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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조병현박사 우리영토이야기 ⑤ 조선과 청의 국경회담은 첨부파일 : 영토이야기(10월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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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6-10-11 조회수 : 346

조선과 청의 국경회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


특별기획 우리 영토이야기 ⑤ 우리 국토(國土), 강역의 변천사 - 조병현 공학박사

국경분쟁의 발단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간도협약에 의하여 결정된 현재의 국경은 진정한 국경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국경은 어디일까?

1870년대로 되돌아 가보자. 함경도와 평안도에 대기근이 발생하여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고, 조선과 청 사이에는 지금의 비무장지대와 같은 봉금지역이 설정되어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 국경이 맞닿아 있을 경우 국경분쟁을 우려한 청과 조선이 강도회맹을 맺어 간도지역 출입을 금지한 것이다. 조선 측 봉금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이었다. 백성들의 도강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고 이를 위반하는 경우 참수형에 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국민이 간도에 대규모로 이주한 것은 고종 초부터이다. 세도정치와 수탈에 못 견딘 농민들이 봉금지역인 두만강 너머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712년 백두산정계비가 건립된 뒤 160여 동안 국경분쟁 없이 지내 왔으나 함경도민들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특히, 1869년(고종 6년)과 1870년 함경도에 큰 흉년이 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간도로 이주했다. 홍남주(洪南周)는 회령부사로 부임하여 민생고가 극도에 달하여 있는 것을 목격하고 이들을 구제하고 국토확충을 위해서 월강개간을 서둘렀다. 때마침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조중응(趙重應)과 두만강과 압록강 대안(對岸)에 대한 사간(私墾)을 지방유지(有志)와 상의하여 개간을 적극 추진하였다.

당시 면장 임병하(林秉河)도 많은 농민을 동원하였다. ‘인수개간원서(引水開墾願書)’를 부사에게 제출하면 즉시 ‘허간향사(許墾向事)’를 내주었다. 월강죄(越江罪)가 적용되던 지역을 농민들이 개간에 착수한지 불과 수일간에 100여 정보를 개간하였다.

이와 같은 조처에 대해서 회령좌수 이후섭(李厚燮)은 “국법으로 금한 지역을 조정에 문의도 없이 허가한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하였다. 홍남주는 “백성 수만이 곤궁에 헤매고 있는 처지에 이를 구할 수 있으면 임금이 죽음을 준들 무슨 한이 있으랴”라면서 강력히 개간을 밀고 나갔다. 1880년의 ‘경진개척(庚辰開拓)’은 조선인의 북간도 이주와 개척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북부지방의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로서 봉금 이래 지방관의 보호 아래 진행된 집단 개간이었다. 또한 경진개척은 초기 회령 대안의 100여 정보의 평야개척이 목적이었지만 1881년부터 두만강 북안의 길이 500리, 넓이 40~50리에 달하는 광활한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이에 맞서 청도 1881년 봉금을 해제하고 길림장군(吉林將軍) 명안(銘安)을 보내 간도 지방을 답사하도록 하였다. 명안은 이미 우리 동포들이 많은 농토를 개간하고 있음을 보고 본국 정부에 이 사실을 보고하는 한편, 각 현에 개황서(開荒署)를 설치하여 개간사무를 처리하게 하고, 조사위원을 파견하여 개간이 가능한 땅을 조사하였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청은 1882년 초에 우리 정부에 대해 월경사간(越境私墾)을 엄금하도록 요구해 왔다.

“조선인으로서 토문강을 넘어와 농사를 짓는 자는 이미 중국 땅에 씨를 심은 자이므로 중국의 백성이다. 호적을 조사하여 훈춘과 돈화현의 관할 하에 속하게 하여 소송사건은 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처리한다. 금후에는 월경하여 경작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조선 국왕에게 공문을 보냈다. 중국 정부가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중국인으로 취급하여 머리를 변발하고 중국 의복을 착용할 것을 강요하는 치발역복(薙髮易服)정책을 시행하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이때 조선에서는 백두산정계비를 들어 토문강이 두 나라의 국경이 틀림없으니 이의가 있으면 서로 입회 조사하여 국경을 분명히 하자”고 답변을 보내는 등 적극 대응하였다. 그러나 길림장군 명안과 독판영고탑등처사(督辦寧古塔等處事) 오대징(吳大徵)은 조선인들의 입주를 기정사실화하면서 조세의 징수, 호적의 정리, 그리고 범죄자를 청이 직접 다스릴 것임을 통보해 왔다.

조선과 청의 대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883년 4월 길림혼춘초간국사무(吉林琿春招墾國事務) 진영(秦瑛)은 태도를 급히 바꿔 간도의 우리 농민을 모두 쇄환하도록 요구해 왔다. 그 이유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서울 용산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던 청은 조선에 대해 종주국임을 자처하면서 조선 정부에 대한 정치적 압력을 강화하게 된 데 따른 것이다.

원세개(袁世凱)가 가마를 타고 궁을 드나들고 선 채로 고종을 알현할 정도로 청의 위세는 대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길림장군이 우리 조정에 공문을 보내와 두만강 이북에 거주하던 우리 조선국민을 소환해 가라고 요구하고, 1883년 토문강 서북 지방에 사는 한민족을 추방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때에 이미 수많은 조선인이 간도에 들어와 황무지를 개간하고 있었고, 이들은 함경도 관찰사로부터 소유권 문서를 발급받고 지적부에 등록까지 하고 있었다.

청으로부터 토문강 이북, 이서 지방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몰아내겠다는 통첩을 받고 주민들은 크게 분노하였다. 청의 현지 관료들의 태도가 이처럼 경화되자 간도의 한인들은 종성, 온성, 회령, 무산의 주민들과 합동하여 청의 고시가 부당하므로 올바른 경계를 정해 주도록 요구하였다. 토문강과 두만강이 다름을 그들에게 해명하는 한편, 백두산에 가서 정계비 부근과 토문강 원류 일대를 실지 답사하고, 그 자료를 가지고 종성 부사 이정래(李正來)에게 백두산 정계의 사실을 밝히며 대책을 호소했다.

이러한 소식이 때마침 경원부(慶源府)를 순시 중이던 서북경략사 어윤중(魚允中)에게 알려졌다. 어윤중은 보다 신중을 기하고자 종성 사람 김우식(金禹軾)을 두 차례나 백두산에 파견해 현지를 답사시키고 정계비의 탁본을 떠오도록 조처하였다. 어윤중은 김우식의 답사 결과를 토대로 돈화현에 공한을 보내어 “토문강이 두 나라의 국경이 틀림없으니 이의가 있으면 서로 입회 조사하여 국경을 분명히 하자”고 공문을 보냈다.

‘조선 사람이 경작하는 땅은 토문강 이남이다. 토문강을 경계로 하고 더 남쪽에 있는 두만강을 지키는 것과 또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를 황지로 남겨 두고 백성들을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은 국경에 분쟁이 있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중략) 귀현(貴顯)은 설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사정을 잘 알지 못하니 마땅히 사람을 파견하여 공동으로 현장을 답사하여 강희제 때에 작정해 놓은 경계를 분명히 함이 타당하다. 여기에 도문강과 분계강의 구도 사본 1장, 신도 1장, 백두산정계비 탁본 2장을 보내니 잘 알아보고 처리해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백두산정계비를 증거로 토문강과 두만강은 다른 강임을 분명히 하였고 청이 간도지역을 자기 영토라고 우기는데 대한 공식적인 항의였다.
이에 대하여 청은 위원을 파견하여 경계를 확정하기로 하였다. 경계를 조사하여 두만강의 북쪽 지방을 중국 영토로 하고, 조선 사람을 추방하면 두 나라의 분쟁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도 양국의 위원을 파견하여 국경을 조사하기로 하고, 청에 공문을 전달하였다.

고종이 청 조정에 보낸 공문내용은 “우리나라는 서북 지방의 국경을 본래 토문강으로서 경계를 삼고 있다. 강희 51년 오라총관 묵등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변경을 조사한 뒤 비석에 글을 새겨 분수령 위에 세워 토문강 이동과 이서를 정하여 귀국과 조선과의 경계로 하였다. 본국은 혹시 변민들이 소란을 일으켜 귀국에 누를 끼칠 것을 염려하여 토문강 이남의 땅을 비워 놓고 그 곳에 백성들이 들어가 사는 것을 금하여 왔다. 근년에 이르러 우리 백성들이 집을 세우고 농사를 짓는 것은 우리 땅에서 일어난 일이다.

본국의 백성이 본국의 땅에서 사는 것은 조금도 부당할 것이 없다. 돈화현 지사가 두만강을 경계로 알고 계미년 간에 본국의 지방관에게 조회하여 농민을 돌려보낸 것은 경계가 분명치 않기 때문이며, 그로 인하여 후일에 양국 국민의 다툼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귀국은 사람을 보내어 현지를 상세히 답사하여 지난날에 결정된 바를 분명히 함으로서 국경의 분쟁을 막도록 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청은 무성의한 태도로 회담을 지연시키다가 1885년 4월에 함경도안무사 조병직(趙秉稷)에게 월경 조선 경작자들을 무력으로 축출할 것임을 통고하고 일부 지방에서 주민을 강제로 추방하였다. 이에 우리 정부는 청에 대해 토문감계를 다시금 요청했다. 이 요청에 청이 응하여 국경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양국은 위원을 파견하여 현지를 조사하고 국경을 획정하자는데 의견 일치를 본 것이다. 이제 국경분쟁은 현지 관료들의 행정적 문제에서 정치적 문제로 발전되어 새로운 외교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1885년에 제1차 국경회담인 을유감계담판(乙酉勘界談判)이 열리게 되었다.

을유·정해 국경회담의 중단과 국경분쟁 미해결
간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선과 청 사이의 국경회담인 제1차 을유감계담판은 우리 정부의 제안에 청이 응해 1885년 9월 30일부터 11월 30일까지 함경도 회령에서 개최되었다. 주요 쟁점은 백두산정계비 상의 토문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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