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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역사]토문강 국경 울타리 60년 전에도 있었다 첨부파일 : 다운로드[1]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09-11-27 조회수 : 1070


 



[역사]토문강 국경 울타리 60년 전에도 있었다














백두산 정계비①

북한 고고학지에 실린 논문에 실측기록… “간도는 조선땅이라는 명백한 증거”














‘백두산 동행’이라는 사진첩에 실린 ‘정계석’. 석퇴(돌무더기) 옆에 일본인 탐험대가 서 있다.



조선과 청의 경계였던 백두산 ‘돌무더기 울타리’(석퇴·石堆)가 모두 106개로, 석퇴가 시작하는 지점에서 끝나는 지점이 5㎞에 달한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그동안 석퇴의 수와 거리에 대한 실측은 한 번도 알려지지 않았다. 이 사실은 북한의 고고학 및 민속학지인 ‘문화유산’이란 잡지의 1957년 4호에 실려 있다. 북방나눔협의회 육낙현 회장은 “그동안 북한 자료 중 백두산 정계비에 관련한 것이 없었다”면서 “백두산에 관한 북한 자료를 살펴보다가 이 내용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백두산 정계비~토문강 석퇴로 연결

이 논문은 북한의 민속학자인 황철산 교수가 작성했다. 황 교수는 “본고는 1948년 7월에 청진교원대학 ‘백두산 탐사대’에 참가하여 조사한 자료를 정리한 것이다”라는 글로 논문을 시작했다. 여기에서 황 교수는 “돌각담의 총수는 106개이고 돌각담이 처음 있는 지점부터 끝나는 곳까지의 거리는 5391m에 달하는 것이었다”고 썼다. 이 자료에 따르면 1948년까지 석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황 교수는 또 “당시 탐사 때 전장석 동무는 력사과 학생 4명을 다리고 그 전부를 조사 측정했는데 돌각담은 토문같이 량안이 절벽으로 된 곳까지 있고 그 아래는 어느 정도 더 가보아도 그런 것이 없었다”고 서술했다.



논문에서 언급한 전장석 연구사도 북한의 민속학자다. 청진교원대 교수였던 황 교수와 마찬가지로, 전장석 연구사도 청진교원대학의 교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논문에 나타난 내용은 일반인이 아닌 학자들이 직접 실측했다는 점에서 조선과 청의 국경 연구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들의 실측 조사를 그대로 인정한다면 백두산 정계비와 토문강 사이에 석퇴가 연결돼 있으며, 조선과 청의 경계선은 이 석퇴가 된다. 중국은 지금도 백두산 정계비에서 연결되는 두만강 물줄기가 한국과 중국의 국경선이라고 주장한다.



1712년 조선과 청은 압록강과 토문강이 갈라지는 지점에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다. 토문강의 상류 물줄기가 바닥이 마른 건천(乾川)이라는 사실 때문에 청의 대표인 목극등은 정계비와 토문강의 물줄기를 잇는 울타리를 쌓기를 요구했다. 숙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 해 8월 석퇴(돌무더기)·토퇴(흙무더기)·목책(나무울타리)으로 조선과 청의 국경선을 만들었다. 이 울타리의 존재는 1885년 토문감계사 이중하가 중국 측 관리와 직접 백두산 정계비를 답사하면서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최근의 석퇴 자료는 1942년 일본인 탐험대의 사진이다. 뉴스메이커가 623호(2005년 5월 10일자)에 발굴, 소개한 이 사진에는 10여 개의 돌을 모아놓은 돌무더기가 보이고 5m 정도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돌무더기가 보인다. 사진의 제목은 ‘정계석’이다. 이 사진은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백두산 등행’이라는 사진집에 실려 있다. 1943년과 1944년 두 차례 백두산에 오른 일본인 성산정삼(城山正三)의 사진에도 석퇴의 모습이 실려 있다. ‘정계비의 고원’이란 제목이 붙은 이 사진에는 백두산 정계비를 따라 북동-남서의 선에 50∼100m의 불규칙한 간격으로 석퇴가 있다고 적혀 있다. 또 이 선이 조선과 청의 경계라는 주장이 있다는 내용도 실었다.



3년 전 위성사진 통해 돌무더기 확인












1970년대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에는 정계비와 토문강을 연결하는 울타리가 보인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

새로 발견한 ‘문화유산’의 자료에는 이 사진을 입증할 수 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황 교수는 “현재 정계비가 섰던 분수계의 동쪽 골짜기의 우안에 따라 대개 사람의 머리 만한 돌들을 모아 커다란 각담 모양으로 만든 것이 일렬로 포치되어 있다”고 썼다. 사진을 보면 돌의 크기가 사람의 머리 정도 된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이 돌무더기가 하나의 줄로 연결돼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1930년대 두 차례 이곳을 답사했던 간도 연구가 김득황 박사는 “돌 무더기가 마치 사람의 무덤처럼 돼 있었다”며 “당시 느낌으로는 돌무더기가 10∼15m가량 떨어져 있었다”고 회고했다. 일본인의 두 사진에서 석퇴 사이의 거리가 어느 정도 차이가 나고 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성산정삼의 사진 설명에 나타난 ‘불규칙한 간격’이 사실임이 드러난다.



60년 전 존재했던 이 석퇴가 지금까지 그대로 토문강으로 연결돼 있다면, 이는 토문강이 흘러들어가는 송화강 동쪽의 간도지역이 조선 땅임을 말해주는 명백한 증거다. 황 교수는 “처음에 청차 목극등은 압록, 토문 분수계상에 정계비를 세우면서 토문강이 송화강의 한 지류임을 알지 못하고 두만강의 상류인 것으로 오인했다”고 썼다. 1948년 조사에서 석퇴가 두만강의 상류가 아닌 토문강으로 연결돼 있음을 직접 확인했다고 볼 수 있다.



뉴스메이커는 611호(2005년 2월 15일)에서 1m급 위성사진을 통해 확인한 결과 돌무더기 띠가 백두산 정계비에서 토문강 상류까지 1.5㎞ 연결돼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아직까지 돌무더기 띠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김득황 박사는 “돌무더기는 아직도 남아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북한 지역 내의 고산지대에 있는 석퇴 106개가 의도적이 아니라면 사라졌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1712년부터 1948년까지 236년 동안 존재했던 석퇴가 불과 60년 사이에 자연 현상으로 없어졌을 가능성은 더 더욱 없다.



‘문화유산’ 자료는 거리에 관해서도 정확히 분석해 눈길을 끈다. 황 교수는 자료에서 먼저 숙종실록을 인용했다.

“비가 서 있는 아래로부터 25리는 목책 혹은 돌을 보았고, 그 아래 물이 나는 곳의 5리와 물이 마른 내(乾川) 20여 리는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서 내의 흔적이 분명하므로 표식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아래 물이 솟아 나오는 곳까지 40여 리는 전부 책(柵)을 설치했다. 그러나 이 중에서 5, 6리만은 나무도 돌도 없고 토품(土品 )이 강하므로 다만 흙무덕(土敦)을 쌓았다.”(이조실록 숙종 38년 12월 임진조)














위_동북아역사재단(구 고구려연구재단)이 2005년 백두산에서 찍은 정계비 주춧돌. 아래_백두산 천지 부근을 간략하게 그린 지도. 토문강과 정계비 사이에 석퇴와 토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돌로 경계로 만든 25리는 10㎞다. 이 거리는 1885년 토문감계사 이중하가 보고한 내용과 비슷하다. 이중하는 “토퇴와 석퇴가 연달아 쌓여 있는 것이 90리가량인데 퇴의 높이는 여러 척이며 그 위에 나무가 자생하여 이미 늙어 구부러진 것도 있다”고 보고했다. 숙종실록에서 목책과 석퇴가 25리이며, 물이 나는 곳 5리, 마른 내가 20리, 울타리인 책이 40여 리라고 한 것을 합산하면 90리가 된다.



문제는 숙종실록과 이중하의 보고서에 나타난 것을 감안하면 25리 즉 10㎞인데, 1948년 실측에서는 석퇴 띠의 길이가 5㎞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황 교수는 “25리와 5391m는 거리상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산길을 걷는 사람들은 리수를 실지의 직선거리를 표준으로 하기보다 그 곳까지 도달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표준으로 하는 일이 많다”고 서술했다. 조선후기 국경사를 전공한 경인교대 강석화 교수(역사학)는 “북한에서 나온 ‘문화유산’의 자료를 보면 숙종실록과 이중하의 기록보다 이 자료의 실측 기록이 맞을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뉴스메이커 611호(2005년 2월 15일)에서 위성사진 전문가가 1m급 위성사진을 판독하여 추정한 거리는 1.5㎞였다. 인공적인 돌무더기 띠가 1.5㎞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유산’에서 발표한 실측 거리 5㎞는 인공위성을 통해 추정한 거리보다 3배 더 긴 거리에 석퇴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문화유산’의 자료는 1948년 당시 이미 흙울타리(토퇴)가 무너졌다는 새로운 사실을 전해준다. 1930년대 이 곳을 다녀간 김득황 박사는 “당시에 흙울타리가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황 교수는 “흙무덕은 전혀 없고 목책이 썩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며 “필경 나무가 서 있는 곳에서는 드문드문 목책도 세웠을 것이나, 그것은 이백수십 년이 지난 오늘까지 썩어 없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토문감계사 이중하가 보았던 나무울타리(목책)뿐 아니라 토퇴도 이미 사라졌다는 것이다.



“일본이 백두산 정계비 계획적 인멸”












                북한의 ‘문화유산’에 실린 논문과 석퇴 관련 내용.


‘문화유산’의 논문에서 황 교수는 백두산 정계비가 1931년까지 220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없어졌다는 사실을 적어놓았다. 이에 대해 황 교수는 “때는 바로 9·18사변 직전으로 일제는 만주 강점의 만단의 계획과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날강도 일제의 군부는 지령을 내려 이 유서 깊은 력사적 유적을 계획적으로 인멸한 것이었다”고 서술했다.

황 교수는 또 정계비의 향방에 대해서도 추측했다.



“백두산은 무쌍하게 웅대하나 급준하지는 않으므로 정계비가 서 있는 지점까지는 말도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신무성까지는 약 24㎞나 되며 신무성에서 혜산 또는 삼장까지는 80㎞가량 된다. 당시 이 구간도 겨우 인마가 통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 비를 자취 없이 운반하여 가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아 혹시 이 근방 어느 지점에 매몰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비가 섰던 자리에는 비를 꽂았던 자연 암반에 뚫은 구형 구멍만 남아 있다.”





 



 



 



 



 



 



 



 



 



 



 







 












 

일본 사진집 ‘비경 백두산 천지’ 에 실린 석퇴 사진 ‘정계비의 고원’

정계비가 백두산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황 교수의 논문이 실린 ‘문화유산’이라는 잡지는 과학원 소속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에서 1957년부터 1962년까지 발간됐다. 황 교수는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를 창립할 때 초대 민속학 연구실장을 맡았다. 함경도 출신의 민속학자로, 청진교원대학 교원시절부터 함경도 일대에 대한 현지 조사를 많이 한 것으로 민속 관련 서적에 소개돼 있다.



황 교수의 논문 이후 백두산 정계에 관한 북한의 글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북한은 1962년과 1964년 중국과 협상하여 백두산 천지를 나누고, 두만강의 최고 북쪽 지류를 연결하는 국경선을 확정했다. 이후 백두산 관련 서적에서 정계비 또는 석퇴에 대한 자료는 나오지 않았다.



황 교수의 논문이 1948년 조사를 토대로 하고 있으나 1957년 ‘문화유산’을 통해 발표된 것을 보면, 조선과 청의 국경인 석퇴가 적어도 1957년까지 존재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경인교대 강석화 교수는 ‘문화유산’의 논문에 대해 “석퇴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인정하는 자료”라면서 “숙종실록에 실린 내용의 실체를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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