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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특파원 리포트] 왜 굳이 ‘옌볜’이라 하는지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09-08-02 조회수 : 1098
…중국어엔 이데올로기가 담겨

中 역사논리 인정한 꼴 돼버려관련이슈 : 특파원 리포트20090802001987

 

김청중 베이징 특파원 

커커우커러(可口可樂). 코카콜라를 뜻하는 중국어식 표현이다. 학창 시절 한 선생님이 커커우커러를 두고 중국인의 주체성을 강조한 일이 있다. “우리는 외국어인 코카콜라를 그대로 쓰지만, 중국인은 모두 한자로 표현한다”는 설명에 학생들은 대개 큰 감명을 받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월이 흐른 지금 이 말은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어, 즉 한자의 특성을 간과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외국어의 뜻을 살려 중국어로 표현하려는 노력은 인정한다. 예를 들어 센터를 중신(中心), 컴퓨터를 뎬나오(電腦·전자두뇌), GM을 퉁융(通用), 폴크스바겐을 다중(大衆)으로 표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중국어도 이런 경우가 아니면 해당 외래어와 비슷한 발음의 한자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코카콜라처럼 펩시콜라는 바이스커러(百事可樂), 볼보는 워얼워(沃爾沃) 식으로 표현하는 이유다. 중국도 세계화되면서 오히려 이런 사례가 점점 더 늘고 있다. 우리가 ‘쇼(Show)한다’고 하는 것처럼 ‘슈(秀)’도 ‘보여준다’ ‘공연한다’는 말로 쓰인다. 



다만 可口可樂처럼 같은 발음이라도 어떤 뜻의 한자를 사용하느냐에 묘미가 있다. 표의문자의 특성 때문에 같은 발음이라도 한자에 따라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좋다’는 뜻의 ‘可’ 대신 같은 발음이지만 ‘독하다’는 뜻인 ‘苛’를 사용했다면 코카콜라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그래서 중국 진출 외국 기업들은 회사 이름을 중국어로 표현할 때 이 부분에 신경을 많이 쓴다. 우리나라 기업의 경우에도 롯데는 ‘즐거운 날’이라는 뜻의 ‘러톈(樂天)’, 우리은행은 ‘친구에게 이익이 된다’는 ‘요리(友利)’ 등 될수록 좋은 이미지를 주는 한자를 고른다. 



최근 중국 매체에서 많이 눈에 띄는 단어가 있다. 러비야(烈比女亞)다. ‘위구르인의 대모’로 불리는 레비야 카디르를 지칭한다. 그런데 러비야의 ‘야(女亞)’는 몸종, 시녀라는 뜻이다. 티베트의 정신적인 지도자 달라이라마 14세를 뜻하는 다라이라마(達賴喇口麻)는 더 심하다. ‘라이(賴)’는 생떼를 쓰다, 억지를 부리다, 잘못을 부인하다, 책임을 회피한다는 부정적인 뜻이다. 인명이 아닌 국명에서도 이런 경우가 있다. 이웃 몽골을 멍구(蒙古)라고 부른다. ‘멍’(蒙)은 어리석다, 속이다, 질서가 없다는 뜻이다.



결국 중국어는 문자 자체에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이런 언어, 문자의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가장 먼저 간파한 한국인은 민족사학자 신채호 선생이 아닐까 싶다. 신채호는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 간의 투쟁”이라고 밝힌 ‘조선상고사’에서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쓰는 소위 ‘중국’이라는 표현을 거부한다. 대신 지나(支那), 서국(西國)이라고 말한다. 지나는 차이나(China)를 뜻하는 범문 치나(Cina)에서 온 것이다. 서국은 우리나라 서쪽의 나라라는 뜻이다. 후손에게 그의 뜻은 나라를 잃은 시절 민족혼을 잃지 않기 위한 몸부림으로 이해된다.



며칠 전 조선족 사회의 한 인사를 만났다. 그는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 정책을 비판하면서 이런 질문을 했다. “한국에서는 왜 연변(延邊)을 옌볜이라고 쓰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족이 읽는 것도 아니고, 한국사람이나 우리 동포도 실제 생활에서 다 연변이라고 하는데 굳이 옌볜이라고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몇 년 전 연변주에서 한글 쓰기를 독려하기 위해 고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연변주에서는 모든 간판에 반드시 한글을 표기토록 하고 있다. 한자와 병기할 땐 한글을 먼저 써야 한다. 하지만 한족의 비율이 높은 일부 현에서는 이런 규정을 무시해 갈등이 빚어지고 있었다. 당시 한 간부는 “언어는 곧 민족”이라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연변을 외래어표기법에 따라 옌볜으로 부르는 논리라면 백두산도 창바이산(長白山)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우리가 현재 오를 수 있는 곳은 ‘중국령’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애써 창바이산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백두산이 중국령임을 거부하는 민족 의식의 작은 발로가 아닐까. 연변을 옌볜으로 쓰는 것은 무의식중에 중국의 역사논리, 영토논리를 인정하는 것이고, 영원히 간도(間島)를 잃는 길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연변을 옌볜으로 부를 자, 민족을 논할 자격이 없다.



김청중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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