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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특별기획 우리 영토이야기⑦ 우리 국토(國土), 강역의 변천사 - 西爲鴨綠 東爲土門 白頭山定界碑를 찾아서 - 첨부파일 : 다운로드[1]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6-12-06 조회수 : 373

서위압록 동위토문 백두산정계비를 찾아서


조병현 박사의 우리 영토이야기 - 우리 국토(國土), 강역의 변천사

白頭山定界碑의 建立 過程
1887년 조선과 청의 국경회담 당시 최대 걸림돌은 1712년(숙종 38년)에 세운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의 토문에 대한 해석이었다. 백두산정계비에는 국경이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東爲土門)”으로 되어 있다. 동위토문을 두고 조선은 토문을 송화강(松花江)의 지류를 가리키는 것이라 하였고, 청은 두만강의 이칭(異稱)이라 하여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청은 백두산정계비에 분명하게 한자로 토문이라고 기록해 놓고, 국경회담에서 圖們(두만)과 같은 것이라고 억지를 부린 것이다. 만약 토문이 한글로 기록되어 있거나 한글도 병기 되어 있었다면 토문과 도문의 한자나 발음이 동일한지의 여부가 문제 될 수 있었겠지만 한자의 경우에는 글자가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발음이 같다고 할지라도 명확하게 다른 강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토문강과 두만강이 있는 위치만큼 영토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만약 토문강으로 국경을 결정하게 되면 우리 영토는 압록강~백두산정계비~토문강~송화강~흑룡강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중국은 근본적으로 영토분쟁을 차단하는 방법으로 두만강과 토문강은 동일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강역을 논의할 때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백두산정계비에 대하여 보다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중국과 우리의 공식적인 최초 국경선은 유조변책(柳條邊柵)이다. 유조변책은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의 강화조약인 강도회맹(江都會盟)에 의하여 설치되었다. 강도회맹에 “朝鮮國與金國立誓 我兩國已講和好 今後兩國 各遵誓約 各守封疆(조선 국왕은 금국과 더불어 맹약을 한다. 우리 두 나라가 이미 화친을 결정하였으니, 이후로는 서로 맹약을 준수하여 각각 자기 나라를 지키도록 한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국경선에 버드나무를 심고, 변문(邊門)과 책성(柵城)을 설치하였다. 책성이란 성과 그 주위에 둘러싸인 나무 울타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책성을 국경선으로 인정하는 데는 이의가 없다. 청의 병법에도 “공무(公務)로 책성의 통행문인 변문을 나갈 때는 병부(兵部)가 발행하는 군부(軍符) 없이 나오거나 들어 갈 수 없다”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청 호부의 기록에 의하면 태종이 1638년에 압록강 하류지점 남반에서 신의주 대안인 단동(丹東)에서 약 200리 북쪽에 있는 봉황성 변문을 거쳐 감양변문(京興)을 지나 성창문(城廠門)과 왕청변문(旺晴邊門), 산해관에 이르는 노변 방압공사(防壓工事)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1670년(강희 9년)부터 1681년까지 개원(開原) 위원보(威遠堡)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전장 343.1km의 신변을 설치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당시 설치한 유조변책의 흔적은 사평(四平)에서 이수(梨樹), 공주령(公主嶺), 이통(伊通), 장춘(長春), 구태(九台)를 거쳐 서란(舒蘭)까지 구불구불하게 아직도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강도회맹의 각수봉강(各守封疆)에 나타난 바와 같이 유조변책의 이동지역은 오늘날 비무장지대와 같이 출입을 금지하는 봉금지역으로 설정되어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대청황제로 중원에 군림하게 된 강희제는 러시아가 동진정책을 펼치면서 그 세력이 흑룡강 연안까지 미쳤고, 청의 변경을 잠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두산 주변의 국경선을 명확하게 확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더구나 백두산을 청의 판도로 편입시키고자 하는 뜻을 갖고 있었지만, 백두산에 관한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강희제는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를 편찬하면서 지리가 불분명한 청조 발상지를 확인하기 위해 백두산 일대 답사를 계획하고, 1677년 내대신 무목눌(武木訥)에게 답사시켰다. 무목눌의 답사 보고를 듣고 강희제는 백두산을 청나라 조상의 발상지로 결정하고, 백두산에 제사를 지냈다.

또한 강희제는 봉금지대를 대신해 선 개념의 국경선을 채택하기로 결정하고 실측에 의한 지도를 제작하였다. 1708년(강희 47년) 프랑스인 선교사 레지(Regis), 부베(Bouvet), 자르트(Jartoux)에게 명하여 7년 동안 중국 땅 모두를 삼각측량법에 의하여 실측하였다. 그 후 1710년(숙종 36년) 조선의 이만지(李萬枝) 등이 봉금지역인 압록강 대안지방에서 청인 5명을 살해하고, 그들의 인삼을 약탈한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국경조사에 나섰다. 당시 청의 국경조사 상황은 강희실록(康熙實錄)에 잘 나타나 있다.

이만지사건 2년 후 백두산정계비가 건립되었다. 청이 백두산정계비를 건립하게 된 동기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백두산을 신성시해서 항상 이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고, 둘째는 상호 월경을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채삼(採蔘) 등의 목적으로 월경하는 한인이 많아 살인사건이 빈번이 발생하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 국경을 확정한 것이다. 강희제는 1712년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을 변계사정관으로 파견하여 조선과 청의 국경을 조사하도록 지시하고, 조선에 공문을 보냈다.

조선은 2월 24일 청의 예부(禮部)로부터 통고를 받고 청의 요구에 불응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참관 박권(朴權)을 접반사(接伴使)로 임명하여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와 함께 국경책정업무를 맡게 하였다. 접반사 박권이 청대(請對)하여 중국과의 경계를 정하는 일에 대해 논의하자 숙종은 “강역(疆域)은 지극히 중요하니 반드시 힘써 다투되 대단한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반드시 즉시 장문(狀聞)하라”고 하였다. 박권이 또 말하기를, “장문의 왕복(往復)에 언제나 여러 날이 소요되니, 사기(事機)를 점점 그르치게 됩니다. 큰일 외의 사소한 절목(節目)은 남병사(南兵使)·북병사(北兵使)와 더불어 서로 의논하여 적절하게 일을 처리할 것을 청합니다”라고 하니 윤허하였다.

목극등은 흥경(興京) 방면으로부터 압록강에 이르러 10일간 강을 따라 올라가 후주(厚州)에서 조선의 사신과 만났고, 다시 4일 후 혜산진에 이르러 여기서부터 육로를 택해 답사하였다. 이때 목극등은 조선의 접반사인 박권과 함경감사 이선부는 늙고 허약해 험한 길을 갈 수 없다며 무산에 가 있게 했다. 접반사 군관(軍官) 이의복(李義復), 감사군관(監司軍官) 조태상(趙台相), 통관(通官) 김응헌(金應縉)을 거느리고 조선과 청의 국경이라고 인정되는 압록강과 토문강의 분수령에 올라 백두산정계비를 건립하였다.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후 일행은 다시 지세를 살피며 무산으로 내려가서 헤어졌다. 이 과정은 박권의 <배정일기(北征日記)>와 홍세태 <白頭山記(白頭山記)> 등에 나타나 있다.

1712년 4월 29일 목극등을 만난 김경문이 “백두산 정상에는 큰 못이 있어서 동으로 흘러 토문이 되고 서쪽으로 흘러 압록이 되니 이것이 곧 남북의 경계”라고 주장하였다. 목극등이 “(그 경계는) 황제께 주문(奏聞)하여 정한 것인가, 어떤 역사책에 근거할 만한 것이 있는가”를 묻자 김경문이 “우리나라가 옛날부터 이곳을 경계로 삼았음은 부녀자나 어린이도 모두 알고 있는 사안”이라고 답하였다. 5월 5일에는 목극등이 밤에 김지남을 불러놓고 변경지역 정보를 묻자 “장백산 꼭대기 큰 호수 남쪽이 바로 우리나라의 경계입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5월 8일은 목극등이 백두산 답사 팀에서 김지남을 제외하자, 김지남이 목극등에게 백두산 답사 후 지도를 한 장 그려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목극등이 “대국의 산천은 그림으로 그려줄 수 없지만, 백두산은 이미 그대들 나라 땅이니 그림 한 폭 그려주는 것이 어찌 어렵겠는가” 하였다. 김지남이 “만일 백두산이 대국의 산이라면 어찌 감히 부탁할 마음이 생겼겠습니까”라고 하자, 목극등이 “잘 알았다”고 답하였다. 김지남이 숙소에 돌아와 접반사 박권 등에게 목극등의 말을 전하자, 박권이 “조정에서 염려하던 것이 오로지 그것이었는데 목극등이 백두산은 그대들의 땅이라는 말을 하였으니 다행한 일이다”라고 답하였다.

5월 11일 백두산에 오른 김경문과 목극등이 압록강의 근원을 찾은 뒤 동쪽으로 물줄기가 갈라지는 곳에 이르러 “이곳을 분수령(分水嶺)이라 이름짓고 비석을 세워 경계를 정할만하다”고 하자 김경문이 찬성하였다. 5월 12일에 목극등이 “토문의 원류가 중간에 끊어져서 땅 속으로 흐르므로 강계가 분명치 않다”며 다시 물길을 살피게 하였다. 목극등이 이어 사람을 시켜 너비 2자, 길이 3자 크기의 돌을 깎고 분수령에서 귀부를 취하여 정계비를 세웠다.

산에서 내려온 목극등이 박권 등에게 “토문강의 원류가 끊어진 곳에는 담이나 울타리를 쌓아서 그 아래에 수원을 표시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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