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토지정책

 

제목 : 김정은과 북한의 개혁·개방 - 北의 제1 모델 중국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8-05-12 조회수 : 129

김정은과 북한의 개혁·개방 - 北의 제1 모델 중국

“돌을 만지면서 개울을 건너라”

글 :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前 조선일보 베이징특파원


⊙ 안후이성 샤오강촌의 인민공사 해체 실험 성공, 농업개혁이 개혁개방의 첫걸음
⊙ 1979년 덩샤오핑, 미국 방문길에 카우보이 모자 쓰고 외자 유치 노력
⊙ 장쩌민, ‘3개대표이론’ 통해 공산당을 無産계급 혁명정당에서 대중정당·집권당으로 변모시켜

朴勝俊
⊙ 58세.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조선일보》 홍콩·베이징 특파원, 국제부장, 중국전문기자, 베이징특파원 겸 지국장,
북중전략문제연구소장, 인천대 중국학연구소 겸임교수 역임.
⊙ 現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 저서: 《등소평 평전》 《중국이 재미있다》 《중국, 중국인 똑바로 보기》
《격동의 외교비록 한국과 중국 100년》.
덩샤오핑에 의해 최초의 경제특구로 지정된 선전시내에 개혁개방을 강조하는 덩샤오핑의 유훈을 적은 간판이 서 있다.
1978년 11월 24일 저녁, 중국 중부 안후이(安徽)성 펑양(鳳陽)현 샤오시허(小溪河)진(鎭) 소속의 샤오강(小崗)촌. 20가구 115명이 사는 이 마을의 옌훙창(嚴宏昌)을 비롯한 농민 대표 18명은 비장한 표정으로 비밀 결의서에 붉은 지장을 찍었다.

“마을의 농지를 각 농가가 나누어 경작하기로 하고 각 농가의 호주들이 서명하고 날인한다. 각 농가는 1년 동안 생산한 곡물 가운데 상부기관에 바칠 것을 각자가 나누어 내며, 정부에 다시 돈이나 양식을 빌리지 않는다. 이 일로 감옥에 가서 죽게 되더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계약서에 쓰지는 않았지만, “만약 이 계약서가 문제가 돼 여기 서명한 사람 중 누군가 목숨을 잃을 경우 여기 서명한 다른 사람들이 그 자녀들을 돌본다”는 이른바 ‘탁고(托孤)’의 약속도 담고 있는 비밀 결의서였다.

이 비밀계약이 체결되기 전의 샤오강촌은 당시 중국의 다른 농촌과 다름 없는 인민공사(人民公社) 소속의 소규모 생산대(生産隊) 형태로 조직되어 있던 시골마을이었다. 인민공사란 마오쩌둥(毛澤東)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이래 토지개혁을 거쳐 중국 전역의 농촌을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주의 방식으로 개조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생산조직이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마오의 이상주의는 중국의 농촌 전체를 가난으로 몰아넣었고, 샤오강촌 역시 “양식은 정부가 농촌에 공급해 주는 것으로 먹고, 돈은 정부의 구제금을 받아서 쓰며, 생산량은 빚을 내서 채운다”는 이른바 전형적인 ‘삼고촌(三村·세 가지를 의존하는 마을)’이었다.


화궈펑의 ‘두 개의 凡是論’

마오쩌둥의 유훈을 강조하는 ‘범시론’을 주장하다 덩샤오핑에게 밀려난 화궈펑.
1978년 11월이면,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자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공산당의 실권을 장악한, 이른바 제11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11기 3중전회)가 개최되기도 전이다. 덩샤오핑은 이 3중전회를 계기로 마오쩌둥이 후계자로 지명한 화궈펑(華國鋒)을 무력화시키고 자신이 실권을 잡아 개혁개방의 시대를 열어가게 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이래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이념에 충실한 토지개혁을 추진하고, 군중노선에 따라 대약진운동을 전개한 결과, 중국경제가 저(低)생산의 깊은 수렁에 빠지자, 자신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피하기 위해 문화혁명이라는 정치투쟁을 전개한다. 1966년부터 10년간 2000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문화혁명 이후인 1976년 9월 9일 마오는 병으로 사망한다.

마오는 사망하기 전 “당신이 일을 하면 내가 안심할 수 있다”는 말을 화궈펑에게 공개적으로 했고, 마오의 말에 따라 후계자가 된 화궈펑은 “마오가 내린 결정과 지시는 무엇이든지 옳다”는 이른바 ‘두 개의 범시론(兩個凡是論)’으로 중국을 이끌어 가겠다고 선포해 놓고 있던 중이었다. ‘두 개의 범시론’이란 북한의 김정일이 생전에 아버지 김일성이 남긴 유언에 따라 북한을 통치한다는 이른바 ‘유훈(遺訓)통치’의 중국판이라고 할 수 있다.


덩샤오핑의 등장

덩샤오핑은 마오의 후계자로 지명된 화궈펑의 그런 통치구상을 11기 3중전회를 통해 뒤집었다. 예젠잉(葉劍英) 국방부장을 비롯해 군부(軍部)의 지지를 받는 덩샤오핑은 1978년 12월 18일부터 24일까지 개최된 11기 3중전회에 앞서 준비 목적으로 열린 중앙공작회의를 통해 당 중앙위원들을 “사상을 해방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으로, 앞을 향해 전진하자”는 구호 아래로 단합시켜 놓고 있었다. ‘사상을 해방하자’고 함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하려던 마오의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자는 뜻이었다. ‘실사구시’란 말은 이미 세상을 떠난 마오가 내린 지시와 결정에 따라 중국이 나아가야 할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현실에 맞는 정책을 선택해 나가자는 뜻이었다. ‘앞을 향해 전진하자’는 말은 마오 시대의 과오에서 벗어나자는 뜻이었다.

중앙공작회의를 통해 미리 당 중앙위원들을 장악한 덩샤오핑은 이어 열린 11기 3중전회를 통해서는 자신의 오른팔이던 후야오방(胡耀邦) 당교(黨校) 교장이 제시한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이른바 진리표준론을 당론으로 채택함으로써 문화혁명을 앞장서 주도했던 마오의 내연의 처 장칭(江靑)을 비롯한 ‘4인방(四人幇)’을 역사의 죄인으로 규정함과 동시에 화궈펑의 두 개의 범시론도 무력화(無力化)시키고 중국이 개혁개방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는 틀을 마련했다.


공산당, 책임생산제 추인

1958년 8월 허난(河南)성의 한 인민공사를 시찰하고 있는 마오쩌둥. 중국의 개혁은 인민공사 해체로부터 시작됐다.
11기 3중전회가 열리기도 전에 옌훙창을 비롯한 18명의 농민 대표가 비밀리에 지장을 찍어 만든 샤오강촌 농민들의 합의는 한마디로 마오쩌둥 시대의 인민공사식 생산 시스템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었다. 마을의 토지를 한 덩어리로 묶고 각 농가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방식으로 농사를 짓다 보니 마을은 가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마을 전체의 농토를 한 덩어리로 묶어 농사짓던 인민공사식 생산체제를 버리고 농토를 각 농가가 나누어서 경작하고, 각 농가의 책임 아래 생산된 농작물을 각 농가가 상부에 바칠 것만 제외하고는 각 농가가 알아서 소비하는 형태의 생산 시스템은 각 농가의 생산량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샤오강촌은 이 비밀결의 다음 해에 약 3만3000근(斤)의 작물을 생산했다. 이 생산량은 샤오강촌이 1955년부터 1970년까지 15년간 생산한 곡물 3만5000근과 비슷한 생산량이었다. 생산 시스템을 인민공사식에서 개별 농가 책임제로 바꾼 바로 다음 해에 무려 15배의 작물을 생산한 것이었다.

샤오강촌 농민들의 비밀결의와 생산량의 놀라운 변화는 곧바로 새로운 권력자 덩샤오핑에게 보고됐다. 덩샤오핑은 1982년 당 중앙 1호 문건을 통해 “(샤오강촌에서 처음 시작된) 책임생산제 역시 사회주의 생산방식의 하나라고 인정할 수 있다”라고 성격 규정을 해주어 정치적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책임생산제는 농민들의 요구에 맞는 것이므로 전국으로 확산되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덩샤오핑이 이끄는 중국공산당 중앙은 1984년 1월 1일 ‘금년의 농촌 공작에 관한 통지’를 통해 샤오강촌에서 시작된 각 농가 책임생산제를 연구 보완하면서 전국으로 확산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샤오강촌 방식은 1987년 전국 농가의 98%인 1억8000만 호로 확산됐다. 마오가 만든 인민공사는 전시용 마을 몇 개만 남기고 모두 해체됐다.


1985년부터 곡물수출국으로 전환

중국 경제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미(美) 경제학자 배리 노턴(Barry Naughton)은 2006년에 출간한 저서 《중국 경제의 변화와 성장(The Chinese Economy : Transition and Growth)》에서 “중국의 농업생산량은 1977~1979년 3억 톤에서 1983~1985년에는 4억700만 톤으로 급증했다”고 확인하고, “1985년부터 중국은 곡물 부족국에서 곡물 수출국으로 바뀌었다”고 진단했다. 노턴은 이와 함께 “중국의 개혁개방은 정치 민주화가 선행(先行)된 동유럽과 러시아와는 다른 경로를 밟았다”고 분석했다.

샤오강촌 농민들이 책임생산제를 위한 비밀결의를 한 것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보다 먼저 이루어진 것인가에 대해서는 최근 들어 중국 내에서도 “샤오강촌 이야기가 과연 진실인가”하는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인민공사를 농촌생산체제의 근간으로 삼았던 마오의 세상이 덩샤오핑의 세상으로 채 바뀌기도 전에 각 농가 책임생산제로 바뀐 사실은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식의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하지만 샤오강촌 농민들이 먼저이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 먼저이건, 결과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 각 농가별 책임생산제를 새로운 농촌 생산방식으로 채택하는 결과를 낳았고, 그런 선택이 중국 농촌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아 마오쩌둥 시대의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선전·주하이·샤먼에 경제특구를 만든 이유

1979년 2월 미국을 방문한 덩샤오핑이 텍사스주의 한 로데오 경기장에서 카우보이 모자를 써보고 있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이에 따른 빠른 속도의 경제발전이 이루어진 배경이 된 중국공산당의 또 다른 선택은 외국의 자본(FDI)을 끌어들인 것이었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자 덩샤오핑은 외국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11기 3중전회에서 실권을 장악한 바로 다음 해인 1979년 1월 1일 미국과 수교(修交)를 하는 한편, 1월 29일부터 2월 5일까지 일주일간 미국 방문길에 나섰다. 중국과 미국의 화해는 1971년 마오쩌둥의 전략적 결단과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능수능란한 외교술로 이뤄진 것이지만, 수교의 매듭을 지은 것은 덩샤오핑이었고, 덩샤오핑은 미국과의 수교 직후 미국을 방문해 미국 사람들에게 웃음을 던지고, 미국식 카우보이 모자를 쓰는 제스처를 동원해 미국 내 투자자들을 안심시켰다.

곧이어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투자자들을 유치하고, 대외수출 창구 역할을 할 경제특구(經濟特區·Special Economic Zone)를 중국 남부의 광둥(廣東)성에 건설했다. 경제특구는 1980년 선전(深?), 주하이(珠海), 산터우(汕頭), 샤먼(厦門) 등 4개 지역에 우선적으로 설치됐다. 선전은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의 경제체제를 학습하기 위해, 주하이는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마카오의 체제를 학습하기 위해, 그리고 샤먼은 타이완해협 건너 대만 경제를 학습하라는 뜻으로 위치 선정이 이뤄졌다.

덩샤오핑은 1992년에는 전 세계의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상하이(上海) 황푸(黃浦)강 동쪽의 푸둥(浦東) 지역에 동방명주(東方明珠) 타워를 비롯한 고층건물 밀집지역을 건설했다. 전 세계의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쇼룸의 건설은 성공으로 이어졌고, 결과는 FDI의 성공적 유치로 연결됐다.

덩샤오핑이 미국에 가서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웃음을 던지고, 남부 광둥성 일원에 경제특구를 건설하는 한편, 중국의 시장경제로의 변화를 상징하는 푸둥 지역의 쇼룸을 만든 결과, 중국이 해외로부터 끌어들인 FDI는 1992년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여, 1996년 400억 달러 규모로 불어났고, 2004년에는 630억 달러 규모로 확대됐다. 이후 중국은 FDI 유치 1위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공산당의 성격변화

2002년 중국공산당 제16차 당대회는 장쩌민의 ‘3개대표이론’을 채택했다.
이 기간 덩샤오핑은 외부에서 보기에는 과감한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것으로 보였으나 내부적으로 “개울물을 건널 때 발 아래의 돌이 미끄러운지 만져가면서 건너라(摸着石頭過河)”라고 지시하면서 개혁개방 종사자들이 신중함을 잃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안후이성 벽지의 농촌에서 시작된 개별농가 책임생산제를 전국으로 확산시키고, 대미 외교관계를 개선하는 한편, 경제특구와 상하이 푸둥지구라는 쇼룸을 만든 것이 덩샤오핑이라면, 개혁개방과 경제발전의 결과 생겨난 부자들과 프롤레타리아 혁명과의 관계를 정비한 것은 덩샤오핑의 후임자 장쩌민(江澤民) 중국공산당 총서기였다. 장쩌민은 당의 이론 담당자들을 독려하여 ‘3개대표이론(三個代表理論)’이라는 논리를 만들어냈고, 이 논리를 2002년 제16차 당대회를 통해 당 강령에, 2004년에는 헌법 전문(前文)에 삽입하는 데 성공했다.

3개대표이론이란 “중국공산당이 생산력과 문화, 그리고 전 인민을 대표한다”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에서도 특히 “중국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無産階級)를 대표하며, 중국공산당의 활동목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구현하는 데 있다”는 중국공산당의 아이덴티티를 “중국공산당이 무산계급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개혁개방과 경제발전으로 부자가 된 유산계급을 포함한 전 인민을 대표한다”로 수정함으로써 중국공산당의 성격과 노선을 근본부터 바꿔놓았다. 이 3개대표이론이 2002년 당대회에서 당강령에 삽입되고, 2004년 헌법 수정 때 헌법 전문에도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과 3개대표이론을 그 지도 사상으로 삼는다”고 명시하게 함으로써 중국공산당이 과거의 계급투쟁 노선을 버리고 ‘집권당’이라는 이름의 대중정당으로 근본 성격을 바꾸도록 했다. 1978년 말부터 시작된 개혁개방으로 인한 빠른 경제발전의 결과 생겨난 유산계급을 포용하는 논리구조를 마련함으로써 사회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바로 3개대표이론이었다.


小康, 溫飽, 飜兩番

실패로 귀결된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소련식 개혁개방이나 동유럽의 개혁과 중국식 개혁개방의 가장 큰 차이점은 소련과 동유럽에서는 민주화 우선의 선(先)정치개혁, 후(後)경제개혁의 과정을 밟았으나 중국은 경제개혁만 하고 정치개혁은 추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경제개혁만 추진하고 정치개혁은 추진하지 않은 점이 앞으로 중국의 경제발전의 발목을 잡게 될 지는 현재로선 예단하기 쉽지 않다. 다만 1978년 이후 30여 년간 중국이 빠른 경제발전을 해온 데는 ‘선(先)경제개혁 후(後)정치개혁’식의 개혁개방 방식이 기여한 바가 있다는 것이 국제적으로 일반화된 평가다. 중국 내에서는 정치개혁은 않고 우선 경제발전을 시도한 중국식 발전노선을 ‘신 권위주의(新權威主義)’라는 이름으로 정리하기도 한다.

지난 30여 년간 이뤄진 중국경제의 발전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뤄진 데 대해 중국공산당 내부에서는 “문혁이 없었으면, 개혁도 없다(沒有文革 沒有改革)”라는 말을 한다. 겉으로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라는 헛된 이상을 좇으면서 정치투쟁을 일삼는 바람에, 홍위병들의 구타에 수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일체의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바람에 수많은 아사자(餓死者)를 냈던 문화혁명 시기의 고난이 하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어서 다시는 문혁시기로 돌아가기를 인민들이 바라지 않기 때문에 개혁이 성공적으로 추진된 측면이 있다는 아이러니를 표현한 말이다.

중국식 개혁개방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물론 이뿐만 아니라 중국인민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개혁개방 초기부터 제시한 ‘샤오캉(小康)’과 ‘원바오(溫飽)’, 그리고 ‘판량판(飜兩番)’이라는 알기 쉬운 구호의 역할도 크게 작용했다. 중국공산당이 걸어가야 할 최후의 목표인 원시공산사회와 유사한 개념의 ‘대동(大同)사회’ 직전에 사회적으로 부가 축적되어 중산층의 비중이 높아지는 중산층 사회인 ‘샤오캉’사회, 인민을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 해준다는 ‘원바오’, 그리고 2020년까지는 소득을 1980년대 소득의 2배의 2배, 즉 4배로 만들겠다는 간결하면서도 호소력이 분명한 ‘판량판’이라는 정치적 구호를 만들어낸 것도 덩샤오핑이었다.


김정은뿐 아니라 김정일도 샤오캉사회 거론

2001년 1월 상하이를 방문한 김정일은 중국식 개혁개방의 성과를 찬양했지만,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다.
북한의 김정은이 지난 8월 2일 평양을 방문한 왕자루이(王家瑞)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에게 했다는 말은 “중국인민들이 중국공산당의 영도 아래 12차 경제계획 5개년 계획과 샤오캉사회의 건설에서 커다란 성취를 이룩할 것으로 믿는다”라는 것이었다.

국내외 많은 미디어가 김정은이 ‘샤오캉사회’를 거론했다는 점에서 북한이 개혁개방에 나설 가능성이 많다고 예단을 했으나, 샤오캉사회를 거론한 것은 김정은이 처음이 아니라 김정일도 중국지도자들을 만날 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국의 샤오캉사회 건설에 대해 거론했었다. 김정일은 지난 2011년 5월 20일부터 26일까지 베이징을 방문해 중국 고위지도자들과 회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올해는 중국이 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하는 해이며, 우리는 중국인민들이 중국공산당의 영도 아래 전면적인 샤오캉사회의 건설이라는 목표를 능히 실현할 것으로 믿는다.”

김정은이 왕자루이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에게 한 샤오캉사회의 언급은 그의 아버지 김정일이 중국지도자들에게 한 말을 그대로 고스란히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김정일은 1999년 이후 중국 방문 시마다 “중국이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건설에서 이룩한 성공을 축하한다”는 말을 거의 매번 빼놓지 않고 해왔다. 따라서 김정은이 “중국이 샤오캉사회의 건설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북한이 중국식의 개혁개방에 나설 신호탄으로 간주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김정은이 북한을 개혁개방의 길로 이끌 가능성이 있는 요소라고 한다면 김정은이 어린 시절 스위스에서 유학을 했다는 점일 것이다. 중국 서부의 산간 오지라고 할 수 있는 쓰촨(四川)성 광안(廣安)현 출신인 덩샤오핑이 14세 때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자본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경제체제를 학습할 기회가 있었다는 점에서 김정은이 시장경제를 향한 경제개혁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점쳐볼 수는 있을 것이다.


北경제난이 개혁개방의 동력 될 수도

하지만 김정은의 아버지 김정일은 중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상하이는 물론 광둥성 선전과 같은 경제특구를 모조리 둘러보고 시찰하면서도 끝내 제대로 된 개혁개방을 추진하지 않았다. 김정일이 중국지도자들에게 중국식 개혁개방의 성공을 축하하면서도 귀국해서 ‘우리 식대로’를 강조하고 개혁개방에는 나서지 않은 것을 감안한다면, 김정은도 같은 길을 갈 것으로 예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즉 중국지도자들에게 ‘샤오캉사회’를 입에 올리지만 개혁개방에 선뜻 나서지 못한 채 시간을 벌려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김정일이 중국지도자들 앞에서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건설과 경제발전의 성공을 찬양하면서도, 정작 북한에 도입하지는 않은 것은 중국식 개혁개방이 중국에는 맞지만 북한에는 맞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안후이성 샤오강촌에서 시작된 자발적인 책임생산 경영제의 도입이나, 덩샤오핑이 추진한 대미관계의 개선과 외국투자 유치의 성공, 경제특구의 건설, 그리고 중국공산당을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아니라 유산계급을 허용하는 이른바 집권당으로 성격 변화를 조성한 3개대표이론 등은 중국과 북한의 정치경제적 환경이 다른 현실을 감안하면 김정은의 북한으로서는 선뜻 나서기에 망설여지는 요소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 개혁이 성공한 가장 중요한 배경이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수많은 아사자를 낸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1990년대 초반부터 잇단 홍수와 가뭄으로 식량난을 겪어온 북한의 경제난과 인민들의 궁핍한 생활이 오히려 김정은으로 하여금 경제개혁에 나서게 하고 이를 성공시킬 요소라는 점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목록  
총 방문자수 : 5,719,862 명
오늘 방문자수 : 659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