도 물 속에 잠겨 있다면 오래 가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석굴암을 보존하기 위해 에어컨까지 시설하였는데 그 보다 역사적 가치가 결코 뒤떨어지지 않은 고분이 물에 젖어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만 하였다. 이 무덤 벽화에는 원래 벽과 천장고임부 곳곳에 금으로 만든 장식으로 치장되고, 짐승이나 새의 그림은 눈알을 청옥과 같은 푸른 보석으로 박았다는데, 현재는 소머리신의 오른쪽 눈에 박 힌 터키석(錄松石)을 빼놓고는 모두 도굴 당하고 다만 박혔던 흔적이나 치장한 흔적만 남아 있다. ◈세계 최대의 비석 장군총을 나와 광개토태왕비에 오니 큰 문은 아직 닫혀 있지만 작은 문이 열려 있다. 큰 대 문에는 '비디오 촬영금지(嚴禁錄像)'란 커다란 문구가 써 붙여 있다. 세계에서 비석이 가장 많은 나라가 중국이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거대한 것이 바로 광개토태왕비라는 것이 중국 학자들의 발표이며 일본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도대체 얼마나 커서 이런 기록을 갖는 것일까. 높이가 6.39m라면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아파트 3층에서 베란다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을 때 갑자기 큰 돌머리 가 눈 앞에 서 있는데, 그 돌덩이가 1층 바닥에서 3층까지 솟아오른 태왕비라면 실감이 날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 연구의 중요 자료 태왕비 태왕비가 위대한 것은 그 크기 때문이 아니라 4면에는 1775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내 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일 뿐 아니라 그 내용도 풍부하여 마치 한 권의 책을 읽는 것과 같다. 광개토태왕비는 그 기록 내용이 기년식(紀年式)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연나라, 부여, 신라, 백 제,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 전체의 역사적 사실을 비교 연구하는 데 큰 자료가 되기 때문에 주변 국가의 연구가 어떤 면에서는 우리나라보다 더 활발하게 되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는 광개토태왕 비의 내용을 연구함으로 해서 당시 고구려가 동아시아에서 차지한 위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고, 특히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서의 역사서술 방식이 중국 위주였으나 광개토태왕비의 내용을 통해 사대주의 사가들이 스스로 비하시켰던 우리 역사를 주체적 입장에서 되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귀 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수도 방어의 요지 환도산성(丸都山城) 환도산성 남문 안으로 들어가면 얼마 안 들어 가 음마지(飮馬池)가 나온다. 음 마지는 음마만(飮馬灣), 연화지(蓮花池)라고도 부르는데 고구려 군사들이 말에 물을 먹이던 곳이다. 음마지에서 바로 올려다 보이는 곳이 산성 안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장대(將臺)인데 성의 전체 형평을 잘 살필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에 설치하였다. 장대에서 다시 음마지로 돌아와 성 안으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 500m쯤 올라가 면 동쪽 산기슭 옛 궁전 터가 나온다. 궁전 터는 아는 사람이 안내하지 않으면 찾기 힘들다. 아무런 표지도 없는 데다가 밭으로 갈아먹고 있기 때문에 다른 밭들과 구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옛 궁전 터는 아직 제대로 정리하지도 않았고 연구 도 안되어 자세히 알 수가 없으나 주춧돌의 규모와 고구려시대의 기와조각들이 널 려있는 것으로 보아 궁전 터가 틀림없으리라고 본다.. ◈하늘에 제사 지낸 고구려의 국동대혈 집안시에서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상해방촌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산골짜기로 들어가면 나지막한 산중턱에 두 개의 동굴이 있다. 굴 안에서 내려다보면 압록강의 푸른 물이 유유히 흐르고 강 건너편에는 북한의 만포와 강을 따라 달리는 운봉선(북한 자강도의 만포∼운봉 철도)의 기차선로가 지척에 보이는 곳이다. 아래쪽에 자리잡은 큰 동굴을 [국동대혈(國東大穴)]이라고 부르며 그보다 100m 쯤 산 위 에 있는 동굴을 [통천혈(通天穴)]이라고 부른다. 후한서 고구려전에 보면 「10월이면 하늘에 제사지내고 큰 모임을 갖는데 동맹 이라고 불렀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동굴(국동대혈)이 있어 수혈( 穴)이라 부르는 데, 또한 10월이면 맞이하여 제사를 지냈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 동굴들은 현재 집안 시내에 있는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터에서 압록강을 따라 동쪽으로 17Km위치 에 있어 옛 중국의 기록과 맞아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국동대혈]은 높이가 10m폭이 25m이고 깊이가 20m정도 되는 동남향의 큰 동굴 로서 굴 앞에는 평평한 땅이 2백 평 가량 있어 수백 명의 군집이 가능했을 것이라 고 한다. 남남서 방향의 [통천혈]은 동굴 입구 반대쪽에 커다란 구멍이 있어 말 그 대로 [하늘과 통하는 신성한 동굴]이었음을 알 수 있다. 통천혈 안에는 제단으로 사 용했음직한 평평한 자연석이 놓여 있고 벽 쪽에는 그을음이 끼어 있었다. "이 동굴들은 고구려의 신을 맞이한 장소며 특히 국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이곳 에 와서 밤낮으로 제사를 지냈다. 그때마다 온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가 무를 즐기고 풍년을 감사했다"는 동네 전설을 들을 수 있었다. 천제란 황제나 천자 만 지낼 수 있는 것이고, 고구려가 천제를 지냈다는 것은 곧 왕중 왕인 천황과 같 은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 고려문(책문)과 기독교역사 심양에서 단동으로 가는 중 봉성지역 근처에 고려문이 있었다. 지금은 '변문'(邊門) 혹은 '일면산'(一面山)이라 하는데 이 지역에 남아 있는 고구려 흔적을 지우기 위한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東北工程) 때문이다. 고려문은 일찍이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된 곳이다. 1873년부터는 스코틀랜드의 만주선교사였던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고려문 전도를 시작하여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서상륜 등 의주청년들을 만났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 세례를 베풀고, 이들은 성경 번역사업에 동참해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번역했다. 고려문은 당시 조선의 국경도시로 한만 국경 출입을 위해 한국 관리가 파견된 별정소가 있는 곳이었고 3000호에 달하는 한국인 가구가 있었다. ◈ 단동 단동시는 요녕성에 위치한 면적 1만 4,918㎢, 인구 250만명인 중국최대의 국경도시로 북한의 신의주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옛 이름은 안동이었으나 1965년 단동으로 개명하였으며, 그 뜻은 ‘아침해가 뜨는 붉은도시’란 뜻이다. ◈ 압록강단교. 1909년 5월 일본총독부가 철도사용을 목적으로 짓기 시작하여 1911년 10월에 완공하였다. 길이 944m, 넓이 11m, 12연의 교량중 신의주쪽에서 9번째 중국쪽에서 4번째가 개폐식으로 되어 90°회전이 가능하여 범선들이 통과 할 수 있었다. 1950년 미군에 의해 폭파되어 신의주쪽은 교각만이 단동쪽은 철교와 교각이 그대로 남아있어 지금도 역사적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 위화도 고려말기 1,388년(우왕14년) 고려군이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압록강 하류, 신의주와 단동사이에 위치한 위화도에 머무르던 중, 이성계가 중심이 되어 회군한 사건으로 유명한 섬, 현재 북한의 영토이므로 상륙할수 없으나 섬주변을 유람선을 타고 관광 할 수 있다. ◈ 수풍댐 1943년에 완공된 평안북도 삭주군 수풍노동지구에 있는 댐으로 동양 최대의 댐(당시)이다. 댐 높이는 106m 길이 900m로 총 저수량 116억t이며 발전 총 용량은 70만kw에 이른다. 1960년부터 중국과 조중 압록강 수력발전회사를 설립해 공동으로 운영관리하고 있다. ◈ 호산장성 (만리장성 최동단기점)단동시에서 북쪽으로 31km떨어진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최고봉 146m이다. 약500여년전 명성화5년(1469)에 세워졌으며, 명대 만리장성의 최동단기점으로 확인되었다. 한면은 산으로, 삼면은 강으로 둘러싸여있고, 산 형세가 마치 누워있은 호랑이 모습과 같다 ◈ 고구려 박작성(泊灼城)!호산(虎山)에서 명나라 장성을 찾다가 고구려 산성을 하나 찾아냈는데 이 성이 바로 고구려 박작성으로 알려졌다. 보장왕 7년(648) 당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 '박작성은 산을 이용하여 요새를 세웠고, 압록강으로 튼튼하게 막혀 있었기 때문에 함락시키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지금까지 압록강 입구에서 발견된 고구려 성은 애하첨고성과 이 호산산성 뿐인데 애하첨고성은 평지에 쌓은 성이기 때문에 유일한 산성인 호산산성이 박작성이 되는 것이다. ◈ 이양자교회 약재상을 하던 김청송은 사업에 실패한 후 로스를 만나 식자공으로 일하게 됐고 후에 자기 고향인 집안에 가서 이양자를 비롯하여 집안 일대 28개 골짜기 마을을 돌며 매서인으로 전도했다. 그 결과 3년 만에 수백명 개종자들이 생겨났고 1884년 12월 로스는 이곳 4개 마을에서 7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1898년 설립된 집안 이양자교회는 만주에 세워진 최초의 한인교회라 할 수 있다. 단결교회 장문철 목사가 '耶蘇敎 初立 1898 됴선人' 즉, 1898년에 조선인 최초 교회가 설립됐음을 기록하고 있는 비석발견하였음. 단결교회는 김청송을 기념하기위해 교회 옆에 교육관을 청송기념관으로 건립하고 돌비를 세웠다. <참고자료:고구려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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