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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조병현박사 우리영토이야기 ⑤ 조선과 청의 국경회담 끝나지 않았다2 첨부파일 : 영토이야기(11dnjfgh).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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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6-11-13 조회수 : 411

조선과 청의 국경회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2)


[특별기획] 조병현 박사의 우리 영토이야기 - 우리 국토(國土), 강역의 변천사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 이중하를 추억하다
오늘, 우리가 토문감계사 이중하를 추억하는 것은 청국과 국경의 강역을 조정하는 외교 담당자로서 어떻게 처신했으며, 당시 조선 관원들의 국토와 국경, 영토에 대한 의식이 어떤 수준이었는지 확인하여 오늘의 귀감으로 삼고자하는 데 있다.

이중하는 1846년 11월 9일 양평군 갈산면 공흥리 315번지에서 현감 이인식의 아들로 출생하여 1917년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후손이다. 자는 후경(厚卿), 호는 규당(圭堂)이다. 1882년 9월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1884년 10월 정부공사관(政府公事官)이 되었다. 1885년 4월 함경남도 안변부사, 9월 토문감계사가 되어 청의 차관 가원계(賈元桂)와 백두산정계비를 답사, 국경분쟁 해소에 노력하였다.

두만강 발원지를 탐사하여 목극등(穆克登)이 백두산정계비에 기록한 토문강이 청의 주장과 달리 두만강과는 전혀 별개의 강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1887년 2차 회담에서 청은 더욱 고압적인 자세로 나오자 “내 목을 자를지언정, 국경은 줄일 수 없다. 어찌하여 당신들이 이런 협박을 가하느냐” 하면서 목숨을 걸고 청의 대표들에게 그 무례함을 책망하였다.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로 청의 요구를 묵살했다.

청은 조선의 양보를 요구하였고 이에 대하여 조선은 비록 수리(數里)의 땅이며, 백성도 살 수 없고 경작도 할 수 없는 쓸모없는 것이지만 국토를 가벼이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중하는 양보를 하는 척 하면서도 현명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에 결국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돌이켜보면 아직까지도 간도지역이 ‘분쟁지역’으로 남아 있는 것은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이중하가 국경에 관해 결론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중하가 청의 요구대로 국경회담을 마무리했다면 우리는 많은 땅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감계 당시 간도는 새로운 꿈을 이룰 수 있는 ‘신세계’였고 독립운동가들이 빼앗긴 나라를 찾을 수 있는 ‘꿈의 땅’이었다. 이중하가 있었기에 흉년으로 굶주린 주민들은 새로운 꿈을 안고 간도 땅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박경리 선생은 이중하를 독립운동을 전개한 간도의 투사들과 함께 간도에 거주하는 유민들의 터전을 지켜주기 위하여 목을 내걸고 항쟁한 ‘의인(義人)’이라 평가했다.

국경회담에 대한 기록은 숙종실록, 승정원일기와 같은 정사와 개인 문집에도 회담 당시의 상황이 잘 기록돼 있다. 1885년과 1887년 을유·정해 국경회담 때에는 토문감계사인 이중하가 많은 기록을 남겼다. 백두산정계비를 답사한 내용은 ‘감계전말(勘界顚末)’과 ‘감계일기(勘界日記)’에 남아 있다. 특히, ‘감계사등록’은 회담 과정에 주고받은 각종 공문서와 보고서, 개인 일기를 수록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많은 것을 다룰 수 없으므로 이중하가 백두산정계비를 답사하면서 남긴 시를 중심으로 인간미 넘치는 이중하의 ‘국토사랑’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감계일기에’는 날자별 기록과 임금님을 향한 마음이 시로서 잘 나타나 있다. 이중하는 토문감계사로 임명받고 함경도 회령을 출발, 무산을 거쳐 1887년 10월 18일 백두산정계비에 갔다가 다시 10월 27일 무산에 도착하였다.

10월 15일 30리를 가서 홍단사(紅丹祠)에 이르러 제물을 진설하여 사신(祠神)에게 제사하였다. 축문을 읽고 물을 떠서 띠를 벤 곳에 뿌리고 조그마한 정을 고하였다.

“엎드려 바라건대, 우뚝하고 밝은 산신령은 우리나라 여러 산의 으뜸입니다. 여러 강물의 근원이 되고 왕업의 기초를 열었으니 주(周)나라 기산(岐山)이나 한나라 풍(豐) 땅과 같습니다. 비석이 봉우리에 있으니 변경의 끝입니다. 이에 왕명을 받들어 산에 올라 짊어지고 부여잡고 눈 속을 뚫고 바람을 무릅쓰니 저 사람들 마음의 부담이 큽니다. 산신령께서는 우리 어리석은 사람을 불쌍히 여겨 말없이 도움을 내리시어 길이 처음과 끝을 편안하게 하소서.”

10월 19일 아침 일찍 출발하여 30리를 갔다. 삼나무와 자작나무가 빽빽이 들어서서 마치 바늘이 찔러대는 것처럼 사람 얼굴을 마구 때렸다. 나무가지를 구부리고 꺾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나무들이 기울어지고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여 근근이 발을 디디면서 나아가 삼포(杉浦)에 도착하였다.

드디어 한밤중에 밥을 짓고 말에게 꼴을 먹이고 일제히 산에 올랐다. 때는 차가운 눈이 흩날리고 달빛은 비쳤다 가렸다 하였다. 대각봉(大角峯) 북쪽 낭떠러지를 따라 올라갔다. 그 옆은 천 길이나 되어 깊이를 알 수 없는 계곡이 있었다. 한 번이라도 실족하면 생사를 알 수가 없다. 앞서 가며 짐을 짊어진 역부가 이와 같이 추운 혹한에 배가 고프고 얇은 옷을 입었으니 추위에 얼어 쓰러질까 염려되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 나무를 베고 산을 뚫고 눈을 뚫어 길을 냈다. 마치 싸움터에 나가 적을 대하는 기세와 같다. 어려운 기색이 조금도 없으니 그 정성이 더욱 감탄할 뿐이다. 나는 몇 리를 걸어갔다. 그러나 눈이 깊어 발을 옮길 수가 없었다. 말이 넘어지고 혹 엎어지니 고생이 매우 심하였다. 내가 말 위에서 시를 지었다.

男兒宦役摠難謀(남아환역총난모)
남아의 벼슬살이는 모두가 어려운데
夢想那期此遠遊(몽상나기차원유)
이 먼 곳에서 유람할 줄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積雪空山三百里(적설공산삼백리)
눈 덮인 텅 빈 산 삼백 리 길을
五更驅馬上峯頭(오경구마상봉두)
오경에 말을 몰아 정상에 올랐노라.


수십 리를 가니 길이 더욱 험하고 눈은 더욱 깊이 쌓였다. 이때는 하늘빛이 아직 밝지 않아 앞뒤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조금 있으니 산의 모습이 점차 분명해지고 동쪽이 밝아졌다. 찬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오고 온 하늘이 흐릿하여 백두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정말로 어느 방향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계비가 있는 곳도 역시 찾을 수 없었다. 무산 사람 이종려, 김이헌, 황학채 등은 평소 산길에 익숙하다고 하여 처음부터 앞에서 인도한 사람이다. 그런데 민부(民夫) 등과 더불어 방황하면서 길을 찾아 헤매어 혹은 동쪽으로 혹은 서쪽으로 방향을 분간하지 못하였다. 눈바람이 몰아쳐 안주할 수가 없었다.
그때 마음이 멍해지는가 싶더니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어두운 구름이 걷히고 둥글고 붉은 해가 동쪽 하늘에서 떠올랐다. 백두산이 짧은 순간에 눈앞에 전개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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