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천답논저

 

제목 : 특별기획 우리 영토이야기⑪ - 우리 국토(國土), 강역의 변천사 봉황의 나라 ‘대고려국’ 건국운동(중)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7-06-07 조회수 : 31

봉황의 나라 ‘대고려국’ 건국운동


청전 조병현 박사의 우리 영토이야기 - 우리 국토(國土), 강역의 변천사

대고려국 건국 발표

대고려국 건국운동은 길림성 거주의 정안립과 양기탁, 중국인 주사형, 일본인 스에나가 세쓰에 의해 고구려가 지배한 한민족의 고토인 만주 땅에 대고려국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운동으로 1917년부터 추진되었다. 1920년 겨울에는 간도에서 대고려국 건설구상이 발표되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동진(東進)이나 미국의 서부 정복이 양국 주민의 정신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1000여 년에 걸친 북진(北進)이 한반도 주민들에게 ‘북진의 피’ 프런티어 정신을 길러주었다.

이러한 흐름을 이어받아 만주·연해주 지역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독립국 수립을 시도하였다. 1917년의 대고려국 구상에 이어 1930년대의 단자유국(檀自由國) 구상 및 이광수의 고려공국(korean principality) 구상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인’들은 만주와 연해주에서 1000여 년 전의 연고권을 바탕으로 ‘수복’을 꿈꾸었고 몽골인은 칭기즈칸의 옛 영화를 조금이나마 되찾고자 하였으며, 일본인은 만주족의 이름을 빌려 동북지역을 중국에서 떼어내려 했고 아무것도 갖지 않은 자들은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조선이 멸망하자 한반도 주민은 만주와 연해주(외만주), 그리고 중앙아시아까지 그 거주 영역을 넓혔다. 이는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라는 역사적 흐름이 끊기면서 한반도 주민의 활동 영역에서 배제되어 온 만주지역에 거의 1000년 만에 한반도 주민이 다시 대규모로 거주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서기 918년에 왕건이 새 왕조의 이름을 ‘고려’로 삼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을 보이고 발해의 이민자들을 수용한 이래, 고려는 성종 때 서희가 강동6주를 차지하여 고려의 국경을 압록강 근처까지 올리고 예종 때 오늘날의 함경도 지역에 동북9성을 쌓는 등 북진(北進) 의지를 분명히 했다. 조선 역시 북진정책에서는 고려를 계승하여 세종 때에는 김종서 등이 압록강 쪽의 4군과 두만강 쪽의 6진을 확보했으며, 이 정복 전쟁에 참가한 바 있는 이징옥(李澄玉)은 반란을 일으켜 여진인의 황제가 되고자 했다. 고종 때에는 압록강·두만강을 넘어 만주지역에 거주하는 한반도 주민이 늘어나자 간도를 공식적으로 우리 영토에 편입하기 위하여 안변부사 이중하가 국경회담에 나서는 등 외교전을 펼치기도 했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전쟁 중이던 이회영은 1918년에 고종을 망명시키고자 국내에 잠입한 바 있고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은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하기 위해 1919년에 만주로 넘어갔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연해주에서 독립 전쟁을 수행하던 김경천(金擎天)은 연해주·만주·한반도를 중심으로 ‘부여민족’이 동부 시베리아 전체에 퍼져 있음을 지도로 나타내며 “4000년 전부터 만주 및 부여반도에서 웅비하고 또 흩어지던 우리 민족은 지금 이 같은 발전력으로 아시아 전역에 산재하지 아니한 곳이 없도록 분산되었으니 그 열매는 언제 열릴까!”라고 한탄하는 내용이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에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20세기 전기는 한반도 주민이 주권을 상실한 시기임과 동시에 만주지역을 자신들의 역사적 공간으로서 인식한 시기였다. 이러한 인식이 간도에 독립국가 대고려국 건설을 추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한편, 일본은 식민통치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려 하였다. 아무르강(흑룡강)까지 일본의 영향권에 둔다는 취지로 결성된 일본의 우익 조직 흑룡회(黑龍會) 소속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는 일본의 조선 병합을 주장하던 일진회를 이용하여 대아시아 제국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나의) 계획은 미리 이용구·송병준과 숙의한 결과, 일·한합방 이후에는 일진회 백만의 대중을 거느려 만주로 이주시켜 지나혁명의 기회에 타서 만주와 몽고를 독립시키고 일·한연방에 따라 만몽연방국을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만주와 연해주지역에 거주하는 비한족(非漢族) 주민을 이용하여 중국 및 러시아와의 완충국을 만든다는 일본 측의 구상은 1932년의 만주국 건국으로 실현되었다.

대고려국 건국운동은 고종이 1897년 10월 12일 전 세계에 대한제국을 선포한지 20년이 되는 해이다. 태조 이성계는 명의 승인을 받아 ‘조선’이란 국호를 사용하였지만, 고종은 중국과 대등하게 황제를 칭하면서 새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였다. 대한은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의 땅인데 국초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고 하였다.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만주와 연해주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였다. 정안립과 양기탁은 윌슨(Wilson)의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에 영향을 받아 이 지역에 거주하는 비한족(非漢族) 주민의 독립국가 대고려국 건국을 구상하게 되었으며,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도 여기에 대찬성하여 건국의 계획이 진척되면 상해임시정부를 폐쇄하고 간도로 철수하기로 선언하였다.

대고려국 건설구상은 大正10年(1921년) 3월 28일부터 4월 7일까지 11회에 걸쳐 ‘다이쇼일일신문(大正日日新聞)’ 석간 제1면에 ‘대고려국의 건설(大高麗國の建設)’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대고려국 기사가 실린 ‘다이쇼일일신문’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National Diet Library)에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보관되어 있다.

본 원고는 필명 ‘耿君(金玄耿)’이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서 신문을 입수, 번역하여 耿君春秋(hyunk02.egloos.com/3432611) 블로그에 올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가급적 원문을 그대로 옮겼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내용과 표현을 부분적으로 보완하였다.

대고려국의 조상은 해모수
조선인 중 일부가 조선의 독립을 부르짖으며 빈번히 음모를 꾸미고 있고 또한 불령선인(不逞鮮人)은 독립을 핑계삼아 왕성히 약탈을 행하고 있는 이때, 여기에 옛날의 대고려국(大高麗國)을 부흥하여 선인(鮮人)의 자존심을 만족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로써 러시아 및 지나(支那)에 대한 완충국으로 삼으려 하는 계획을 세운 자가 나왔다. 이 음모의 본존(本尊)은 그가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건국업자(建國業者)로, 지나의 제1혁명과 제2혁명에 중요한 역할을 한 스에나가 세쓰(末永節) 씨이다.

스에나가 씨가 계획하는 대고려국의 판도는 옛날 고구려(高勾麗)의 판도를 동남으로 줄이고 서북으로 늘린 것으로, 동으로는 장백산(長白山)으로써 한반도와 경계짓고 서북쪽으로는 스타노보이(外興安嶺), 야프로노보이 및 싱안링(興安嶺)으로 시베리아 및 몽골과 경계를 가르며, 남으로는 만리장성으로 지나와 구별되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예상 판도는 산하이관(山海關) 이북, 장자커우(張家口) 이동의 즈리성(直隷省)과 내몽골과 성징성(盛京省)과 지린성(吉林省)과 러시아령과 지나령을 포함한 헤이룽장성(黑龍江省)과 연해주와 캄차카 전부이다. 일본의 몇 배나 되는 광활한 지역이다.

이 지역은 옛날 정령(丁零), 견곤(堅昆), 숙신(肅愼), 옥저(沃沮), 말갈(靺鞨), 부여(扶餘), 동호(東胡) 등의 여러 민족이 유목하던 땅이다. 동호는 원래 몽골의 땅에 있었지만 흉노 때문에 쫓겨나서 지금의 동부 몽골에서 만주 및 요동으로 이주하여 오환(烏桓)과 선비(鮮卑)의 두 종족으로 갈라졌다. 오환은 삼국 시대 조조(曹操)에게 멸망당했지만 선비는 동부 몽골에서 만주로 발호(跋扈)하여 송화강 강원(江源)인 지금의 지린성에 있던 부여족을 공격했다.

부여는 이 공격 때문에 둘로 절단되어 하나는 흑룡강 하류의 땅으로 도망쳐 동부여(東扶餘)가 되었고, 하나는 장백산 아래로 물러나 축소되어 본부여(本扶餘)가 되었다. 본부여의 임금으로 해부루(解芙婁)라고 하는 자가 있어 매우 현명한 군주로 그 민족을 이끌고 선비의 큰 물결을 물리쳐 돌려보냈다. 그 때 동족에 해모수(解慕漱)라는 자가 있어 ‘나는 해의 신의 자손이다’고 하며 본부여로 와서 해부루를 쫓아냈다. 그래서 해부루는 북방으로 도망가 동부여의 임금이 되었다. 해모수가 대고려의 조상이다.

해모수가 본부여의 임금이 되고 나서 사냥하러 나가서 장백산 산기슭으로 갔는데 당시 송화강 수원지에 한 사람의 수신(水神 : 진서(晉書)에는 하백(河伯)이라 적혀 있다)이 있어서 수신의 딸로 유화(柳花)라고 하는 아름다운 여신이 있어 그녀가 하루는 수중에서 나와 강가의 광야를 소요하고 있었다. 임금인 해모수는 이를 보고 그 선연(嬋娟)한 아름다움에 빠져서 그녀를 납치하여 부근의 석굴에 데리고 들어가서는 여러 날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후 유화가 해모수의 손에서 벗어나 아버지 하백에게 돌아왔지만 하백은 젊은 부인(婦人)의 몸으로 아버지의 허락도 받지 않고 남자의 처소에 머무르다 온 것은 괘씸하다고 하며 만나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유화는 어쩔 수 없이 울며불며 강가를 서성이고 있으니 금와(金蛙)라고 하는 호걸이 와서 자세한 사정을 듣고 불쌍하니까 도와주겠다며 함께 데려와서 동부여로 갔다.

금와의 영명(英名)은 동부여에서도 널리 잘 알려져 있었으므로 임금인 해부루는 맞이하여 양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다. 유화는 동부여에 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 두발이 길고 이(齒)가 자라 있었다. 장성함에 따라 신체가 장대하고 힘이 매우 세며, 또한 활의 명인으로 백 걸음에서 버들잎을 뚫었다.

부여에서는 활의 명인을 ‘시모’라고 하였으므로 이 태어난 아이를 시모(朱蒙 : 이후 등장하는 ‘시모’는 편의상 주몽(朱蒙)으로 표기한다)라고 이름 지었다. 금와가 유화를 만나기 전에 동부여에 있던 때 아내가 있어 그녀와 유리(類利)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금와가 해부루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때 유리는 태자가 되었다.주몽은 호걸이기는 하였지만 금와는 그를 “자신의 아들이 아니다, 해모수의 아들이다”고 하여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워하여 끝내는 죽이려고까지 생각했다. 그래서 어머니인 유화는 주몽을 불러 신변의 위험을 알리고 어서 동부여를 떠나도록 가르쳤다.

그래서 주몽은 12명의 가신들을 이끌고 동부여를 떠나 장백산 속으로 들어와서 여기에 나라를 세우고 있는 송예(松豫)라는 자를 정복했다. 송예는 주몽과 무기를 비교해 보고 그가 ‘해의 신의 자손’이라는 것을 알고 마음으로부터 항복했다. 주몽은 그의 병력을 병합하고 사방을 공략하여 고구려국(高勾麗國)을 건설했다. 주몽의 자손 중에는 영명한 군주가 많이 나왔으므로 그 판도는 동으로는 대동강을 한계로 하고 서로는 싱안링(興安嶺)에 이르며, 북으로는 흑룡강에 이르고 남으로는 발해만에 임하는 대왕국을 건설했다. 이것이 이번에 스에나가 세쓰 씨 등이 광복을 부르짖고 있는 대고려국의 판도이다.

수도는 간도의 중심 용정촌에
대고려국의 판도는 고대 연해주와 만주에 일대에 세력을 펼쳤던 조선민족의 조상, 부여족의 판도를 답습한 것이다. 대고려국의 판도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북으로는 연해주를 포함하고 흑룡강 하구에서 출발하여 흑룡강을 따라 만저우리까지를 잇는 중국-러시아 국경선을 경계로 하고, 서로는 흥안령산맥을 따라 몽골 사막을 경계로 삼으며, 남쪽으로는 만리장성을 따라…



목록  
총 방문자수 : 5,690,151 명
오늘 방문자수 : 180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