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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중국(中國)을 바로 보자.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08-12-20 조회수 : 1249


  

  1755년 청(凊)의 건륭(乾隆)20년, 청제국은 북강(北疆), 현재 중국의 서북쪽 천산산맥(天山山脈) 이북지역에 있던 준가르(準噶爾)왕조를 멸망시키고 4년후인 건륭24년 1759년에는 천산산맥 남쪽(南疆이라 불림)에서 반항하던 무슬림 집단인 호자(Khoja)형제의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청제국은 천산산맥의 남북 일대 즉 지금의 소위 신장(新疆)위구르 지역을 중국의 영토로 확정 하였다. 



최후의 유목왕국으로 불렸던 북강의 준가르 왕국은 이렇게 청제국에 의해 절멸하다시피 처절한 최후를 맞이한다. 따라서 북강 지역도 초토화 되면서 무주공산의 허허벌판이 되고 말았지만, 초원의 실크로드는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통로이기에 당시 러시아가 남진(南進)과 동진(東進)정책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노리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중국으로써는 대제국 러시아와 직접 충돌을 피하는 완충지역으로 삼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했다. 



  1871년 러시아와 청제국간에 “이리(伊梨)조약”(러시아에서는 “상트페트로부르그 조약”으로 불림.)을 맺기까지 약 115년간 이 지역은 두 대국이 으르릉 거리며 주도권을 다툰 지역으로 평가 된다. 1851년 중국의 부패와 무능으로 촉발된 “태평천국의 난(亂)”은 중국전역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1860년대 중국전역이 대단히 위험하던 때인 1864년 6월에 발생한 위구르족과 회족이 중심이 된 이스람교도의 대규모 저항은 성공을 거두어 중국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듯도 했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패권경쟁, 그리고 러시아의 남하저지를 외교의 기본으로 삼는 영국의 地球的 체스판 훈수에 의해 저지되고 만다. 



舊韓末 영일동맹(英日同盟)을 맺어 한국을 침탈하려던 일본에 날개를 달아준 우리의 과거 역사와 닮은 점이 있지 않는가. 그때도 영국의 관심은 오로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일본을 선택했을 뿐이다. 



  

  아무튼 다시 18세기 중엽으로 돌아와, 청국은 주인 없는 이 땅을 지키기 위해 타지에서 많은 병력을 충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러시아와 카자흐등의 유목민족이 빈번하게 출몰하는 준가르 초원을 실질적인 중국 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중국의 민간인이 사는 곳으로 탈바꿈 해야만 했다. 그래서 둔전(屯田)및 주방(駐防)과 환방(換防)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移民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청의 강희제 정권은 이민의 대상자로 퉁그스係와 몽골족 민족을 선택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소론(索倫)족, 시버(錫佰)족 그리고 몽골계의 차하르(察哈爾)족 등이다. 이들은 모두 흑룡강 유역 혹은 요동지역의 토착부족으로써 수렵을 중시한 용맹한 부족으로 이름을 떨쳤다. 

소론과 시버, 그 중에서도 시버족은 後金의 누루하치에게 끝까지 반항하던 9개 부족중 하나였다. 공교롭게도 청의 지배계급이 함께 삶을 누리던 같은 지역의 부족들을 차출하여 머나먼 서역의 주방과 환방을 맡기게 했다. 3년 혹은 10년의 환방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차하르 역시 청나라에 끝까지 반항한 몽골족으로 누루하치 이후 홍타이지 시절까지 청에게 저항과 모반을 그치지 않았다. 



이들 소수 민족들은 중국각지에서 일어난 대소 반란에 투입되어 많은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나 할까. 그들에게 반항했던 소수민족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쟈연스럽게 소멸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참으로 무섭게 보복을 한 셈이다. 



  



  2004년 통계에 의하면 신강 위구르 자치구의 인구는 1,963만 명이다. 이 가운데 위구르족이 897만 명으로 신강성 인구의 45.73%, 만주족이 2만명, 시버족이 4만명으로 0.21%에 불과하다. 소론계의 다구르족은 7,000명도 되지 않아 0.03%의 인구비율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의 漢族이 거의 절반에 이른다. 1949년 모택동 정권이 수립했을 때 한족의 비율은 불과 3%에 불과하던 신강성은 면적이 166만 평방KM(한반도의 7배)로써 중국전토의 17%에 이른다. 이 땅을 개척하고 지킨 만주 땅의 소수민족은 신강뿐 아니라 중국 전역의 각종 토벌작전에 투입되어 막대한 인적 손실을 입어 지금은 민족적 구심력을 형성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중국전체의 92%라는 한족의 바다 위에 떠있는 일엽편주(一葉片舟)라고나 할까, 거의 흔적만 남은 상태여서 오히려 중국 당국으로부터 칭송을 받는 시혜적 "립서비스"를 받는 수준이라고 한다. 중국의 漢化정책은 무자비 할 정도로 일방통행이며 지금도 현재진행형임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길림성에 살던 조선족 자치구 역시 해체된 지 오래다. 조선족으로 불리는 우리 동포들을 중국의 남부 서부등 중국 각지로 흩어버리는 분산정책을 사용한 것이다. 통일한국이 성립된 후 발생할지도 모르는 불필요한, 그들이 예상하고 있는 부담을 사전에 차단 하려는 의도가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2002년 시작한 동북공정 이후부터다. 중국이 정보화 시대의 지구촌에서 문화의 다양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21세기에서도 홍타이지 혹은 강희제, 건륭제의 청 제국식 무력으로 밀어 부치는 방법이 통할는지 지대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서북공정(西北工程)이라 불리는 또 하나의 한화(漢化)정책은 중앙아시아 이슬람 문화권과 종교적 문화적 동질감을 가지고 끊임없이 독립을 주장하고 있는 위구르, 카자흐, 키르키스족의 분리주의를 원천부터 무력진압하고 있는 중이다. 이들 가운데 카자흐, 키르키스족은 중국 국경밖에 엄연한 독립국가를 건설한 민족이며, 위구르족은 국가는 없지만 거의 전원이 철저한 무슬림으로 신강 최대의 소수 민족이다. 1999년 신장 자치구의 구도(區都) 우루무치에서 서쪽 끝의 “카스”까지 의 철도 개통 이후 급속한 한화정책이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2005년 현재 우루무치의 268만 인구 중에 85%가 한족이라니 漢族의 바다는 그 무엇이라도 삼켜 버리는 괴물 같지 않은가. 漢化정책은 한족의 인해전술(人海戰術)이 아니고 무엇인가. 



  



  금년 봄부터 시작된 티베트의 대중국 저항운동은 올림픽을 앞둔 중국당국의 골치거리로 등장했다. 그러나 중국은 당황하지 않았다. 티베트 승려들의 이유 있는 목소리는 총검으로 무참하게 저지되고 말았다. 

중국이 펼치고 있는 또 하나의 공정, 그것은 서장(西藏) 티베트의 漢化 정책인 서남공정(西南工程)이다. 티베트는 元나라 때부터 중국의 속국이란 명분으로 1950년 무력으로 점령을 감행했다. 그러면서도 동북쪽에서는 항미원조(抗美援朝)라는 기치를 걸고 6.25전쟁에 참전하여 우리의 통일을 결정적으로 저지한 역사적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수 없다. 여하튼 달라이라마가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1959년 수만명의 희생자를 낸 對中항쟁이 있었지만 모두가 무력 앞에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와 역사가 다르고 언어와 종교가 다른데도 계속된 중국의 탄압에 티베트는 게릴라전으로 맞섰지만 중국은 1987년부터 400일간 계엄령을 선포하여 무자비한 공포정치로 대응했을 뿐이다. 2006년 7월 티베트 영토 깊숙리 자리잡은 수도 “라싸”까지의 칭짱(靑藏)열차를 개통했다. 이제 티베트에도 “漢族의 바다”가 만들어지는 것은 시간문제 일뿐이다. 티베트 인구는 274만명(2005년 통계)이지만 티베트 西藏지역의 인구94%를 차지하는 절대다수이다. 



철로가 개설되었으니 한족이 물밀듯이 이주하고 경제권을 가지면 이젠 세월이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군사력, 정치력의 뒷밭침 속에 경제력만 장악하면 티베트 인구 300만 정도야 漢族의 하청민족으로 전락 시키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100년이고 200년이 지나면 티베트는 완전히 漢化되고 마는 것이다. 중국은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른다. 



티베트의 면적은 123만 평방KM로써 한반도의 약 6배이며 중국 전토의 약 13%를 차지한다. 70여종에 이르는 광물과 수자원 그리고 산림자원의 보고이다.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印度와의 충돌을 방지해줄 완충지 역할을 할수 있다. 중국의 역사가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중원(中原)과 변방(邊方)의 개념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신장위구르에 西北工程을, 티베트에 西南工程을, 우리의 고대역사가 고스란히 묻혀있는 만주지역에는 東北工程을 추진하고 있는중이다.중국은 옆에 허술한 것이 보이기만 하면 꿀꺽 삼켜 버리곤 핏발선 눈초리로 노려보면서 큰 덩치를 꿈틀거리며 서서히 닥아오는 괴물의 모습으로 비쳐진다. 일단 점령하면 그곳에 살던 민족은 자기들 주장대로 "다민족 국가의 일원"이 되고 그땅에 있었던 문화와 모든 역사는 중국의 역사가 되는것이다. 반항하면 총검으로 진압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중국식이다. 

  



  최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병세로 인한 북한의 붕괴설과 함께 중국의 움직임이 우리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지대한 관심사로 등장하고 있다. 황장엽씨나 전문가들이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100%라고 한다. 유사시 중국이 부분적 군사행동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우리가 정신차려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래는 현재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미래를 예상하고 준비하는 자만이 미래를 여유있게 맞이할수 있다. 한국은 세계의 4강이 교차하는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다. 위기이면서도 기회이기도 하다. 조상들이 물려준 영토를 온전히 보전할수 있을때 한국은 진정하고도 능동적인 동북아의 균형자가 될수 있다. 필자는 진실로 이 페이지에 옮기고 싶지 않는 불길하고도 끔찍한 일이 현실로 되지 않기를 조상님들과 천지신명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빈다











 1626년 10월 “홍타이지”(淸의太宗)는 “누루하치(努爾哈赤)”의 뒤를 이어 후금(後金)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그는 우선 明나라 지배의 요동(遼東)지역을 점령, 이를 고수하고 明나라와의 화친을 요청하게 된다. 홍타이지(皇太極)가 요동의 强者로 등극한지 채 3개월이 되지 않는 1627년 1월에 3만의 병력을 수하장수 아민(阿敏)에게 주어 조선을 정벌하도록 명령한다. 우리는 이것을 정묘호란(丁卯胡亂)이라 부른다. 



 누루하치가 요동과 만주지역에 흩어져 살던 대부분의 여진족을 통합하여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와 대립각을 유지한 해는 1616년이다. 그는 무순(撫順)전투로 시작하여 그가 전사한 영원성(寧遠城) 전투까지 10년간 對明 전쟁을 통해 요하(遼河)의 동쪽(遼東)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는 명나라를 멸망 시키기 보다는 애초부터 요동지배, 그것이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요동의 지배와 안정화는 후금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었다. 

 

1600년대 초 여진의 세력확장을 우려한 명나라는 이들에게 그 당시 가장 중요한 경제활동인 호시(互市)와 조공(朝貢)무역을 제한한 반면, 통일 여진은 커진 경제규모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요동이 필요하였을 뿐이다. 후금에게는 다만 요동의 탈환을 노리는 명나라 보다는 親明정책을 고수하며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 背後의 朝鮮이 항상 더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배후로부터의 위협, 그것을 제거하기 위한 군사행동, 바로 정묘호란이다. 이 침략에서 조선을 굴복 시키고 형제지맹(兄弟之盟)을 맺은후 對明 전선에 전력투구 하려는 그들 나름의 전략이었지만 조선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 즈음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황폐화 된지 20여년이 지났지만, 조정은 東人과 西人으로 갈리어 심한 당쟁의 와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623년 광해군이 폐위되는 인조반정이 발생하고, 반정(反政)의 논공행상에서 소외된 이괄(李括)일당이 소위 “이괄의 亂”을 일으킨다. 이 난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실패한 도주잔당들이 후금의 누루하치에게 달려가 조선 인조등극의 부당성을 강조할 뿐 아니라 조선의 병력상황을 설명하면서 어처구니 없이 조선의 정벌을 요구하게 된다. “못먹는 밥에 재나 뿌리자”는 심산인지 몇 푼어치의 권력에 눈이 어두운 반역자들의 행동은 울고 싶던 정복자의 뺨을 때려준 격이었다. 



 권력에 눈이 어두웠던 배신자들은 옛날이나 지금에도 존재한다고 보고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다. 과거 고구려가 멸망할 때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이 권력투쟁에서 패하고 당나라로 도주하여, 唐의 군사와 함께 조국의 멸망을 도왔던 역사적 사실이 있지 않는가. 근세에 들어와 1884년 갑신정변과 1894년의 동학란때도 청국의 도움을 청하는 바람에 조선내부에서 일어난 자발적인 개혁과 자생적인 혁명운동이 좌절된 역사가 있다. 

 

조선의 일본합방을 도운 이완용, 송병준등의 매국노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해방후 북한의 김일성이 소련으로 달려가 스탈린의 각본대로 6.25전쟁을 도발한 비극도 한줌의 권력을 아들, 손자까지 물려주려는 세습 왕조국가를 만들기 위한 퇴행적 민족 반역 행위였음이 이제 드러났지 않는가. 또한 현재의 북한이 위기상황이라고 하는데 권력자 주변의 집단이 그러한 반역행동을 저지를 것 같은 예상이 되지 않는가. 최근 남한에서도 조선과 반도체 그리고 자동차산업의 고급기술을 돈 몇푼과 자신만의 영달을 위해 중국에 넘기려다 적발된 사례는 현대 산업사회의 또 다른 형태의 매국 반역행위임에 틀림 없다. 



  다시 요동시절로 돌아가서, 이괄 일당의 고자질을 들은 후금은 당장은 조선정벌보다 명나라와의 영원성 전투준비가 더 급한 과제였다. 후금의 상황은 조선 정벌을 다음 정복자인 홍타이지에게 넘겼을 뿐이었다. 광해군은 명나라에서 파병요청이 왔을때도 미온적으로 대하는등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적인 정책을 취하였지만 인조와 조정은 국제정세에 까막눈이 되어 명청 교체기(明淸交替期)를 읽지 못하고 오히려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뚜렷이 한다. 

 

이러한 정책은 조선 내부의 군사적 준비나 명나라와의 군사동맹 같은 배수진 없는 당시로써는 무모한 정책이랄 수 밖에 없다. 마침내 홍타이지는 대몽고 전역을 굴복시킨 1636년 4월,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면서 스스로 황제로 등극한다. 동시에 조선에게 황제 존호를 올리고 양국을 형제관계에서 君臣關係로 고치며 명나라 정벌을 위한 戰費로 황금 1만냥과 戰馬 3,000匹등 무리한 요구를 한다. 이것은 배후의 위협인 조선을 치기 위한 빌미였다. 

 

이에 대해 조선은 오히려 단교를 의미하는 절화교서(絶和敎書)를 보내는 명분을 취했지만 병력은 고작 의주 지역의 7000명으로써 침략에 대비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해 12월 홍타이지가 직접 지휘한 滿蒙漢 연합군 12만 병력  앞에 무릎을 꿇을수 밖에 없었다. 조선국왕 인조는 포위됐던 남한산성에서 1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추위와 식량부족 때문이었다. 지금의 송파구 한강 나루터 삼전도(三田渡)에서 조선 국왕 인조는 세자와 함께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의식을 치루고 앞으로 군신관계, 즉 신하의 예를 다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소위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이로부터 조선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2백60년간 “중국의 속국”이라는 치욕의 명칭을 달고 살아야 했다. 



  정복자 누루하치는 만주지역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수렵사회를 영위하던 여진족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통합하면서 권력 집중화 과정을 거치고 요동의 농경지역을 장악, 농경민까지 지배하게 된다. 그는 8기군(八旗軍)이란 독특한 군사조직을 만들어 주둔과 철수, 행군과 수렵, 그리고 전투수행에서 기동력과 효율성을 발휘,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황,백,홍,남색의 기치(旗幟)로  동서남북 방위에 구분하고 위 네가지 색 기치에 붉은색과 흰색 테두리를 둘러 동서남북의 각 중간방위에 위치시켜 8개의 깃발로 움직이는 군사조직이다. 중국에서 8의 숫자는 전체를 의미하며 모든 가능성의 현현(顯現)과 행운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은 8월8일 저녁 8시에 개막식을 가졌다. 올림픽을 축하한 세계인들은 화이론(華夷論)의 8이 아닌 인류애의 8이기를 원했을 것이다. 여하튼 팔기는 300명을 기본조직으로 하고 이를 1니루(佐領)라 부르고 5개 니루가 1參領, 다시 5개 참령이 1都統이 되는 조직으로써 각 좌령은 농사는 물론 양병과 군사훈련까지 책임지는 治民官인 동시에 行軍官이었다. 이 조직은 서로를 감시할수 있으며 군사작전시 서로를 경쟁시켜 논공행상하기 쉬운 장점이 있었다. 



 누루하치의 10년과 홍타이지의 16년, 북경에 入城하여 명나라를 멸망 시킬때까지 연전연승 할수 있었던 원동력이야말로 바로 이 팔기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1644년 북경에 입성한 八旗部隊는 모두 24기에 20만명 이었다고 한다. 소수의 만주인들이 중국을 지배한 방법은 역시 팔기군을 중심으로 한 무력을 앞세운 공포정치가 아니겠는가. 중국의 漢族은 그후 수십년간 청의 조정에 대해 줄기차게 반란과 불복종으로 대항 했지만 팔기군의 무력 앞에서는 죽음밖에 없었다. 무자비한 살육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중국을 다스리며 장악해 나갔다. 결국 漢族은 이민족인 여진족에게 나라를 멸망 당했지만 여진이란 민족은 수백년 세월이 흐름에 따라 漢族에 흡수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어져 버렸다. 

 

중국의 역사에서 宋元 交替와 明淸 交替는 몽고와 만주의 對漢族 정복이었지만 모두가 漢化 되었다고 할수 있다. 팔기군에 배속되어 청나라 건국에 이용당한 몽골은 청의 붕괴 이후에도 러시아의 분리정책에 의해 분리되고 구심력을 상실한다. 몽골은 결국 수백년간 청조에 복속 하다가 1911년 청의 멸망 1년후인 1912년 “보크트항” 정권을 수립하여 외몽골로 독립하고 내몽골은 외몽골과의 통합에 실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하튼 만주족 정체성의 원천이며 기반이 되는 팔기제도는 그후 순치(順治), 강희(康熙), 옹정(雍正),건륭제(乾隆帝)를 거치며 다소의 변화가 있었지만 더욱 공고히 발전하여 청조 유지의 버팀목이 된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면 청 조정이 18세기 청나라 재정의 20내지 25%가 총인구의2%도 채 미치지 못하는 旗人들에게 배정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만큼 애착을 가진, 강압과 폭압의 팔기제도의 정치정신은 아직도 중국에 고스란히 베여 있다고 한다면 필자의 과잉 진단일까. 



    BC 221년 진(秦)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중국 역사상 첫 번째의 제국으로 등장한 이래 漢,唐, 宋나라로 이어지면서 제도와 학문, 문화와 기술의 발전에서 괄목할 만큼 사회의 진화를 이룩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강력한 중앙집권하의 전제폭정이 뒷밭침한 결과이다. 민중을 개미목숨으로 여기는 중국 지배층의 인식은 예나 지금이나 민주나 공화의 개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인다. 



 오로지 경찰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의 강력한 통제 속에 소수 통치자들의 끝없는 패권욕망은 이웃나라에 고통을 주고 대다수 민중에게는 밑바닥 인생의 희생을 강요 하는 것을 담보하는 것은 아닌지. 오히려 진나라가 천하통일하기 전인 춘추 전국시대에 仁義 와 德治를 강조하는 공자와 맹자, 노자와 장자등 동양에 불멸의 사상을 전파했던 훌륭한 중국인이 더 많았다. 

 그들이 자랑하는 소위 康雍乾(康熙帝, 雍正帝, 乾隆帝)盛世라 함은 이웃 국가와 지역을 침략, 점령함으로써 오늘의 중국영토를 확장한 패권의 팽창시기이기도 하고 그 전통은 불행 하게도 오늘날에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大航海 시대 이후 식민지 제국을 이룩했던 스페인, 영국, 프랑스 그리고 미국등의 서구의 열강들은 2차 대전 이후 지배했던 국가들의 독립을 인정 하거나 자치령 혹은 보호령으로 만들어 그들의 문화와 역사, 인권과 자치를 보장하고 있지 않는가. 베트남을 프랑스화 하기위해 프랑스인들의 대규모 이주라던지, 필립핀을 미국화 하기 위해 미국인들이 대규모 이주 한다면 세계인들의 웃음을 사는 코미디가 될 것이다. 또한 영국의 聯邦國인 호주와 캐나다,뉴질랜드는 완전한 독립국으로써 영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선진국이다. 



 서남공정이나 서북공정은 그렇다 치고라도 2천년 넘게 국경을 맞대고 함께 싸우고 웃고 울며 살아온 한국과 중국 사이에 동북공정은 또 무엇인가. 서로가 서로의 역사를 다 잘 알면서…  



또 연길의 조선족 자치구는 어디로 치워 버렸는가. 또한 간도문제는 무엇인가. 이웃이 불행하게 의식이 없어져 갈 때 제3자와 속닥거려 이웃의 텃밭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놓고 말 한마디 없는 태도는 또 무엇인가. 



  孔子의 한 말씀이 생각난다.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군자는 義를 먼저 생각하고 소인은 利를 먼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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