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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특별기획 우리 영토이야기⑧ 우리 국토(國土), 강역의 변천사 첨부파일 : 다운로드[1]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7-01-11 조회수 : 374


서위압록 동위토문 백두산정계비를 찾아서(2)


청전 조병현 박사의 우리 영토이야기 - 우리 국토(國土), 강역의 변천사

白頭山定界碑 役割 再評價
백두산정계비는 1712년(숙종 38) 조선과 청국 사이에 백두산 일대의 국경선을 표시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청나라의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 등과 조선 관원들의 현지 답사로 건립되었다.
국경은 자연적 경계 및 기하 경계(혹은 직선 경계)로 구분한다. 자연적 경계는 강이나 산맥․호수․바다 등이 국경선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산맥은 분수선(分水線), 가항하천(可航河川)은 하류로 향하는 항로의 중앙선, 불가항하천(不可航河川)은 양쪽 기슭으로부터의 중앙선이 국경이 되며, 호수와 내해(內海)는 전적으로 특별한 합의 또는 관행에 따른다.

기하 경계는 지도나 해도에 직선으로 그려진 국경이다. 아프리카나 서아시아, 북아메리카의 국경은 경위도에 따라 그어진 경우가 많다. 국경은 민족이나 언어, 문화의 경계를 따라 만들어 지기도 하고, 군사적 분쟁의 결과로 만들어진 경우도 많다. 경계가 지표상에서 실제로 표현되기까지는 경계결정(delmitation)과 경계설정(demaracation)이라는 두 과정을 거치게 된다. 먼저, 조약이나 협정에 의해 경계를 정하는 것을 경계결정이라고 한다. 즉, 회담 테이블 위에서 국제정치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경계규정단계이다.

경계설정은 “실제적으로 경계선을 토지위에 정치(定置)하는 일”을 말한다. 경계결정이 정치적 차원의 것이라면, 경계설정은 실무적 차원의 일이다. 경계설정 과정에서는 경계용 울타리나 기타 경계표지가 토지에 세워져 경계를 현실적으로 인식케 하는 경계 작성(boundary making)의 마지막 단계이다.

백두산정계비 설치는 이런 경계설정 이론에 100% 적합하지 않지만 그 당시 경계설정 방법으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로 볼 수 있다. 오랜 봉금으로 조선과 청의 경계가 불분명한 변경지역을 양측 국왕이 파견한 대표들이 백두산을 직접 탐사 자연․지리적 요소인 분수령을 찾아 두 강을 경계의 기준으로 하는 정계비를 건립하여 경계표지를 분명히 설치한 대표적인 경계설정 사례이다.

토지와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인과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인 지적학 측면에서 살펴보면 백두산정계비는 경계표지석으로 손색이 없다. 백두산정계비의 역할을 지적학 측면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첫째, 國境을 표시한 境界線이다. 백두산정계비는 단순한 비석이 아니라, 지적정보 중 국가간의 경계를 나타낸 인위적 경계선이라는 것이다. 백두산정계비 설치 당시 토문강 상류지역과 석퇴-토퇴-목책의 연결선이 하나의 국경선이 되고, 영역의 한계가 지워지기 때문이다.

목극등 일행은 정계비를 세우고 무산으로 내려가 다시 조선 접반사 박권과 만나 원류에 끊어지는 곳이 있어서 경계가 모호하니 목책을 세워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에 대하여 논의한 후 흙두렁, 돌무더기로 책을 쌓는 것에 대한 합의 공문을 교환하였다.

조선은 곧 설책공사를 착수하였는데 목극등이 지정한 바에 따라 정계비에서 토문강의 발원지까지 185개의 흙두렁과 돌무더기를 쌓아 양국의 경계를 분명히 하였다. 이처럼 정계비에서 토문강 물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곳까지의 약 100여리는 아주 주도면밀하게 인위적으로 표식을 만들어 양국의 경계를 표현했던 것이다. 이는 장래의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목극등의 요구로 조선이 축조한 것이다.

홍양호의 <백두산고>에는 정계비 인근에 있는 돌무더기에 대한 생생한 표현들이 나타나 있다. “산에 마른 도랑이 있는데 도랑 남쪽 언덕에 돌덩어리들이 쌓여 있다. 혹 10무(1무는 반걸음)에 한 무지가 있거나 혹은 20무에 한 무지씩 있다. 이것이 국경을 정할 때 표식으로 쌓은 돌이라고 한다. 도랑을 따라 서쪽으로 수십무 가고 평지를 따라 꺾어들어 북쪽으로 50~60무 올라가면 도랑이 끝나면서 비석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 백두산정계비는 境界點標識이다. 백두산정계비는 국제조약에 의한 국경 경계점의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 설치 지점은 백두산 정상이 아니라 남동방 4km, 해발 2200m 지점이며, 비면(碑面)에는 국경을 “西爲鴨綠, 東爲土門”이라고 하였다. 그 이후 설치 위치에 대한 의견이 대립되었을 때 조선에서 위치를 이동하였다고 억지를 부렸지만 비문에 새겨진 내용이 바뀌지는 않는다. 비문에 새겨진 내용이 중요하지 설치한 위치가 이동되었다고 해서 경계가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

최근 북한 학자들과 고구려 유적을 공동 조사하기 위해 방북한 고구려연구재단 김정배 이사장은 “원래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던 자리로 알려진 백두산 정상에서 남동쪽 4㎞ 지점(해발 2200m)에서 정계비 받침돌을 찾았다”고 밝혔다. 정상인 장군봉 등정로에 있는 주차장 인근에서 정계비의 위치를 확인하였다. 정확한 위치는 백두산 병사봉(장군봉)과 대연지봉 사이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한당국이 1980년 세워둔 흰색 표석(높이 45㎝, 폭 25㎝)과 정계비를 받치던 받침돌이 남아 있다. 표석이 위치한 곳은 행정구역상 양강도 삼지연군 신무성 노동지구로, 북한군 초소 뒤편에 있는 표식의 대략적인 좌표는 북위 41도 59분, 동경 128도 5분이다. 이 위치는 백두산정계비 내용과 같이 서로는 압록강 동으로는 토문강이 보이는 위치이다.

셋째, 백두산정계비는 국경을 등록한 地籍圖이다. 백두산정계비는 지적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경계에 대한 사항을 82자로 비문에 새겨 공시한 지적공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간도 땅은 무인지경에 가까웠으나 조선 중기부터 조선인들이 계속 진출하면서 조선과 청국 사이에 귀속문제를 놓고 다툼이 시작됐다. 조선과 청은 백두산 일대를 직접 답사해 경계가 될 상류 등을 확인한 결과를 토대로 백두산정계비를 설치함으로 비교적 근대적 의미의 국경조약을 맺은 것이다. 토문강은 상류에서 물이 흐르다가 복류하여 수십리 내려가서 다시 물이 흐르기 때문에 그 지역에 토퇴-석퇴-목책을 쌓도록 합의를 보았는데 문제는 그 뒤에 발생했다.

청은 이로부터 160여년 뒤인 1885년 정계비문해석에 이의를 들고 나섰다. 즉, 토문강은 중국 발음으로 비추어 볼 때 두만강과 같은 하천이니 두만강을 경계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측은 이에 대해 토문강과 두만강은 별개의 하천이니 필요하다면 현지실사를 다시하자고 맞섰다. 당시 담판기록에 따르면 청쪽은 논리가 궁해지자 나중에는 백두산정계비는 그 비문에 양측 대표의 서명이 없으므로 이를 국경조약으로서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정계비의 비문은 82개의 문자로 된 것이나 체약당사자의 대표자의 서명을 결했으므로 성문의 형식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정계비는 청국과 조선의 쌍방대표가 백두산에 올라 회담하고 합의하여 건립한 것이므로 정계비는 구두합의(oral agreement)에 의한 조약이며, 정계비의 비문은 구두합의의 증거로 된다. 국가간의 구두합의는 그것의 기록으로 성문화되어(record in writting) 있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당사자를 구속하며, 구두합의의 사실이 증명된 때에 이는 국제재판소에 의하여 적용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국제법 주체간의 합의는 성문의 형식을 취해 왔으나 구두합의도 그 예가 적지 않게 있었다. 1863년 터키와 서구제국 간에 구두협정이 체결된 바 있으며, 1883년 프랑스 외무장관과 Austro-Hungaria 대리대사간에 기체결 된 통상조약을 구두합의로 그 효력을 연장시킨 일이 있다. 그렇지만 판례는 구두합의를 조약으로 보지 않는 것이 우세하지만 그의 법적 구속력은 인정하고 있다. 또한 상설국제재판소도 구두진술의 법적구속력을 인정하고 있다.



다시 찾은 白頭山定界碑
백두산정계비는 1712년 설치된 이래 1931년까지 오랜 세월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1931년 7월 28일과 29일 사이 야간에 사라졌다. 일본인 백두산 등반대 1진이 백두산정계비가 있는 곳에서 숙영하는 혜산진수비대 50명과 무산 삼장수비대 50명을 남겨놓고 백두산에 먼저 올라간 다음 2진과 일본군 호위대가 그 뒤를 따라와 정상에서 합류했는데 하산하면서 보니 백두산정계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백두산 등산로’라는 푯말이 대신 서있었다.

북한의 황철산 교수는 ‘문화유산’논문에서 백두산정계비가 1931년까지 220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없어졌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때는 9·18사변 직전으로 일제는 만주 강점의 만단의 계획과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날강도 일제의 군부는 지령을 내려 이 유서깊은 력사적 유적을 계획적으로 인멸한 것이었다”고 서술했다.

황 교수는 또 정계비의 향방에 대해서도 “백두산은 무쌍하게 웅대하나 급준하지는 않으므로 정계비가 서 있는 지점까지는 말도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신무성까지는 약 24㎞나 되며 신무성에서 혜산 또는 삼장까지는 80㎞가량 된다. 당시 이 구간도 겨우 인마가 통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 비를 자취 없이 운반하여 가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아 혹시 이 근방 어느 지점에 매몰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비가 섰던 자리에는 비를 꽂았던 자연 암반에 뚫은 구형 구멍만 남아 있다”고 하였다. 지금은 그 자리에 북한이 1980년도에 세운 흰색 표석이 남아 있다. 2007년 동북아역사재단이 백두산정계비 터를 찾아서 나섰던 길을 따라 백두산정계비를 찾아가 보자. 평양 순안공항에서 프로펠러비행기를 타고 1시간 30분 날아가면 백두산 출입구인 삼지연공항에 도착한다. 마이크로버스로 갈아타고 갑산에서 무산으로 시원스럽게 뚫린 도로를 달려가면 백두산정계비 터가 있는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 두 코스가 있다. 삼지연공항을 기점으로 ①삼지연→이명수폭포→건창→백두산밀영→백두폭포→백두다리 코스와 ②삼지연→신무성→무두봉→백두다리 코스가 있는데 두 길은 모두 백두다리 직전에서 만난다.

①번 코스는 약45km로 시간이 더 걸리지만 볼 것이 많고 자연과 접하면서 탐방 할 수 있는 장점이 있고 ②코스는 38km로 볼 것은 적지만 빠르게 백두산에 접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삼지연공항에서 백두산정계비 표석이 있는 주차장까지는 차량으로 1시간 10분 정도 걸린다. 주차장은 백두산 향도봉 아래 향도역까지 연결된 궤도식삭도(인클라인)의 출발지인 백두역 좌측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이 주차장 좌측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국경경비대 초소 옆에 백두산정계비 표석이 있다. 초소 경비병에게 물어보면 ‘저기’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준다. 최근 주차장을 확장하면서 받침돌 바로 아래에 배수로를 설치하는 바람에 받침돌 앞면이 많이 드러나 있다.

표석은 높이 45cm 가량 되는 흰색 직사각기둥으로 표면에는 아무런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다. 백두산정계비 터에 서서 좌우를 둘러보면 ‘분수령’의 의미가 한 눈에 들어온다. 비석은 장군봉과 대연지봉 사이의 골짜기에서 장군봉 쪽으로 올라가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양쪽으로 시야가 시원스레 터져 있다. 서북쪽으로 장군봉과 향도봉이 올려다 보이고 동남쪽으로 연지봉이 내려다 보인다. 그리고 동, 서 양쪽으로 시작되는 물줄기의 흔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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